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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비물회
 냄비물회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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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 어달리에서 냄비물회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어제 저녁식사도 물회였다. 두 끼를 연속 물회를 먹었다면 물회를 무척이나 좋아하는구나, 하겠지만 이렇게 먹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동해를 따라 걷다보니 만나는 게 해수욕장이요, 해변이다. 이런 곳에 있는 식당들은 대부분 횟집이고. 횟집에 혼자 들어가서 먹을 만한 메뉴는 그리 많지 않다. 기껏해야 회덮밥이나 물회 정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두 끼를 계속 물회를 먹었다는 고백이다.

어제(5월 13일) 저녁은 망상해수욕장에 있는 횟집에서, 오늘은 어달리 있는 횟집에서 물회를 먹었더니 속이 따갑다 못해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린다. 물회는 어달리에서 드시라. 냄비물회를 전문으로 하는 집이 있는데, 괜찮다. 내가 그 집 첫 손님이었는데 식사를 하는 동안 손님들이 쉬지 않고 들어왔다. 나만 1층에 자리를 잡았고, 나머지 손님들은 죄다 2층으로 올라갔는데 이들이 주문하는 메뉴는 몽땅 물회였다. 내가 식사를 하는 동안 이 식당의 2층 계단을 올라간 손님들은 20명이 넘었다.

손님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이 집, 제법 장사가 잘 되는구나, 했다. TV에도 맛집으로 소개되었다는 사진이 1층 식당의 벽면에 붙어 있기는 했다. 그걸 보면서 맛집으로 소개된 식당 가운데 진짜 맛집이 없던데,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이름이 알려진 덕분에 찾는 사람들은 많은데 정작 맛은 없는 그런 식당이 오죽 많은가. 하지만 이 식당의 냄비물회는 맛이 괜찮았다. 추천할 만하다.

물회에 삶은 소면 한 덩어리와 떡 한 개가 곁들여졌는데, 떡은 매운 물회를 먹고 난 뒤 매운맛을 가시게 하는 입가심용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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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망상해수욕장에 있는 모텔에서 잤다. 이 모텔, 숙박하는 손님이 하나도 없어서 못 재워주겠다는 것을 사정해서 투숙했다. 잠시 들러 쉬었다(?) 가는 손님들만 온다는 얘기였다. 마땅히 잘 곳이 있나, 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녀보니 죄다 민박이거나 펜션이었는데 숙박손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망상해수욕장에서 나와 큰 길 앞에서 본 직사각형 콘크리트 건물인 민박집은 불 켜진 창이 하나도 없었다. 만일 그 집으로 간다면 유일한 숙박 손님이 된다는 얘긴데,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거절한 모텔로 다시 돌아가 재워달라고 사정했다. 참내, 여행을 많이 다녔어도 모텔에서 재워달라고 사정하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에 거절할 때와 달리 쥔아줌마로 보이는 여자는 이번에는 순순히 방 열쇠를 내주었다.

그 밤, 바람이 어찌나 무섭게 불던지 불을 끈 상태에서 여러 번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바닷가 해송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진저리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친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창을 열 때마다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들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바람이 거칠게 부는 것이지?

대체 바람은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해송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바람을 보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가기에 저토록 무섭게 나무를 흔들어대고 가느냔 말이다. 바람 덕분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모텔 방 침대에 누워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수시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늦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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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를 거른 채 느지막이 모텔을 출발했다. 망상해수욕장 길 건너편에는 고래화석박물관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면서 잠시 망설였다. 들어가서 구경을 할까 말까. 살아 있는 고래를 만나는 것이라면 몰라도 죽은 고래의 뼈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나가는데 현수막이 보였다. 밍크고래고기를 파는 음식점을 홍보하는 현수막이었다. 하필이면 고래화석박물관 앞에 고래 고기 음식점 홍보 현수막을 건 건 박물관을 찾는 관광객들 때문이겠지만 거슬린다. 이런 현수막은 불법이 분명한데, 왜 동해시는 그냥 놔두는 것일까?

여름 한 철에만 문을 여는 망상역 주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성였다. 역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어젯밤 불던 바람이 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머리가 긴 젊은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역에서 내려 물을 마시면서 숨을 돌리는 것을 보았다.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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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에서 묵호까지 가는 해변도로는 바다를 끼고 이어진다. 노봉해변까지는 7번국도가 이어지지만, 그 이후는 해안도로로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걸었다. 햇볕은 점점 뜨거워지고, 바람은 점점 잦아들었다. 이 길, 쉬기 좋게 군데군데 의자들이 놓여 있다.

이상하다. 요즘 들어 걸으면 발에 물집이 생긴다. 그것도 지금까지 물집이 거의 생기지 않던 부위에. 발바닥에 모래가 박힌 것 같은 느낌에 쉼터를 찾아들어 신발과 양말을 벗고 오른발 바닥을 들여다봤더니 이런, 물집이 생겼다. 고작 하루밖에 걷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 싶었지만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양말을 벗은 김에 오래 쉬자, 했다.

그리고 어달리에 도착해서 늦은 아침 겸 이른 점심을 먹었던 것이다. 식사를 한 뒤, 간 곳은 묵호 등대. 등대로 가는 계단에 이곳에서 드라마 <위대한 유산>을 찍었다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어딜 가나 조금 이름이 났다 싶은 곳에는 어김없이 영화 촬영지나 드라마 촬영지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풍광이 아름다우니, 볼거리가 많으니 드라마나 영화를 찍는 것이겠지만, 그런 표지판이 풍광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묵호등대
 묵호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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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달리 등대가는 길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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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달리 벽화
 어달리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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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 등대로 가는 길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구름다리도 있고, 산책로도 있다.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푸른 동해가 눈보다 가슴에 먼저 와 안긴다. 참 푸르다.

묵호등대는 공원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묵호등대가 처음 세워진 것은 1963년 6월 8일. 등대 안으로 들어가니 묵호항을 비롯해 푸른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올라갔던 길이 아닌 반대편으로 내려가려니, 구불거리는 골목길 이름이 '등대오름길'이란다. 그 길, 어느 집 담벼락에는 시가 씌어 있고, 어느 집 벽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 서두르지 말고 그림을 보고, 시를 읽으면서 쉬엄쉬엄 걸으라는 뜻이렷다.

묵호항으로 가기 전,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기에 멈췄다. 묵호등대에 올라 먼 바다를 오래 바라보고 내려온 뒤지만, 가만히 앉아서 바다를 음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쉼터 의자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건네면서 할아버지를 마주보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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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할아버지 손이었다. 손톱 끝에는 검은 때가 잔뜩 끼어 있었다. 검게 타고 힘줄이 불거진 채 손가락 끝이 갈라진 손을 보고 있노라니 그 할아버지의 지난 세월이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한평생은 거친 노동으로 점철되었으리라. 할아버지는 당신의 집이 등대오름길 어느 언저리라면서 손을 들어 가리켰지만, 나는 그 많은 집 중에 어느 것인지 확실히 알아내지 못했다. 하긴 어느 집이면 어떠랴. 그래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배낭에서 걷다가 마시려고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서 찔러 넣은 커피 한 병을 꺼냈다.

"할아버지, 커피 드실래요?"

할아버지는 무뚝뚝한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갑자기 미소를 띠었다. 할아버지는 커피 병뚜껑을 단숨에 따서는 무슨 드링크제 마시듯이 벌컥벌컥 마신다. 순식간에 병이 비었다.

나는 신발과 양말을 벗은 채 그 자리에 오래 앉아서 바다를 보고 또 보았다. 어차피 바다를 따라 걷는 길이건만, 그래도 걸으면서 바다를 보는 것보다 이렇게 앉아서 바다를 보는 게 더 여유롭고 좋았다.

추암촛대바위
 추암촛대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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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호항을 지나 해안 길을 따라 걸어 내가 찾아간 곳은 추암해변이었다. 촛대바위가 유명한 곳. 동해항을 지나 추암해변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항구를 낀 공업단지였기에 걷는 사람은커녕 차량조차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구획정리가 잘되어 있어 도로가 곧게 뻗어 있었지만, 인도는 풀이 우거져 있어 평소에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이 길에 인도는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일삼아 걷는다면 모를까, 건물도 거의 없고, 노선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길을 누가 걸을까.

한 시간쯤 그런 길을 걸으려니 환한 대낮인데도 어째 기분이 으스스해진다. 인도의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무성하게 자란 풀이 자꾸만 신경에 거슬린다. 차라리 산속이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외진 길이 더 위험한 건데, 대체 추암 해변은 얼마나 걸어야 나오는 거지?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런 길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정말 무섭겠다, 싶어진다. 그렇다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걸어왔다. 중단 없는 전진, 만이 필요하다. 속도를 내고 싶었지만, 하루 온 종일 걸은 터라 지쳤다. 발도 아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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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해변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 두어 시간은 족히 인적 없는 길을 걸었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추암해변을 찾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단체관광을 온 듯 해변으로 들어가는 입구 주차장에 버스들이 몇 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오늘밤, 잘까?

하지만 나는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추암해변의 촛대바위를 구경하고, 바다열차가 오간다는 추암역에 올라가 끝없이 펼쳐진 철로를 보았고,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바다를 또 보고 돌아 나왔다.

그래, 오늘 밤은 삼척에서 자는 거야. 다시 지루하게 이어지는 길을,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걸어 삼척으로 갔다. 삼척해변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마땅한 숙소를 물색할 작정이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발바닥의 물집이 점점 더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가 한 알 박힌 것 같던 느낌이 이제는 여러 알이 한꺼번에 박힌 듯 아파왔다.

바다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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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으로 가는 길 대신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땀에 젖은 양말을 벗고 발바닥을 들여다보다가 버스를 타고 삼척시내로 들어가기로 했다. 해질녘이라서 그런지 사위는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버스는 오래 기다리지 않아 왔고, 나는 삼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서 내렸다.

이날 밤, 나는 삼척고속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모텔에서 묵었다. 다음날 동해를 따라 하루 더 걸을 예정이었지만, 발이 너무 아파 그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대신 삼척에서 강릉까지 운행하는 바다열차를 탈 생각으로 삼척역에 갔다가 허탕을 쳤다(물론 걸어서 갔다. 아픈 발을 살살 달래가면서). 주말이라 표가 이미 다 팔려나간 뒤였던 것이다. 남은 좌석은 커플용밖에 없었는데 혼자 타기에는 값이 너무 비싸 포기했다. 1만5000원짜리 기차를 5만 원이나 주고 커플용 좌석에 혼자 탈 필요는 없어서 그랬는데, 그거라도 탈 걸 그랬나?

삼척역
 삼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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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역에서 아픈 발을 이끌고 다시 삼척시내로 걸어가 점심식사를 하고, 서울행 고속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심곡항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와 마주쳤다. 여자는 고관절이 아파 고성까지 가지 못했고, 나는 발 때문에 하루 일찍 서울로 돌아간다. 발이 아프지 않아 내가 예정대로 동해를 따라 걸었다면 여자를 만나지 못했으리라. 인연이란 예측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삼척지도를 들여다보면서 다음에는 동해에서 38번 국도를 따라 태백까지 걸어야겠다, 는 생각을 했다.

[정동진 - 삼척여행 ①] 길위에서 만난 여자... 그 특별한 인연
[정동진 - 삼척여행 ②] 옥계역 입구에서 외할머니를 추억하다


태그:#도보여행, #강원도, #동해, #삼척, #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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