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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오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반기는 자식들 덕분에 피곤함이 싹 가신다. 하지만 이 녀석들, 뒷바라지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월급은 항상 빠듯한데 물가는 오르고 아내의 잔소리는 늘어간다. 늦은 밤 부모의 전화는 반가움 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대 대한민국 보통 남자들의 속마음이다.

40대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다. 직장에서는 두려울 정도로 치고 올라오는 30대 후배들과 50대 임원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친구들 중에는 사업을 해서 잘 나가는 녀석도 더러 있지만 태반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아내와 맞벌이를 하지만 아이들의 교육비는 버겁기만 하다. 그나마도 요즘 학교폭력이 심상치 않던데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녀석의 표정을 살피느라 눈치 보기 일쑤다.

50대는 또 다른 고민에 시름이 깊다. 다행히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다고 해도 언제 팽당할지 하루하루가 노심초사다. 자녀들은 여전히 어학연수다 유학이다 하며 손 벌리는 '다 큰 어린애'다. 결혼이라도 시키는 날에는 그나마 남은 노후자금도 간당간당하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 대출받아 장만한 아파트는 복덩이가 아닌 애물단지가 된 지 오래다.

남편과 아버지,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평생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 시대 남자들은 힘겹다. 하지만 그 누구하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 힘들다. 아니 할 수 없다. 그저 쓴 소주에 한숨을 담아 들이킬 뿐이다. 하지만 이제 가끔씩은 그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 30대부터 50대까지 각자 인생의 우여곡절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 남자 3인이 모였다. 허심탄회한 시간 속에 한숨과 웃음이 뒤섞이며 그들이 털어놓은 남자의 솔직한 마음. 요즘 10대들의 신조어로 '솔·까·말' 식 토크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50대 - 김용전, 작가·방송인·커리어 컨설턴트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절정과 토사구팽 당하는 쓰라림을 모두 경험한 50대 작가 김용전은 인생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절정과 토사구팽 당하는 쓰라림을 모두 경험한 50대 작가 김용전은 인생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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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육 기업의 단칸방 창립 멤버로 시작해 연매출 3천억 대의 대기업을 만들기까지 인생을 바쳤다. 30대 이사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이 쉰에 토사구팽을 당했다. 이후 '회사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아니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얻고 직장이라는 비정한 세계에서 싸우는 후배들을 위한 커리어 컨설턴트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KBS라디오 <성공예감 김방희 입니다>에서 '직장인 성공학' 코너를 4년째 맡고 있다. 다양한 기업에서 행복한 직장인이 되는 법을 강연하고 있으며 등단 시인이자 작가로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간 <직장신공>을 통해 다시 한 번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인생 9단의 프로페셔널.

40대 - 권영찬, 개그맨이자 사업가
개그맨이자 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권영찬이지만 그 역시도 늦게 아들을 얻은 아버지로서 고민이 적지 않은 듯 했다. 최근에는 아들의 첫돌 축의금을 4명의 시각장애우 개안수술비로 기부하는 등 나눔에 대해서도 각별한 뜻을 두고 있다.
 개그맨이자 사업가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권영찬이지만 그 역시도 늦게 아들을 얻은 아버지로서 고민이 적지 않은 듯 했다. 최근에는 아들의 첫돌 축의금을 4명의 시각장애우 개안수술비로 기부하는 등 나눔에 대해서도 각별한 뜻을 두고 있다.
ⓒ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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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KBS 대학개그제로 데뷔 이후 개그맨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남다른 사교성과 신의로 연예계는 물론 다양한 분야에 남다른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권영찬닷컴, 아이다모, 알앤디클럽 등 다양한 사업체의 대표로 활동하며 남다른 수완을 발휘하는 사업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43세인 지난해 어렵사리 득남을 하면서 인생의 또 다른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30대 - 유형민, 전직 로펌 변호사·현재는 공기업을 다니는 직장인
20대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로펌 변호사로 일하다 돌연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한 30대,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20대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로펌 변호사로 일하다 돌연 가족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삶은 무의미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한 30대,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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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으로 손꼽히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20대에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저력을 보였다. 법조인의 길을 가기 위해 로펌을 선택했지만 자신이 꿈꾸던 인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절감한 후 가족과 함께하는 여유로운 인생을 택하며 공기업 직장인으로 진로를 바꾼다. 현재 두 아들의 아빠로 주말에는 온통 육아에 올인하는 가정적인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다.

세대유감(?)의 벽을 허물다

만남은 생각보다 쉽게 이뤄졌다. 처음 제의를 했을 때 세 명 모두가 두말 할 것 없이 적극동참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사회가 세대 간의 갈등이 극심하다고 하던데 그도 아닌 듯하다.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들, 남자들의 수다는 여자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다. 서로 간에 호구조사(?)는 사전 프로필로 대체했으니 바로 본론으로 돌입한다.

기자 : "일단 각각 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할 텐데요. 자신과 다른 세대를 비교할 때 어떤 생각들이 드는지부터 시작해보죠. 어린 30대부터(웃음)."

유형민(이하 유) : "50대면 제 아버지 세대시죠. 어려웠던 시대에 우리나라를 일으킨 주역들이신데, 그에 비해 뒤안길이 많이 쓸쓸해 보인다는 게 솔직한 제 심정이에요. 어렸을 때는 보수적이라거나 고정관념 투성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 아빠가 되어보니 공감하는 게 많아요.

40대를 보는 입장은 보통은 회사 선배님들이신데, 앞으로 다가올 제 미래라는 생각이 커요. 저희 때는 대학 입학 때부터 취업 고민이 커서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 같아요. 학교 자체가 고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긴 했지만 저희 때부터 심화됐다고 하더라고요. 40대 선배님에게 부러운 건 대학 시절 낭만 같은 게 있었던 세대라는 거죠."

권영찬(이하 권) : "그렇지도 않아요(웃음). 전 마지막 운동권 세대라는 88학번이었죠. 방송생활을 한 22년 했고 지금은 사업도 하고 있지만 한때는 고학생이었어요. 대학을 제가 벌어서 다녀야했어요.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4~5개씩 했을 정도였죠. 어렸을 때 강원도 영월에서 무일푼으로 올라와 성공하기 위해 무수히 도전했어요.

저 역시도 50대 선배님을 보면 '10년 후 내가 저 자리에 있겠구나' 싶은데 요즘 50대 분들은 미래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대책 없이 자녀를 지원하고 나서 노후라는 게 없어요. 30대는 정말 무서운 추격자죠. 저는 요즘 30대를 만나면 말을 잘 안놔요. '언제 봤다고 말을 놓으세요' 이러거든요(웃음). 우리 때는 '아이고 형님'인데…. 경험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면이 강조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30대들이 눈에 띄는 것이 사실이에요. 직업을 옮기는 데도 과감하고요. 제가 깜짝 놀란 것은 30대가 집보다 차를 먼저 산다는 거예요. 집값 떨어질 텐데 뭐 하러 사냐는 식이죠. 그러면서 인생을 즐기고 사는 편이더라고요. 그것을 보면 나는 왜 저러지 못했나 싶기도 하죠."

김용전(이하 김) : "저는 주로 직장인들 고민을 다루는데, 많이 들리는 이야기가 30대는 잔 계산이 빠른 대신 멀리 보는 안목이나 배려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특히 30대는 이직문제에 있어서 단호하더라고요. 지난 시절을 경험한 제 입장에서는 계산이 빠른 것만이 성공의 지름길은 아닌데…."

권 : "저는 제 아내가 30대 중반이라 가끔 그런 것을 느껴요(웃음)."

김 : "80으로 주민번호가 시작하는 나이가 몇 살이죠?"

유 : "딱 제 나이죠. 서른셋이요."

김 : "40대 직장인들은 딱 그 80년 생 후배들이 너무 얄밉다는 거야(웃음). 직장에서 위에 50대들은 보면서도 뭐라고 하면 무안당할까봐 못 본 척하고 지나치고, 그 사이에 낀 세대가 자신들이라고 하더라고."

권 : "저도 그런 느낌이 들긴 해요."

김 : "40대가 낀 세대가 맞긴 한데, 따지고 보면 낀 세대가 아닌 사람은 없어요. 50대도 40대였던 시절이 있고, 30대도 40대가 될 테니까. 너무 끼어있다는 것을 의식할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지금은 먹고사는 문제 보다 어떻게 잘 사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대고 그런 면에서 30대와 40대는 우리세대보다 훨씬 자유로운 것 같아요."

권 : "저는 김 선생님께서 회사를 나오신 과정을 듣고 너무 안전장치를 안 하신 게 아닌가 싶었어요. 저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다보니 조심하는 편이거든요."

김 : "맞아요. 특히 <직장신공>이란 책을 쓰고 나니까 신공이 있으신 분이 왜 잘렸냐고 묻는 경우도 있더군요(웃음). 순진한 건 아니었는데 너무 믿었던 거죠. 특히 마지막 한 2년 정도는 노조관리를 했기 때문에 비하인드 스토리가 없을 수 없어요. 그냥 깨끗이 던지고 나왔어요. 그런데 제 뒤에 나온 후배들은 그래도 뭔가 하나씩 챙겨서 나오더라고요(웃음)."

권 : "형민씨의 경우도 가정을 위해 로펌 변호사 일을 포기했다는 게 사실 잘 이해되지 않아요. 우리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버티는 것을 택하거든요."

유 : "물론 30, 40대에 일에 흠뻑 빠져 치열하게 살며 돈도 벌고 얻을 수 있는 게 있겠죠. 하지만 저는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다보면 가족과 얼마나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생각해보니 후회가 될 것 같더라고요. 물론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삼형제 중 장남이라 빨리 돈을 벌어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해서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어요."

어떤 선택이든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솔직한 답이 아닐까. 세대 간에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가족의 행복을 중시하는 것은 다르지 않았다. 50대를 대표하는 김용전 작가의 말을 시작으로 대화는 자연스레 자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인정받기를 원한다

김 : "오늘은 서울의 결혼한 아들 집에서 자고 갈 생각이에요. 올해 서른 두 살이죠."

권 : "아들집 맞으시죠? 요즘 50대는 애인집에 간다고 하던데요(웃음)."

김 : "큰일 날 소리 하시네(웃음). 아까 형민 씨 이야기를 들으니 생각나는 게 있어요. 아들집에 가는 것 자체가 솔직히 어려워요. 며느리와 둘이 살고 있는데 거기 가는 게 왠지 연못에 돌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웬만하면 늦어도 집에 내려가는 편이죠."

권 : "선생님 세대는 자녀들에게 노력을 많이 하셨잖아요. 당당하셔도 되지 않나요?"

김 : "노력을 하긴 했는데 그게 빗나간 노력이었지. 아이들과 시간을 같이 못 보낸 거죠. 몇 년 전 아들하고 술을 마시면서 밤새 이야기를 했는데 내심 놀랐어요. '아빠는 왜 그렇게 모르냐'는 거야. 공부한 거 상장 받은 거만 알지 자기 인생에 중요한 순간이 언제였는지,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거예요. 말을 꺼내면 제 반응은 항상 '내가 왜 이렇게 미친 듯 일하는 줄 아냐 너희들을 위해서다'였다는 거야. 인간적인 교감이 적었기 때문에 못난 아빠가 된 거지.

나중에 보니까 진짜 아들이 바란 것이 뭔지 모르는 게 많더라고요. 말하자면 생계만 책임을 진 셈이었지. 그런 면에서 우리는 조금 불행한 세대 같아. 난 남자가 목숨을 거는 게 '인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린 시절에는 부모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학창시절에는 친구에게, 커서는 여자에게 인정받으려하죠. 나이가 50대가 되니 이젠 아들에게 인정받고 싶더라고. 그게 저한테는 어렵더라고요."

권 : "저야 이제 애기가 10개월이라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불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아이를 위한 적금도 들어놓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죠. 그런데 제 또래 친구들 얘기는 결혼해서 애 낳고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중학생이 됐다는 거예요. 그 친구들도 김 선생님처럼 거의 교감이 없었다는 거죠."

유 : "6개월가량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로펌 생활을 할 당시는 매일 12시까지 야근에 주말까지 나가야했어요. 덕분에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는 가지도 못했죠. 법무관을 전역할 때까지만 해도 먹고살 걱정은 크게 안 했는데, 직장을 가보니 아버지 세대가 느낀 부담을 알겠더군요.

지금 생각은, 돈이야 많으면 좋겠죠. 그러나 한계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보다 지금 당장은 아이들이 큰 탈 없이 건강하게 커줬으면 좋겠다는 것뿐이에요. 또 다른 걱정은 큰 아이가 이제 4살이라 어린이집에 가는데 벌써부터 학부모들 경쟁이 치열하다는 거예요. 아직 4살인데 걱정도 되면서 한편으로 우리 아이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권 : "저 역시 마흔 중반에 아이를 안고 키우는 게 만만치 않네요. 반면 제 또래 친구들은 모이면 자녀들 왕따 걱정을 하더라고요. 요즘은 아이들이 자살까지 하는 상황이라 서로 만나면 '너희 아이는 왕따 안 당하냐'가 안부인사가 될 정도에요."    

이야기가 중반을 접어들며 저마다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때론 밉고 때론 곱게 보이는 아내라는 존재,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 등 술잔이 더 해짐에 따라 이야기는 점점 흥미진진해져 갔다.

처음 만난 세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갈수록 무르익었다.
 처음 만난 세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갈수록 무르익었다.
ⓒ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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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다가도 애틋한 아내의 존재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녀를 걱정하지만 역시 교육에 대한 것은 아내에게 일임해 온 것이 우리나라 보통 남자들의 현실이다. 언젠가부터 아내의 힘은 세지고(?) 주도권이 넘어 간지는 오래다. 살아가며 아내에게 서운함 없는 남자가 있을까.

기자 : "아내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세요. 조금 민감하지만 수위조절은 각자 알아서 하시고(웃음) 아내에게 서운했던 순간을 이야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김 : "회사에서 팽 당하고 귀농학교에 다니면서 1평당 1만 원의 소득을 올리면 훌륭한 농부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자신만만해서 3000평에 첫 농사를 지었죠. 그래도 처음이니 목표 수입은 딱 절반인 1500만 원으로 정했어요. 그리고 아내에게 1000만 원은 줄 테니 500만 원은 네팔 여행 다녀오게 해달라고 했죠.

근데 농사가 생각처럼 잘 안 되더군요. 1500만 원은커녕 200여만 원이 손해를 본 거에요. 그래도 네팔에는 가고 싶어서 알아보니 150만 원만 있으면 봉사를 하면서 갈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아내에게 농사짓느라 고생한 건 고생한 거니 150만 원만 달라고 했더니 단박에 못 준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혼 이야기를 처음 꺼냈어요. 그런데 몇 번 이야기하니 그만하라던 아내가 도장 가지고 오라고 하더라고."

권 : "저는 얼마 전에 포털 사이트 1위가 된 적이 있었어요. 제 아내랑 이혼한 적이 있거든요.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해서 돈이 없었는데 3000만 원 전세 값이 없어 길에 내 앉아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금전적인 문제로 이혼을 할 수밖에 없어 자존심이 상해 눈물까지 났는데 오히려 아내는 털털하게 그럴 수 있다고 위로하더라고요.

근데 나중에 다시 재기해서 돈 벌어오니 '그때 위로해줬으니까' 하면서 무조건 30%를 떼 가네요. 사실 우리 세대는 돈 달라고 안 해도 알아서 다 줄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때를 곱씹으며 '나도 계산이 있었어' 하는 아내를 보니 '아 무서운 세상이구나' 싶더라고요(웃음). 그리고 또 하나 시어머니한테 꼬박꼬박 할 말 한다는 거, 형민씨 아내는 어때요?"

유 : "저한테는 할 말 다 하는데 아직 부모님께는 말조심을 해요(웃음). 참 위험한 대목인데…, 솔직히 부부싸움 할 때면 순간적으로 욱할 때가 있죠. 그래도 아직 결혼 생활이 짧아서 그렇게 서운한 것은 없어요. 다만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아내가 제 부모님께 잘하는데, 살갑게 대하지는 못한다는 거죠. 저희 부모님은 아들만 셋에 첫 며느리라 딸같이 살갑게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치시거든요. 저도 아내가 먼저 전화해서 같이 만나 시간도 보내고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죠."
     
김 : "제 집 근처에 이외수 작가님이 사시는데 젊어서 하도 사모님이랑 싸워서 지금은 전우애로 산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전 지난해 추석 전날 급성신부전으로 병원에 입원했어요. 엄청 아픈 상황인데 형제들도 멀리 있고 바쁘니 못 오더라고요. 그런데 네팔 간다고 했을 때 그렇게 난리치던 아내가 한 열흘 동안 옆에서 꼬부려 자면서 뒷바라지 해주니 애틋하더라고요. 내 반쪽이 있다는 안도감이죠."

남자는 아버지를 닮는다

남자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인 경우가 많다. 많은 아버지들이 가족을 위한다는 이유로 함께할 시간 대신 일을 택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된 아들은 어느 날 문득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기자 : "유형민씨 같은 경우 서두에 아버지 세대에 힘겨움을 이야기하셨는데, 각자 살아가면 아버지의 인생이 이해되는 순간이 있었을 텐데요."

김 : "저 같은 경우는 꼭 40대쯤 아버지의 구두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에세이를 하나 쓴 게 있어요. 제 아버지는 오래전 서울시 공무원이셨는데, 늘 뚫어진 구두를 신고 다니셨어요. 내가 어릴 때는 아버지 출근 전에 구두 닦아 드리는게 유행이었거든요. 어느 날 아버지 구두를 닦는데 보니 가죽이 뚫어져서 비가 샐 정도더라고.

그래서 아버지께 새 것 사 신으시라고 했더니 '괜찮다. 아직 신을 만하다'며 고집을 부리시더라고요. 그때 속으로 '우리 아버지 참 쫀쫀하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어보니까 나도 어려울 때 새 구두를 못 사 신겠더라고요. 그때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버지라고 왜 광나는 구두를 신고 싶지 않았을까. 자식 생각. 이런 저런 고민, 그야말로 아버지였기 때문에 못 사신은 거야."

권 : "저 같은 경우에는 2005년도에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어요. 나중에는 무죄로 밝혀졌지만 구치소에 있으면서 아버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예순 다섯이셨던 2001년에 돌아가셨는데, 4년 후에 제가 그런 일을 당한거죠. 그러면서도 살고 싶으니까 '우리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 후에도 어떤 중요한 기로에 섰을 때면 하늘을 봐요. '우리 아버지가 바라보고 있겠지' 하면서요. 전 원래 냉면에 고추냉이를 푸는 걸 싫어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니 저도 모르게 따라하더라고요. 그럴 때 마다 내 한 마음 곁에 같이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죠."

유 : "저는 아직 그런 감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걱정 되는 것은 역시 부모님 건강이죠."

김 : "예전에 아버지에 관한 책을 만들어 보려고 40·50대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인터뷰 한 적이 있어요. 최불암씨나 김홍신씨 같은 분들이었는데, 중년의 남자들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울더라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하며 나이에 상관 없이 울더라고…. 저 같은 경우 아버지께서 올해 아흔 둘이세요. 1922년생이시니, 너무 옛날식 꼬장꼬장한 선비시죠. 사실 아직도 이야기가 안 통해요(웃음)."

권 : "얼마 전에 손숙 선배한테 나이 먹어도 부모님 생각이 나시냐 물으니 당연히 난다고 하더라고요.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키우며 바쁘게 살다보면 부모님이 잊혀질 듯도 한데, 선배님들에게 물어보니 각인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김 : "부모에게는 누구나 영원한 어린애죠. 저 같은 경우 돌아가신 어머니가 참 많이 생각나요. 아버지는 너무 보수적이시지만 어머니는 말 그대로 한국의 어머니셨죠. 본인은 고생 하시면서도 대범하게 품어주신 분이에요. 지금도 항상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요. 눈물도 나고….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한시를 쓰는 분인데 어째 어머니 이야기는 한 줄도 없는지, 역시 옛날 분이라 그러신가봐요."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술 한잔을 마주하며 뭉쳤다.
 살아온 과정과 환경이 전혀 다른 세 사람이 술 한잔을 마주하며 뭉쳤다.
ⓒ 조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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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다

우여곡절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매번 깨지고 넘어지면서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고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답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어쨌든 희망은 오늘의 우리를 살게 끔 하는 에너지가 되고 있다. 아내와 아버지, 자식들의 이야기를 연거푸 꺼내 놓으며 들이킨 막걸리가 얼큰한 취기를 부른다. 이쯤에서 각자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을 들춰본다.

기자 :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죠. 여러분 모두에게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으실 텐데요. 마지막 주제로 각자의 희망사항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 : "저 같은 경우 나이 쉰에 회사 잘리고 귀농한다고 한 3년을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서산 상주, 문경, 고향인 제주도…. 그중에 꼭 마음에 들었던 곳이 섬진강변에 곡성이었는데 그곳에 두계리라는 마을이 있어요. 지리산 자락에 스물 대여섯 가구가 모여있는 마을이었는데 제 눈에는 마치 상그리라처럼 보였죠.

특이한 것은 이 마을에 살려면 이장의 면접을 봐야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저도 아내와 같이 면접을 보러 갔는데 거두절미하고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고 하더라고. 질문인 즉, "두계리 사람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재주가 무엇이냐"더군요. 그것이 분명한 사람만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최근에 면접을 봐서 받아들인 사람이 트럼펫을 잘 부는 사람, 수지침을 잘 놓는 아주머니, 미용을 잘하는 주부였더군요.

그때는 전업 작가가 되기 전이라, 질문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회사 명함을 떼어 놓으니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이었죠. 남을 위해서 뭘 해줄 수 있는게 없더라고. 하지만 지금은 진짜 나를 찾은 것 같아요. 지금 두계리 면접을 본다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제 희망은 무소유의 삶을 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려면 수양을 더 많이 해야겠죠(웃음). 또 한 가지라면 시대를 초월하는 좋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거죠. 그것 외에 지금의 삶에 원하는 것은 없어요. 살아보니 인생이란게 새옹지마더라고요."

유 : "저는 뭘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시간은 흘러가잖아요. 이제까지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들을 키우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삶이라고 생각해요. 매 순간순간 감사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지금 제게는 그게 전부고 '미래에 내가 뭘 하고 싶다' 그런 것보다 지금처럼 애들 크는 거 보면서 직업에서 보람을 찾고 살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라고도 하는데 그렇게만 생각하면 허무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앞으로는 종교적인 부분에서 위안을 얻고 싶다는 생각도 해요."

김 : "갑자기 형민씨한테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생각났어요. <도가니>라는 영화를 보면 변호사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지 알았더니 나쁜 놈을 옹호하잖아요. 우리 아내도 흥분할 정도였거든. 로펌을 경험하면서 스트레스나 시간의 문제 외에도 일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는 없었어요?"

유 : "말씀을 못 드렸는데 그런 이유도 있죠. 큰 로펌일수록 더 심하다고 알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로펌은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합니다. 법리 같은 것도 종교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법리 구성을 잘하거나 사실관계를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거든요. 로펌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전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 수임을 많이 받는 것도 사실이고요.

제가 봤을 때 저도 전에 있던 회사에서 정의로운 일보다 돈을 주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한다는 생각에 솔직히 보람을 많이 못 느꼈어요. 또 돈을 주시는 분들은 변호사를 부하직원 같은 개념으로 대하세요. 그런 점이 회의가 들더라고요. 사익을 위해 일하려고 공부를 한 것은 아닌데…. 너무 옳지 못한 일에 조력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들이 있었죠. 그런 면에서 공공기관이 성격상 공익을 위한 기관이기 때문에 지금 직장에 대한 만족도가 커요."

기자 : "30대의 특징이라면 약으면서도 큰 야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앞 세대 분들보다 모든 것이 갖춰진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족함을 못 느낀 것일 수도 있고요. 이에 반에 40~50대 분들은 성공에 대한 야망 같은 것이 있었을 듯 한데요. 권영찬씨의 희망은 무었이었나요."

권 : "저는 어렸을 때 연필에 침을 발라 썼던 세대에요. 그때 샤프를 쓰는 아이를 보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골몰한 적도 있다. 지금도 제 꿈은 사실은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40대가 되면서부터는 그 돈으로 뭘 해야 할지를 굉장히 고민하죠. 술집에서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즐겁지 않거든요. 집에 가면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는 핀잔을 듣는 세대기도 하고요(웃음).

전 지난해 아이 100일 때 잔치를 하고 싶었는데 과거에 힘든 일을 겪은 기억이 있어 공익적인 일에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방법을 고심하다가 시각장애인들의 개안 수술을 하는 데 썼죠.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도 마찬가지였고요. 그게 제 상황 때문만은 아니고 사실 40대가 공허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까 김 선생님 말씀처럼 인정받고 싶은 거죠.

부자는 많으니까 돈 버는 것으로는 인정받기 힘들어요. 그나마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40대가 등산을 좋아하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봉사를 좋아하는 건 대접받지 못한 이가 인정받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해요. 어쨌든 봉사든 뭐든 간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를 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싶죠(웃음)."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르는 분위기에서 세 사람은 서로 간에 주고받는 고민거리 속에 각자의 해답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러면서 다시금 각자의 희망을 꺼내 놓는다.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로 절실하게 느껴지는 세 사람의 바람 속에 남자의 인생이 엿보인다. 어쩌면 누구에게나 인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Healing'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자 토크, #권영찬, #김용전, #유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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