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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 '부잔교(뜬다리)'를 구경나온 시골 노인이 1만 톤급 무역선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면서 "쇠는 쇤디 워째 물에 동동 떠있다냐!"라고 했던 말이 회자되던 시절에 찍어두었던 사진 이야기. 

아래 사진은 필자가 스물다섯 살이던 1974년 12월 어느 날 고향집 골목 풍경이다. 가게를 보다가 서울, 인천, 충남 광천 등지에서 아버지 제사를 모시러 왔던 손님들이 가신다는 전화를 받고 도깨비 걸음으로 달려가 카메라에 담았다.

   
1974년 12월 어느 날 고향집(오른편 끝집) 골목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지금도 형님(69세)이 살고 계시지요.
 1974년 12월 어느 날 고향집(오른편 끝집) 골목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지금도 형님(69세)이 살고 계시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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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수탈의 상처를 느낄 있는 사진

37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이지만, 담긴 사연은 족히 책 한 권 분량은 될 것이다. 정면과 좌측으로 보이는 벽돌 건물이 왜놈들의 쌀 수탈이 극에 달하던 1932년에 지어진 가등정미소(加藤精米所)여서 뼈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 

'가등정미소'는 기름진 농토와 노동력을 일제에 착취당하고 피죽으로 연명했던 백성들의 땀과 피눈물이 배어 있는 건물이다. 군산에는 쌀을 저장하는 창고가 이곳을 기점으로 째보선창, 죽성동, 장미동을 거쳐 월명공원 아래 금동까지 태백산맥 줄기처럼 뻗어 나갔다.

일제 때 골목동네 명칭은 '일출정(日出町)'이었고 '일출동(日出洞)'으로도 불리다 해방 후(1946년) '금암동(錦岩洞)'으로 바뀌었다. 오른쪽 집들이 정미소 직원들이 살았던 사택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한 때는 왜놈들이 신고 다니는 '게다짝'(왜나막신) 소리가 요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골목 끝 함석집이 필자가 살던 집인데 안방에 있던 일본식 '오시이래' 같은 벽장이 왜놈 직원이 살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미소 사무직 직원들은 대부분 왜놈이었으며 조선인 노동자나 '미선공'(쌀에서 이물질을 고르는 여공)들은 선양동 말랭이나 중동 움막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사진을 찍은 자리 뒤편은 '일출운동장'으로도 불렸던 '공설운동장'(군산역, 공설시장 등과 이웃하고 있었음)이었고, 주정 원료인 고구마를 찌느라 하얀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문을 열고 200m쯤 나가면 어머니 쌀가게가 있던 째보선창이었으니 사연이 많을 수밖에.  

70년대 중반까지는 주정 원료로 쓰이는 고구마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줄지어 드나들었고, 창고가 모자랄 때는 공설운동장에 미로게임장처럼 쌓아놓아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배고플 때는 고구마 찌는 냄새가 얼마나 달콤하고 고소했는지 모른다.

정미소 창고는 해방이 되자 술 원료를 제조하는 주정공장이 들어섰고, 이어 한국플라스틱, 민주화 열기를 타고 시위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났던 80년대부터는 최루탄 원료를 만드는 공장이 재미를 보다가 정권교체(1998) 이후 가동을 중지했다.

한국 플라스틱 군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서 공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한국 플라스틱 군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서 공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 군산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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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플라스틱이 완공되던 60년대 중반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 전용열차를 타고 참석해서 테이프를 끊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이 모두 헐려 공용주차장과 임시 공설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주정과 플라스틱, 최루탄 원료를 만드는 공장 외에도 비밀 댄스홀. 태권도 도장. 강냉이와 밀가루 배급소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니 소설 한 권 분량의 사연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군인들의 외마디 고함이 들리기도 했던 골목

부대에서 탈영하다 헌병에게 잡혀 개머리판으로 맞는 군인이 내지르는 외마디가 오금을 저리게 했던 때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신작로 건너 공설운동장에 보충연대(논산훈련소 전신)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섯 살 때 부분 마취만 하고 맹장수술을 했던 필자는 당시 보충연대 군의관이 집도해서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반짝반짝 빛나는 U자 모양의 긴 밸브를 피스톤처럼 넣었다 뺐다 하는 트롬본에 반해 배고픈 줄 모르고 군악대를 따라다녔던 추억도 새롭다. 

부대 정문 위병 아저씨에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놀던 추억이 되살아나는데, 부대가 논산으로 이동해갈 때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환송을 해주었다. 문간방에 자취하면서 건빵을 나눠주던 부사관(중사) 아저씨 모습도 가물가물하게 그려지고. 

한때는 비밀 댄스홀이었던 쌀 창고

마주 보이는 대형 창고 1층은 60년대 초 미국이 보내온 잉여농산물을 나눠주던 배급소였다. 도로공사 등에 나가서 일하면 일명 '딱지'를 나눠주었고, 그 딱지를 모았다가 밀가루와 강냉이 등을 타 먹었다. 밀가루를 뒤로 빼돌리다 교도소 신세를 졌던 강씨 아저씨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창고 2층은 바닥에 타일이 깔렸었고, 비밀 댄스홀로 이용되기도 했다. 밤이면 양복·양장 차림의 춤꾼들이 짙은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들끓었는데, 정비석의 소설과 영화로도 만들어진 '자유부인'으로 떠들썩했던 50년대 중반 사회상을 축소해서 옮겨놓은 듯했다. 

여름에는 댄스홀 외에는 갈 데 없는 춤꾼들이 초저녁부터 나와서 춤 연습을 하거나 창문에 걸터앉아 노닥거리다 18세 꽃순이였던 셋째 누님이 빨래하는 마당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대다 아버지에게 된통 혼나기도 했는데 마담이 찾아와 잘못을 비는 것으로 매듭지었다.

양복을 걸친 아저씨가 유성기(축음기) 가방을 들고 오가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홀 천정에는 색색의 불빛을 발하는 둥그런 등이 돌아갔다.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불빛을 보려고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가다 마담에게 혼나던 기억도 새롭다.

늦은 밤에는 골목에서 댄스홀 마담과 제비(?)들이 다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곤 했는데 항상 마담의 승리로 끝났다. 얼추 꼽아보니까 당시 카리스마가 넘치던 미인 마담도 지금은 손자 손녀의 재롱을 지켜보며 세월을 낚는 팔순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것 같다.

사진 속 인물들은 누구?

그럼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맨 오른쪽 검정스웨터 차림에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아주머니는 셋째 누님으로 당시 서른네 살이었는데 작년에 고희(古稀)를 넘겼다. 날이 추운데다 동생이 왔다가 간다니까 무척 서운했던 모양이다.  

하얀 털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뭔가를 만지작거리면서 걸어오는 꼬마는 아기를 등에 업고 뒤따라오는 사돈댁 따님으로 지금은 40대 중년 아주머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돈댁은 7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고.

사돈댁 뒤 새댁은 필자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막내 누님으로 당시 스물아홉 살, 지금은 예순여섯 살로 3년 전부터 암과 투병 중인 할머니가 되었는데, 사진에서는 새 각시티가 여기저기에서 묻어난다.

검정 밍크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활짝 웃으면서 걸어오는 아주머니는 밤이나 낮이나 필자를 업어 키웠다는 고마운 둘째 누님이다. 세월은 속이지 못하는 법, 당시만 해도 서른아홉으로 40대 전이었는데 지금은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다.

둘째 누님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큰 누님이다. 큰 누님은 치매로 3년 넘게 정신과 병원과 요양원을 전전하다 작년 5월 말에 한 많은 세상을 떴다. 그래서일까? 차라리 가려있는 게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안 보면 마음이 덜 아프니까.

둘째 누님 옆에서 구경하는 아주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원식이 엄니'인데 우리와는 이웃으로 친척처럼 지냈다. 안방에서 떠들며 놀아도 혼난 적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 꼴을 잘 보셨다. 큰딸 '정순이'는 필자보다 세 살 아래로 소꿉친구였고 커서도 "오빠!"라고 부르며 잘 따랐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어디에서 사는지 소식을 모른다.  

지금도 '영태 엄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2007년 7월 위 사진과 비슷한 위치에서 촬영한 골목 풍경. 길도 포장되고 건물도 새로 단장했는데 무척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2007년 7월 위 사진과 비슷한 위치에서 촬영한 골목 풍경. 길도 포장되고 건물도 새로 단장했는데 무척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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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뛰놀던 아이들만 20여 명. 그래서 아이들 부르는 소리와 울음소리,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뒤범벅되어 시끌벅적하던 골목이었다. 바닥이 무척 지저분하고 어지러운데 길례 아버지와 채 씨가 나무장수를 하고 있어서 소나무, 볏짚, 합판 잡목 등 나무찌꺼기들이 항상 나뒹굴었다. 

필자가 살던 집에는 밖으로 튀어나온 벽돌로 만든 굴뚝이 두 개 있었는데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거지들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벙거지를 쓴 거지 남편이 얻어온 음식을 아내에게 권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기억도 새롭다. 거지이지만, 엄청 다정하게 보였는데. 

뒷골목에 변전소가 있어서 비가 오는 날에는 고압선을 타고 흐르는 전류가 구렁이 우는 소리처럼 들려서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보일러실이 가까워 소리가 요란했지만, 일하는 아저씨들이 시간을 정해놓고 따뜻한 물을 내주어 소문난 빨래터가 되기도 했다. 

창고 아래로 흐르는 고랑은 미꾸라지와 지렁이가 서식할 정도로 깨끗했다. 판자 울타리들이 서로 껴안듯 엮여 있었으며, 이웃하고 있던 지붕들은 여러 모양의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것 같았던 골목 동네였다. 그 고즈넉한 풍경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진다.

저물녘이면 골목 모퉁이에서 만물상 가게를 하던 '영태 엄니'가 저녁밥을 해놓고 뒷골목으로 아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외치던 "영태야, 여~엉태야, 밥 묵그라!" 소리가 지금도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골목, #고향집, #가등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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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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