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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등에 업혀서 들었던 아버지의 창 소리가 7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혀."

소리꾼 김종옥 선생(72세)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상이 나면 소리해주는 소리꾼이었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그는 아버지의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흥얼대는 습관이 생겼다. 소위 '어깨 너머 배운' 소리꾼인 셈이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물려받아서인지 주위 사람들은 그의 소리 듣기를 즐겨했다.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에게 소리를 들려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그에게 소리는 취미이자 특기였다.

마을에 있는 뒷동산에서 김종옥 선생이 소리를 하고 있다. 칠순의 나이에도 요즘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하루가 늘 바쁘다.
▲ 김종옥 마을에 있는 뒷동산에서 김종옥 선생이 소리를 하고 있다. 칠순의 나이에도 요즘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하루가 늘 바쁘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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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깊이는 가시밭길 인생에서 건진 것

1945년은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지만, 그에겐 남다르다. 바로 그의 양친이 그해에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남들은 환호하는 광복절인데 그에겐 가시밭길 인생의 서막이었다.

졸지에 조실부모한 그는 외가에 맡겨졌다. 거기서 외조부모님을 도우며 갖은 고생을 했다. 외갓집 생활 8년이 지난 뒤 그는 친누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거기서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 3학년부터 다녔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6학년 올라갈 무렵 듣지 말아야할 이야기를 매형으로부터 들었다.

"니 동생 때문에 내가 못산다 못 살아."

누나를 구박하던 매형의 말은 그의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너무나 서러워 눈물을 쏟아냈다. 그는 자신이 없어지는 게 누나의 짐을 덜어주는 거라 생각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 후 현대판 머슴살이, 제분소, 막노동, 목수 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만 했다.

소리꾼의 피가 인생전환점 만들어

드디어 평소 좋아하던 국악을 제대로 배워보자며 문을 두드렸다. 82년도에 조대진 선생으로부터 경기민요를 전수받았다. 가난해서 못하던 꿈을 이루었다.

83년도엔 그의 회갑연 데뷔전이 있었다. 우연히 초대받은 회갑연에서 주위의 권유로 부른 소리가 청중을 열광시켰던 것. 그 후 거기에 소리꾼으로 온 여성들과 함께 회갑잔치 팀을 결성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이벤트 회사다. 바야흐로 목수 일을 접고 소리꾼으로 전향하는 인생전환점이었다.

지금은 86년도에 회갑잔치팀과 공연 중이다. 바쁠 땐 하루 3~4회 행사를 뛰었단다.
▲ 공연 지금은 86년도에 회갑잔치팀과 공연 중이다. 바쁠 땐 하루 3~4회 행사를 뛰었단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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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가 거둔 성적은 84년 KBS민요 백일장 주 장원, 85년 그랜드호텔 회갑연, 85년 사북탄광 공연, 88년 안성에서 이벤트 회사 다시 결성, 수많은 경로잔치 등이다. 잘 나갈 땐 하루 3~4건이었다. 흡사 잘나가는 연예인이 하루 몇 탕씩 행사 뛰듯.

그러다가 또 다른 변화가 찾아왔다. 90년도 대한항공 조중현 회장 장례식 때 소리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초상집에 불려 다니는 소리꾼이 된 것이다. 2004년 무형문화재 새남굿 보유자 김유감 선생의 장례식에서 소리를 한 것은 두고두고 자랑거리다. 

이제 그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함께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떤 경우엔 회갑연을 해준 사람의 장례식에 불려가기도 했다. 사람들의 애환을 소리로 풀어내는 소리꾼이 되었다. 사람들을 울렸다 웃겼다하는 이 시대의 피에로가 되었다.

칠순에도 바쁜 이유 있었네

매장문화에서 화장 문화로 많이 바뀐 요즘, 이런 계통에 일하는 사람들 모두 파리 날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는 예외다. 체력이 딸려 이제 그만두고 싶어도 주위에서 자꾸 부르니 그럴 수도 없다.

그는 소위 전국구다. 그동안 정읍, 전곡, 진천, 김천, 여주, 이천, 용인 등에 불려 다녔다. 지금도 입소문으로 인해 전국으로 불려 다닌다.

사실 시골마을마다 소리꾼이 있긴 하지만, 그가 한번 떴다 하면 마을에 들어오는 금액이 다르단다. 소리꾼이 소리를 하면 행여 줄과 북에 꽂히는 돈은 모두 마을 돈이 된다. 그 금액이 마을 소리꾼보다 확연히 많다는 것. 그러니 마을에서 그를 초청하고자 할 수밖에. 요즘도 1년에 200일 정도는 불려 다닌단다.  

지금은 상여가 나가고 김종옥 선생이 소리를 하고 있다.
▲ 상여 소리 지금은 상여가 나가고 김종옥 선생이 소리를 하고 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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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에게도 아직 꿈은 있다. '소리꾼 김종옥'을 넘어 '무형문화재 김종옥'이 되는 것이란다. 2008년도에 무형문화재를 신청했다 낙방했던 아쉬움이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꿈이 있으니 바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16일 김종옥 선생의 자택(안성시 가사동)에서 이루어졌다.



태그:#소리꾼 김종옥, #소리꾼, #안성, #회갑연, #행여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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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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