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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리 장안 마을에서 보은 취회가 열렸다.

보은 취회지 안내판
 보은 취회지 안내판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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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 마을은 하개교에서 삼가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나온다. 초입에 장안마을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내용을 보니 절반이 동학이야기다. 보습산(犂山)과 옥녀봉 아래 만세동천 굽어 흐르는 어진 백성의 마을에 19세기 말 국운을 좌우하는 큰 소용돌이가 들이닥쳤다.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치며 장안마을로 모여들었다.

1893년 3월 11일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이 보낸 통유문을 보면, 그들의 목적이 도를 지키고 나라를 바로 잡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교조신원, 보국안민, 척왜양창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씨 척족세력 축출, 세제개혁, 경제개혁과 같은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달한 대표의 안내
 박달한 대표의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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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은 장내리 동학 취회지 안내판이 붙어 있는 곳으로 가서, '삶결두레 아사달' 박달한 대표의 설명을 듣는다. 그는 개량한복에 고무신을 신었다. 말이 유창하지도 않다. 전문성을 띤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는 진실함이 묻어 있다. 오로지 마음 하나만으로 동향혁명에 참여했던 민초들처럼.

"보은 동학순례길은 볼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장엄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길이고 역사가 서려 있는 길입니다. 동학에 참가한 민초들의 눈물과 웃음 그리고 피가 서려있는 길입니다. 150년 전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나쁜 병이 가득하여 백성들이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다(我國惡疾萬世 民無四時之安).' 수운선생이 얘기한 후천개벽을 생각할 때입니다."

보은 취회지
 보은 취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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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를 옥녀봉 아래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돌로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옛날에는 대도소로 쓰이던 큰 기와집이 있었다고 한다. 동학도들은 낮에는 이곳 성터에서 집회를 갖고, 밤에는 인근 마을에서 잠을 자면서 사회개혁과 경제개혁을 외쳤다. 장승에 새겨진 한 마디가 이들 동학도의 뜻을 대변한다. '사람이 하늘이니 서로 섬기세.'

장안과 장내라는 마을 이름의 연원

1893년 황해도 접주의 자격으로 장안집회에 참석했던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장안면 장내리
 장안면 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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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1893) 가을에 황해도 접주 15명이 육로와 수로를 통해 보은군 장안이라는 동네에 도착하였다. 그 동네의 이집 저집 이 구석 저 구석에서는 21자 주문 외는 소리가 들렸다. 동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떼지어 나가고, 다른 쪽에서는 떼지어 들어와 집집마다 사람이 가득가득하였다."

이를 통해 동학혁명에서 장안마을이 차지하는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장안 마을에는 적게는 2만 명, 많게는 8만 명이 모여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 떼지어 외웠던 21자 주문이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지극한 기운이 여기 이르렀으니, 크게 내려주십시오. 천주님을 모시고 조화롭게 살면서, 평생 잊지 않고 모든 일을 알아 가겠습니다'라고 번역하면 되겠다.

장안마을 자랑비
 장안마을 자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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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장안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해 보았지만 정설은 없다. 그리고 그 내용도 논리적으로 부족한 면이 많다. 그 중 하나가 풍수지리적으로 장막에 둘러싸인 것처럼 편안하다고 해서 장안(帳安)이 되었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장이 서던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장안이 되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장안은 옛날 속리산으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로 큰 장이 섰다. 장터는 현재의 장내2리 쪽에 형성되었을 것 같다. 이곳으로 삼가천이 휘감아 돌며 넓은 대지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 산 쪽으로 토박이들이 살아 장안이라고 불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들은 이곳을 장안이라고 말하지만 장내(場內)라고도 한다. 여기서 장내는 장안의 한자식 표기이다. 그런데 현재 장안은 오래도록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장안(長安)으로 표기된다. 

1893년 장안집회의 재구성

구병산 끝자락의 장내리
 구병산 끝자락의 장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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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 3월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상주와 보은 그리고 옥천을 근거지로 동학교도를 이끌고 있었다. 상주 왕실촌, 보은 장내리, 옥천 청산의 문바우가 그곳이다. 이 중 장내리에는 대도소가 설치되어 동학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장내리의 원 이름은 장안이다. 당시 동학교도들은 '서울 장안이 장안이냐 보은 장안이 장안이다'라고 노래 불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모인 동학도들은 새로운 시대의 수도로 이곳 장안을 생각할 정도였다. 장안에 동학교도가 모인 것은 3월 11일이다. 전날인 3월 10일 해월 최시형 등 동학 지도부는 동학 창도주 수운 최제우 기일을 맞아 전국에 통문을 보낸다. 3월 11일 보은 장내리에 모여 교조신원과 보국안민 운동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장내리 보은 취회라고 부른다.

3일 16일에는 2차 통문을 보내는데 그 내용은 좀 더 급진적이다.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하자는 척왜양창의가 들어간 것이다. 왜적을 해와 달을 같이할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표현하고 있다. 당황한 정부는 3월 25일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에 임명, 사태를 진정시키도록 한다. 처음에는 왕의 교지를 선포하여 동학도를 해산시키려고 했다.

해월 최시형
 해월 최시형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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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이 해산하지 않자 4월 1일 보은 장내리에 도착, 동학교도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3월 30일에는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 군대 600명이 이미 청주에 도착해 있었다. 정부군과 동학군의 충돌로 인한 불상사를 우려한 해월 최시형은 4월 2일 동학군의 해산 명령을 내린다. 결론적으로 보은 취회는 민중의식과 투쟁의식 형성에는 기여했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하나도 얻지 못한 민중운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그게 동학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동학을 이끈 해월 최시형은 1898년 3월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고 6월 2일 교수형에 처해진다. 1898년 5월 22일 대한제국의 법부대신 조병직이 올린 상소를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승정원 일기』에 나오는 이 상소 중 최시형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죄인을 붙잡은 뒤에는 검사(檢事)가 먼저 심사(審査)하여 공초에 따라 문건을 작성한 다음 재판장이 비로소 재결하는 것이 현재의 율례(律例)입니다. 최시형(崔時亨)에게 7, 8차례에 걸쳐 공초를 받았는데, 좌도(左道)로 대중을 현혹시킨 죄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자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입으로 공술(供述)한 그 나머지 도당들은 바로 갑오년 이후로 섬멸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차례 자세히 물어보았으나 아직 마무리 짓지는 못한 상황입니다."

지루하고도 지루한 보은동학길 순례

구인 삼거리
 구인 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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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취회지 장안을 떠나는 동학농민군처럼 우리는 동학군의 최후 전투지 북실 마을로 향한다. 북실로 가려면 구인리, 장재리, 누청리, 강신리를 지나는 옛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산자락으로 이어진 옛길을 따라 구인리에 이른다. 마을 초입의 구인삼거리는 보은읍으로 가는 25번 국도와 말티재로 가는 옛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북실 마을로 가려면 말티재로 가는 옛길로 가야하지만, 중간에 보은읍 길상리에 있는 펀 파크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25번 국도를 따라간다.

사실 그 바람에 길이 더 멀어졌고, 자동차 도로를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더 받게 되었다. 길상리 펀 파크에 이르기 전 오른쪽으로 오창리가 있다. 오창리에는 박영덕씨가 운봉서각을 운영하고 있다. 서각이란 글씨를 나무나 돌에 새기는 기술을 말한다. 오창리를 지나면 길상리가 나온다. 길상리는 사적으로 이번 답사를 이끄는 박연수 탐사대장의 고향이다.

펀 파크
 펀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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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길상리에는 지난 3월 29일 정크아티스트 오대호의 작품을 전시한 '펀 파크'가 문을 열었다. 오대호는 세계적인 수준의 정크아트 작가다. 미국의 정크아트 작가 로버트 라우셴버그가 정크아트의 문을 열었다면, 오대호가 정크아트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계적인 수준이란 주제나 예술기법 모두에 해당한다. 오대호 작가와 그의 예술세계에 대해서는 앞으로 2회 연재할 예정이다.

길상리를 지나 북실 마을에 이르는 길은 지루함의 연속이다. 산 넘고 물 건너는데 지친데다 길까지 너무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고개를 넘고 말티삼거리를 지난다. 그리고 대야리를 왼쪽으로 끼고 누청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다시 종곡초등학교를 지나 강신보건진료소에 이른다. 마을 앞 저 건너편 산에 삼년산성이 보인다. 마을 노인들에게 북실 마을로 가는 길을 물으니 와평을 지나 구불구불 시골길을 더 가야한다고 말해준다.

북실 가는 길
 북실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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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에서도 들을 지나고 고개를 넘으면서 40분을 더 걸었다. 그러자 북산 아래 자리 잡은 종곡리 북실 마을이 나온다. 산골짜기로 저녁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벌써 저녁 7시 20분이다. 아침 6시부터 13시간이 넘게 걸었다. 우리는 북실 전통가옥체험관(마을회관)으로 가 여장을 푼다. 마을회관은 크게 두 개의 건물로 되어있는데, 방이 운동장만큼 넓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태그:#장안리, #보은 취회, #최시형, #펀 파크, #북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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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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