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빚 문제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 통계 숫자로만 심각성을 말할 뿐 빚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빚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의 경험담과 함께 '대출 권하는 금융회사'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4편에 나눠 싣습니다. [편집자말]
1998년, IMF 탓에 제가 다니던 회사는 하루아침에 정리절차에 들어갔습니다. 변호사, 회계법인과 한 달을 씨름한 끝에 채권자 동의를 받아 법원에서 '화의(和議)'라는 회생인가를 받았습니다. 회생계획은 잔인했습니다. 동료들이 잘려나갔고 남은 직원의 연봉은 '자진동참'이란 이름으로 삭감됐습니다.

그 추운 겨울날, 따뜻하고 큰 빌딩 사무실을 떠나 허름한 건물에서 손을 호호 불며 전투를 치러냈습니다. 5년간 매월 이자와 원금을 상환해야 했는데 변제일이 되면 하루가 전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이자를 갚지 못하는 사정을 이야기하고 양해를 구하느라 '말'의 노동에 목이 쉬었고, 소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냈습니다.

그때 '돈이란 무엇인가? 인생 산다는 것이 정말 삭막한 광야와 같구나!'라고 절절히 느꼈습니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사 빚 청산하는 일에만 몰두했고, 어느새 그 터널의 끝에 와 있었습니다.

저금리 대출을 받다. 더 많이 벌기 위해.
▲ 담보대출! 저금리 대출을 받다. 더 많이 벌기 위해.
ⓒ 김창승

관련사진보기


2006년 회사를 접고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전에 20년간 근무한 회사는 매장 수도 많고 꽤 많이 알려진 패션회사였는데, 그곳에서 전 경영기획, 상품기획, 관리 및 생산 등을 두루 경험했습니다. 이 계통에서는 나름의 '경험자'라 자부했습니다. 회사채권을 정리하면서 교류하게 된 외주 생산업체와 유대관계도 돈독해서, 이제는 직접 패션회사를 운영해보고자 한 것입니다.

"서로 돕자! 사업을 시작하면 도와주겠다!"는 주위의 권유도 많았습니다. 많은 고민 없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자본금은 아파트를 담보로 마련한 3억6천만 원이라는 큰돈이었습니다. 전국의 유명한 장소 수 곳에 매장을 내고 인테리어를 했습니다.

브랜드가 있어야 했으므로, 당시 사업군 정리차원에서 비주력화되어 있던 상표를 5년간 수수료 5% 조건으로 빌려왔습니다. 마치 제 상표인 양 집중 투자를 하였고 광고를 집행했습니다. 이미 알려진 상표이므로 그 효과가 빠를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더 많은 매장, 더 많은 직원, 더 많은 상품을 준비하려 했습니다.

일을 저지르다. 순식간의 일이다.
▲ 투자! 일을 저지르다. 순식간의 일이다.
ⓒ 김창승

관련사진보기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

준비하는 데 기초자금은 다 투입되었고, 운영자금이 새로 필요했습니다. 정도껏, 능력껏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일사천리, 매출확대 정책으로 큰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날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기존 도시형 매장에서 이제는 백화점, 할인점, 인터넷 등으로 유통채널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도시형 매장 외 새로운 유통채널로의 매장확대가 필요했습니다. 다음 달부터 도래하는 이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지인에게 돈을 빌리고 집을 담보로 빚을 더 냈습니다. '벌어서 다 변제하면 되지. 그깟 이자쯤이야' 하는 생각이 항상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직원 월급, 운영비, 세금, 또 물건을 매입해야 하는 것이 우선이었고, 그러다 보면 이자를 낼 수 있는 돈 만큼이 항상 비었습니다.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장사를 한 것입니다.

백만 원대의 이자가 이백만 원, 삼백만 원, 수백만 원으로 가는 것은 잠깐입니다. 이자 변제일이 돌아오면 '불면의 밤'을 보냈고, 변제하지 못한 다음 날부터는 은행 대출 담당자의 독촉 전화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고율의 연체료와 독촉장이 쌓여만 갔습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셈입니다.

열심을 다한 상품생산, 매장증설, 매출실적은 외형상의 성(城)과 다름없었습니다. 번 돈은 고율의 매장수수료, 상표사용수수료, 생산원가, 직원급료 등의 관리비로 우선 썼고 영업이익은 늘 적자였습니다. 게다가 대형매장의 할인요구, 수수료 인상 요구, 가격동결 요구, 매장이동 요구 등의 횡포 때문에 계획한 대로 경영하는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이자! 항상 이자만큼 모자랐다.
▲ 지출-지급명세서 이자! 항상 이자만큼 모자랐다.
ⓒ 김창승

관련사진보기


'하면 할수록 더 깨진다!' 더 갈 수가 없다는 판단이 앞섰습니다. 아직은 담보 가치가 있는 집을 팔아야만 할 상황! 발을 빼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넘어진 자 덮치게 되는 법, 부동산 투기를 근절한다는 '1가구 1주택자 3년 거주 2년 보유' 조건이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 기간 내에 매도하면 양도세로 매도잉여금의 60%를 내야 하는 상황. 남는 것은 이자 납입액도 안 되는 돈입니다.

그 기간을 또 빚을 내가며 견디어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허무했습니다. 집을 살 사람도, 구경하러 오는 이도 없는 시대가 온 겁니다. 집을 팔아 원리금을 상환하면 남는 게 없게 된 진퇴양난의 지경. 할 수 있는 건 새벽기도! 눈물로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부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 구세주가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강남의 복부인과 투기세력을 잡는다는 '전쟁'에 어찌 집 한 채 가진 죄밖에 없는 서민들이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인가! '부동산 불패', '중대형 선호', '저금리 지속'이란 구호를 너무 순진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근로소득 이상의 돈을 벌어보자!'는 희망의 풍선이 아무런 대책 없이 공중에서 곪아터진 겁니다.

부동산만이 구세주였다.
▲ 부동산 부동산만이 구세주였다.
ⓒ 김창승

관련사진보기


빚진 사람은 누릴 수 있는 평화가 없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집을 팔았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습니다. 가격은 이미 폭락해 있었습니다. 그 가격으로 사준 것만도 고마운 일입니다. 대출원금을 변제하고 그동안 이자로 부은 돈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전셋집으로 옮겼습니다. 죽어라 일했지만 결국은 배부른 은행의 종 노릇만 한 셈입니다.

5년간 회사 빚을 정리하고, 또 5년간 스스로 자처한 빚을 갚았습니다. 파산의 잔해는 많았습니다. 세무서의 부가세, 구청의 인허가세는 아직도 살아남아 날아듭니다. 머리가 곧추 섭니다. 그리고 말라버린 영혼! 빚을 진 자는 누릴 수 있는 평화가 없습니다. 가족이 집단 우울증에 걸립니다. 말이 없어집니다. 따로 자고 따로 한숨을 쉬고 살게 됩니다. 마음의 교류가 없는 이유로 사람들과의 관계도 서먹해집니다. '재미있는 일'이 없습니다.

팔아치운 아파트. 자꾸 눈이 간다.
▲ 아파트 팔아치운 아파트. 자꾸 눈이 간다.
ⓒ 김창승

관련사진보기


사업상의 이유든, 더 큰 집을 갖고자 한 이유든, 아니면 내 집 한 채라도 소유하려는 이유든 빚을 내서 뭘 해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은 불편해도, 가진 게 적음이 때론 평화로운 것임을 만시지탄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거울을 보고 그 속에 서 있는 한 사내에게 놀랍니다. 누구시죠? 저의 껍데기입니다. 너무 생각과는 다른 위인이 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주는 평안함이 아닌,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의 얼굴입니다.

그렇게 사업을 다 정리하고 지금은 다른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돈 놓고 돈 먹는 경쟁의 시대,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사랑만이, 솔직한 본성만이 어둠을 물리치는 촛불 같은 힘입니다. 벽돌을 쌓듯 하나하나 욕심을 버리고 오늘 하루의 일상에 감사하는 것, 지금까지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서 있습니다. 아침 출근길에도, 저녁 퇴근길에도 그때 팔아치운 집을 바라보면서.


태그:#대출, #저금리, #주택담보, #이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지리산 아래, 섬진강가 용정마을로 귀농(2014)하여 몇 통의 꿀통, 몇 고랑의 밭을 일구며 산골사람들 애기를 전하고 있는 농부 시인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