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멘> 메인 포스터

영화 <아멘> 메인 포스터 ⓒ 영화 <아멘>

코스타 가브라스. <매드시티>와 같이 가볍지만 진지한 영화,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처럼 웃기지만 심각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리스 태생의 프랑스 감독입니다. 전자는 시청률 지상주의에 사로잡힌 언론의 문제점을, 후자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해고라는 것이 한 가장의 삶을, 그리고 가장이 부양해야 하는 가족의 삶을 어떻게 개조시키는지를 탁월하게 포착합니다.

<제트> <의문의 실종> 등에서는 정치적 메세지를 굳이 에둘러 접근하지 않는 과감성 때문에 '정치영화의 거장'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답니다.

영화 <아멘>은 '게르슈타인 보고서'의 주인공 쿠르드 게르슈타인(1905~1945)의 실제 이야기에 약간의 영화적 상상력을 입힌 것입니다.

나치 친위대의 '화학장교'쯤되는 게르슈타인은 본인이 개발한 소독제가 홀로코스트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을 알게된 후, 이를 가톨릭교회에 알려 어떻게든 학살을 막고자 했지만, 가톨릭 특유의 '인내' 어쩌고 하는 외교술에 속은 터져나간다 것이 주 내용입니다. 원작은 독일 연극 <신의 대리인>(1964)입니다.

교황 '비오 12세'에 대한 상반된 평가

영화에서는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12세를 (외모조차도 유사하게) 잘 그려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가톨릭 안에서는 비오 12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름 선방했다고 평가합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기 전부터 교황은 이를 막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히틀러의 미친 짓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나름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경고를 계속했다는것을 그 증거로 주로 제시합니다(영화에서는 이 성명서에 유태인, 수용소 등의 '정확한 지칭'이 없어서 주인공들이 속터져 하는데, 교회에서는 '의미가 숨어져 있었다'는 식으로 평가합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는 꽤나 실질적인 업적도 있습니다. 로마가 폭격을 당했을 때는 나름 현장을 진두지휘했고 독일군이 퇴각할 때 로마를 박살내지 않도록 중요한 설득을 한 인물이 바로 비오 12세입니다.

바티칸과 로마의 곳곳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보호했으며 그게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몇십만'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또 돈으로 나치와 직접 거래를 해서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일화도 꽤나 유명합니다. 히틀러가 비오 12세 납치작전을 두 번이나 기획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저항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황의 노력도 예술가들이 '교회가 나치에 동조했다'고 이해하는 거시적 맥락을 부인시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만큼 영화는 '일방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유태인 외면을 언급합니다. 가톨릭이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라는 모호한 말들만 하고, '나도 아파하고 있다'는 이상한 논리로 접근할 때, 유럽에서는 매일 수만 명이 동부로 가는 기차를 타고 수용소로 보내졌고 가스실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그런 상황에서도 활약한' 교황의 행보를 언급하더라도 감독의 눈에는  '그렇게밖에 활약하지 못했기에' 죽게된 죄없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을 교회가 더 크게 느껴야 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교황이 <쉰들러리스트>의 쉰들러와 같은 급이었다면 충분히 '노력한 바'가 인정될 수 있겠지만 어떻게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쉰들러 수준에서 평가받을 수 있겠습니까? 

실재와 당위, 교회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게르슈타인과 바티칸 사이의 연결을 위해 노력했던 베를린 교황청 대사의 비서인 '리카르도' 신부는 바티칸 백작인 그의 아버지로부터 "실재와 당위 중에 선택해야 할 것이 있으면 우리는 실재를 따라야 한다!"는 충고를 듣습니다. 그 말은 뭐, "현실을 직시하라!" 정도가 될 듯합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영화가 교회에 던지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무서운' 히틀러라는 실재 앞에 주눅이 들어 '스탈린이라는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나치'라는 이상한 '당위'를 만들어냅니다.

당위가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만들어진 것이니 교회가 할 수 있는 건 '나치와의 맞짱'(교회정신에 비춰보면 이것이 '당위'인 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이 아니라, 나치즘으로부터 파생된 문제점을 그저 '약간' 지적하고 그 피해자들을 좀 도와주는 '자선사업'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나치에게 유일에게 쓴소리 할 수 있는 거대한 권력이 '당위'를 포기하니, '실재'에서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을 막을 도리가 없었겠죠?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 안에서 '비오 12세는 나름 유태인을 구했다'고 평가하는 지점은 바닷물 한 바가지 떠다놓고 '밀려드는 바닷물을 막았다'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한국의 가톨릭은 '당위'를 제대로 주장하고 있는가?

물론 그 맥락을 '당시로' 국한시키면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느니 등의)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매력은 사실의 확인이 아니라 의미의 확장 아닐까요? 저는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이 과연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가톨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 보여주었던 교회의 '당위'에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그 매료된 이유가 언젠가부터 무척 희석되었죠. 이는 가장 주된 '신자들이 성당에 등 돌리는 이유'인데, 제가 보니까 교회 관계자들은 아무도 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당에 오는 사람'하고만 대화를 하니까요. 오지 않은 사람이 왜 안 오는지를 알 턱이 없습니다).

교회는 나름 반론을 할 것입니다. 용산참사에도, 각종 철거민들의 아픔에도, 4대강을 반대할 때도, 강정 해군기지 건설현장에도 '가톨릭'은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건 '당위'를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 '본부'(?)의 속터진 행보 속에 몇 명의 성직자들이 내부적으로 온갖 욕 다 먹어가면 선택하는 '현실'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 정신이 '아닌 것'에 제발 '그리스도 정신'으로 무장해서 맞장 쫌 뜨셨으면 합니다. 10년 전 강론, 재탕, 삼탕 좀 그만 하시구요. 저 다시 성당에 나가고 싶다니까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och7896)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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