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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빵의 주인아저씨
 왔다빵의 주인아저씨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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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한 10년 전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던 중학생 시절에 최고의 간식은 학교 앞에 있던 '왔다빵'이라는 작은 가게에서 파는 도넛이었다. 그 도넛은 흔히 시골 제과점에서 파는 도넛으로 갈색이 될 때까지 튀긴 도넛이었다. 도넛의 종류도 단 두 가지, 팥이 들어간 둥근 도넛과 그냥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길쭉한 도넛이었다. 도넛이 단순해서인지 도넛 만드는 것도 참 쉬워 보였다.

도넛이 될 반죽도 설렁설렁, 튀기는 것도 설렁설렁, 하다못해 주문한 이후 도넛에 뿌려주는 설탕도 설렁설렁 뿌렸다. 그렇게 설렁설렁 만든 도넛은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동안 최고의 간식이었다. 사랑에 빠져서 고민하던 순간에도, 성적 때문에 고민하던 순간에도, 도넛은 자그마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아무리 힘든 고민을 하던 순간에도 쫄깃하던 도넛을 설탕에 찍어서 한입 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다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왔다빵의 외관
▲ 왔다빵 왔다빵의 외관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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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수년 후, 나는 대학생이 되어서 고향마을을 떠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생각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20살 동안 알아왔던 가장 큰 건물은 4층짜리 건물이고, 영화관을 가려면 1시간을 버스 타고 가야 하는 시골이었기에 영화 보러 가자고 하는 것이 사귀자는 표현이었던 시골 촌놈이었다.

하지만 그 낯섦의 가장 정점은 도넛이었다. 서울의 도넛은 내가 알던 그 도넛이 아니었다. 갈색이 될 때까지 튀겨진 도넛 대신 미국드라마에서나 나옴 직한 화려하고 먹음직한 도넛이었다. 파는 곳도 도넛만 파는 도넛전문점으로 외관이 그야말로 으리으리했다. 도넛들도 수십 종류의 이름이 있었다. 그것도 유식한 서울 도넛이라 그런지 영어로 지어진 이름이었다. 안에 들어 있던 것도 팥이 아니라 다양한 크림이었다.

처음에 도넛을 보았을 때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다. 시골에서 팔던 도넛도 그렇게 맛있었는데, 서울에서 파는 이렇게 예쁘고 영어 이름도 있는 도넛은 얼마나 맛있느냐는 기대감에 지갑에 있던 돈을 탈탈 털어서 도넛을 왕창 샀었다. 도넛을 사는 순간만큼은 정말 행복했다. 처음으로 시골에서 서울로 온 게 잘한 것 같았다. 맛있는 음식을 사서 집으로 가는 순간이 인생에서 소소하나마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인 것 같다. 그 도넛을 들고 4평 남짓한 허름한 고시원에 갔다. 허름하지만 가격은 허름하지 않은 고시원이었다.

그리고 수도사가 도를 구하는 심정으로 도넛을 한입 베어 물었다. 첫인상은 달콤함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느낌도 달콤함, 그리고 세 번째도 달콤함, 오로지 달콤함만이 있었다. '왔다빵' 도넛은 달지 않았다. 도넛 위에 설탕을 직접 듬뿍 뿌려주는데도 서울 도넛의 단맛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은은한 단맛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겉면이 바삭함과 밀가루의 고소함 그리고 기름에서 느끼어지는 감칠맛은 다양한 맛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울 도넛은 달기만 했다. 아니 거기에 '왔다빵'의 기름기가 묻어나는 맛이 감칠 맛 이었다면 서울 도넛은 느끼하기만 했다. 수북이 사 온 도넛 한 개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멍하니 고시원 벽을 바라보았다. 창문도 없는 고시원 벽을 보다 보니 정말 서울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 참 많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 이후로도 많은 도넛을 접할 수 있었다. 거대한 기계에서 만들어지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도넛도 있었다. 도넛의 진한 단맛과 부드러운 촉감은 인상적이었지만 너무 단순한 단맛만 가지고 있었다. 또 일본에서 넘어와 일본장인들이 만든다는 도넛도 있었다. '왔다빵'의 도넛처럼 차진 느낌은 있었지만, 특유의 감칠맛은 없었다. 점점 도넛이라는 게 있으면 먹지만 구태여 찾아 먹지 않는 그저 그런 음식으로 생각 될 무렵 나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내려왔다.

고향으로 내려와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왔다빵'이었다. 계속 그리워했던 도넛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 반과 사실 추억 때문에 미화되어서 맛있게 느끼어진 게 아닌가라는 두려움 반을 가지고 '왔다빵'을 향해서 갔다. '왔다빵'은 학교 앞에서 근처 도로변으로 이전했지만 그 외관 그 이름 그대로 서 있었다.

'왔다빵'의 내부는 여전히 단출했다. 하지만 허름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았다. 주인아저씨의 성품을 닮은 듯한 가게는 세월을 먹었지만 깨끗하고 정감 있는 모습 그대로 있었다. 서울에서 겉만 화려하고 위생에는 문제가 많았던 그런 가게들과 정반대의 모습이 참으로 반가웠다. 아저씨를 닮은 그 가게에서 주인아저씨는 수십 년의 세월을 그러했던 것처럼 반죽을 빚고 있었다.

옛날의 그 모습처럼 설렁설렁 반죽하는 그 모습에서 달인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TV에 나오는 달인들도 범인들은 생각도 못할 기예들을 설렁설렁 해버리지 않던가. 중학생 시절 그러했던 것처럼 2천 원 치 도넛을 샀다. 2천 원 치가 아니라 2만 원 치 같은 양을 담고 아저씨는 설렁설렁 설탕을 뿌려주었다. '건강하시라'고 한마디 덕담을 드리고 집에 오는 길에 도넛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열된 도넛
 진열된 도넛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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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넛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그저 갈색에 까무잡잡한 모습이 이상하게 먹음직스러웠다. 그리고 도넛을 한입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지만, 찰기가 있었다. 기름기가 남아있는 도넛은 느끼함이 아니라 감칠맛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이 도넛은 대한민국 최고의 도넛이라고 확신했다. 뿌려진 설탕의 은은한 단맛을 즐기면서 인생의 고민이 다 해결되는 느낌을 받았다. '참, 사람이란 단순하지만 멋있구나, 겨우 맛있는 음식 하나에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TV에도 나오지 않았고 SNS에서도 여전히 무명이며 심지어 블로그에 글 하나 제대로 없는 '왔다빵'이지만 나는 누가 물어보면 '왔다빵'을 최고의 도넛을 만드는 곳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경상남도 창녕군에 대한민국 최고의 도넛이 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 도넛이 있다.


태그:#도넛, #맛집,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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