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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떨렸다.

그냥 인주 묻힌 막대기를 살포시 누르는 것뿐인데 왜 그리 긴장되는지. 누르고 나서도 몇 번이나 후 후 불었다. 접어서 봉투 안에 넣어야 한다기에 반대쪽에 인주자국이 생길까 봐.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투표장에서 만난 지인들도 "그거 잘못 접어서 혹시 묻으면 무효표 처리된다며? 마를 때까지 기다렸어"라며 투표 뒷담화를 풀어놓는다.

외국에 사는 게 괜히 우월해질 때가 있다. 오늘 같은 날이다. 남들은 아직도 14일이나 기다려야 하는 제18대 대통령선거 투표를 먼저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가 5일부터 10일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실시된다. 일주일이나 시간있으니 천천히 가야지하다가 대선토론회 역사상 가장 화끈했던 지난 4일 TV토론를 보고 맘을 바꿨다. 토론회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바로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이미 투표장은 '북적'... 얼마나 투표가 하고 싶었을까

 주일한국대사관에 설치된 투표소 광경. 오전 10시를 조금 지난 시간에 이미 100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 박철현

도착하니 오전 아홉시다. 내심 빠른 축에 속하겠다라고 자만했었는데 웬 걸! 천만의 말씀이다. 이미 투표장은 북적이고 있었고 영사관 관계자는 "아침 일곱시부터 하나둘씩 모이시던데요"라고 상황을 전한다. 얼마나 투표가 하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아는 선배들도 눈에 띈다. 나처럼 "아침에 일어나 토론 하이라이트 보고 그 길로 투표장 온거야"라는 K선배. "그나저나 나 인증샷이나 하나 찍어줘"라며 카메라를 건네는 K신문 S선배, 한국어교실을 운영하는 L선배는 "난 절대 안 가르쳐 줄 거야"라고 옆구리를 찌른다. 이젠 흰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재일동포 2, 3세분들도 단체로 나타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한다.

휠체어를 타고 오셔서 기표연습을 하다가 "손에 힘이 없어서 찍지를 못하겠다"는 할머니는 각 당 선거관리원과 따님이 보는 앞에서 기표를 한 후 투표함에 넣는다. 재일동포 1세이신 할머니는 투표도 처음 해보셨을 것 같다. 이런 분이 누굴 찍느냐는 사실 그다지 중요치 않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권리를 행사했다는 것이 의미있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 기표할 힘이 없어 참관인의 도움을 받는다.
ⓒ 박철현

일본사회의 그 만성적이고도 뿌리깊은 차별에도 굴하지 앟고 대한민국 국적을 지켜가며 한평생을 살아온 분이, 거동이 불편한 아니 인주조차 제대로 누를 수 없는 분이 선거 첫날 아침부터 달려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으니 말이다.

사실 재외선거가 이번 총선부터 시행되면서 말도 안 되는 말들이 숱하게 오고 갔다.

대표적인 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조총련개입설이다. 작년 12월 한나라당 정미경 의원은 "조총련이 남한 총/대선 개입 지침을 하달했다"며 재외동포선거특별법의 전면적 개정을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5만명 위장국적 취득 작전'. 조총련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선 국적 재일동포를 한국국적으로 귀화시켜 2012년에 있을 총선 및 대선에 개입시켜 혼란을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당시 정 의원의 이 발언은 <월간조선>,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다뤄졌다. 특별법 입법까지 거론되는 등 많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이 발언은 금년 4월 총선 결과로 인해 거짓말로 판명났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당시 재외선거 대상자 223만 3193명 중 12만3571명이 재외선거인으로 등록했고 그 중 5만 6456명이 투표에 참여(투표율 45.7%)했다. 실제 투표자 수를 보더라도 일본은 9793명에 불과했다. 총선만 그런 게 아니다. 이번 18대 대선에서도 선거인등록을 마친 재외유권자는 22만 2389명. 일본은 3만 7126명이 등록했다. 대선의 특성상 총선보단 관심이 높겠지만 예상 실투표수는 2만에서 2만 5천 선으로 예상되고 있다.

즉 정미경 의원이 주장했던 '오만명 개입설'은 아님말고 식의 막가파 폭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재외선거 필요성 여부 제기한 일부 여론, 너무합니다

 투표 인증샷
ⓒ 박철현

그런데 아무도 여기에 대해선 미안하단 말이 없다. 근거없는 받아쓰기로 오보를 낸 언론사들은 오히려 적반하장이다. 그들은 사과는커녕 재외선거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투표율이 현저히 낮다며 재외선거의 필요성 여부를 제기하고 있다. 독자들 역시 이런 류의 기사를 접하고 재외선거에 의문을 품었다. 진보진영 미디어 및 인사들 조차 투표시간 연장에 따른 추가적 비용발생에서 재외선거를 예로 들기도 했다.

정말 재외선거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국처럼 마을마다 동마다 투표소가 있는 게 아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뭐가 날라오는 것도 아니다. 직접 선거인단 등록을 하고 투표하러 가야 한다. 그것도 기본 서너 시간이나 걸려서. 엄청난 의지가 없으면 투표를 못하게 해 놓은 시스템을 먼저 지적하고 바꿀 생각을 해야지, 아예 없애자고 한다. 조총련 개입설 같은 말도 안 되는 의혹이나 제기하면서 말이다.

해외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한다. 조그마한 한국뉴스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하물며 대선이다.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12월 3일에는 민주당 지지 모임인 '민주포럼'과 안철수 팬클럽 '안철수와 친구들 in 재팬'이 한자리에 모여 단일화를 일구어냈고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세력 역시 민단신문에 '조국을 지켜내자'며 대문짝만 한 광고를 냈다.

먹고 살기 바쁜 건 대한민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시스템이 개선되면 개선될수록 사전등록은 늘어갈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비록 홍보가 덜 됐지만, 지난 총선과 달리 이메일 접수가 가능했기 때문에 사전등록자 수가 80%나 늘어났다. 그리고 투표장 열기 역시 총선때와 확연히 달랐다. 벼르고 별렀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내가 투표장에 있었던 약 한시간 반 동안 정권교체를 꿈꾸는 이들과 종북세력을 반대하는 유권자들 약 150여 명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영사관 관계자 역시 투표열기에 놀랐는지 "이런 추세라면 저번(총선)과는 달리 투표율도 꽤 높게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투표장 입구에서 인증샷을 찍는데 쉴 새 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투표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 투표장을 견학시키는 젊은 어머니, 단체로 투표하러 온 가족들, 일본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열성적으로 지지후보의 장점을 역설하는 중년신사, 해맑은 웃음으로 투표안내를 하는 유학생 등.

이 모든 이들에게 이번 제18대 대통령선거는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참여의 즐거움과 소중함을 만끽한 표정은 이토록 아름답다. 먼저 투표를 끝낸 선배(?)의 입장에서 한국의 유권자들도 12월 19일 이 즐거움을 누려보시길 간절히 원한다.


태그:#재외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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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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