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창생> 스틸(2013, 박홍수 감독)

영화 <동창생> 스틸(2013, 박홍수 감독)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 더 램프㈜


<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영화 <동창생>은 암살 지령을 받고 남한에 떨어진 공작원 리명훈(최승현 분)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북한에서의 동생 리혜인(김유정 분)과의 안정적 삶을 염원하며 고도로 훈련받은 킬러인 '기술자'가 된 리명훈의 선택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리혜인은 순수하기 이를 데 없으며, 물론 그 동생을 지키려는 리명훈의 마음 역시 순수하며 간절하기 이를 데 없다.

한국에서 리명훈의 새로운 신분의 외피는 고등학생 강대호다. 이는 동생과 이름이 같은 동창생 이혜인(한예리 분)과의 관계로 연장된다. 한편으로, 남북한의 현실 정세에 대한 실제적 진단은 영화를 그 바깥의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게끔 한다.

결과적으로, 국가 내지는 거기서 산출된 특정 집단의 부름을 받고 삶을 저당 잡힌 채, 감정 없는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전근대적인 인간에 대한 대부분의 서사에는 단지 그가 체제 유지를 위한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버려졌을 때 겪는 커다란 상실감과 함께 비극적 결말의 여지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삶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생계를 윤택하게 하는 차원에서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만 노력하는 게 가능한, 자유로운 현대인의 삶의 방식과는 물론 대별된다.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나 <의형제>(2010) 등 수많은 남파공작원의 삶을 전제로 한 영화는 응당 비슷한 전제, 그리고 그 결과에 다가선다. 이 안에서 <동창생>은 철저히 리명훈의 이미지, 표정, 감정, 액션에 집중한다. 곧 이 영화는 여러 복잡한 층위의 사회적·실제적·(영화-)계보적 맥락들을 안고 있지만, 리명훈에게 절대적인 분량을 수여하는 가운데, 리명훈을 넘어 최승현 자체에 대한 영화로까지 소구되는 측면이 크다.

리명훈에서 강대호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리명훈으로

 영화 <동창생> 스틸

영화 <동창생> 스틸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 더 램프㈜


리명훈은 수용소 안에서 비루한 복장으로 동생을 부둥켜안고 삶의 수호를 외치던 곤궁한 삶의 모습에서 곧장 교복을 입은 상류층 자제의 강대호로 돌아온다. 영화는 눈부신 강대호의 비주얼에 집중하고 또 그에 현혹된다.

그가 지령대로 한 명씩 적을 제거하는 차가운 킬러의 모습들은 전학 온 이방인으로서 이곳에서 결코 적응할 수 없는 또 다른 차가운 얼굴과 교차 편집으로 드러난다. 영화는 사실상 임무를 위해 동생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염원을 품고 있되, 그 감정을 철저히 감추고 있는, 그래서 어떤 것도 읽을 수 없는 리명훈의 얼굴을 길게 비추며 실은 국가(?)에 예속된 '슬픈 노동자'의 텅 빈 삶의 형식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이 아무 것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리명훈의 내면 대신 그 '텅 빈 잉여'로만 드러나는 강대호의 표면을 관찰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동생과의 만남이 점점 절망으로 변질되며, 차갑고도 정확하게 수행해 오던 임무에서 어떤 가치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이 끝없는 세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지점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곧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던 그가 리명훈으로도 강대호로도 살 수 없는 '이중적 속박'을 벗고, 급작스럽게 눈물을 터뜨리는 장면을 포착해 낸다.

리명훈은 단지 상상으로만 동생을 그릴 수밖에는 없다. 곧 드문드문 보여줄 뿐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가득 오빠를 담은 동생 리혜인의 이미지가 상상 속에 출현하는 가운데, 리명훈의 감정은 관계의 양상에서 자연스레 생겨날 여지가 없다. 이 장면은 물론 뒤늦게 리명훈이 강대호를 입고 기존의 반복적 일상에서 삶을 의미 없게 영위하던 것에서 강대호를 벗어나서도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가 체현되는 게 불가능함을 인지하게 되는, 영화상에서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이다.

국가에 의해 버림받은 자, 출구는 없다

 영화 <동창생> 스틸

영화 <동창생> 스틸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 더 램프㈜


그렇지만 이러한 뒤늦은 깨달음 역시 매우 허무한 결론을 유예할 뿐이다. 눈에 띄지 않거나, 누구에게나 이상하게 비춰지는 '이방인'이거나, 실제로는 단지 특정 집단에 속해 은밀한 임무를 부여받고 이용되고 버림받는 자에게는 어떤 구원의 출구가 없다. 구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측면에 가까우므로 영화의 결말은 '구원이냐 비극이냐'라는 어떤 필연적인 제한을 노정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동창생>은 그 점에서 비극적 결말을 어떤 희망적 삶의 일부로 바꾸는 동시에, 그에 대한 충분한 해명이 가능한 과정을 배치한 <의형제>와 공명하며 또한 차이를 벌린다.

<의형제>에서 마찬가지로 '구원 없는 자'인 송지원(강동원 분)에게 손을 내밀어 양지로 그를 끌어내고자 한 이가 이한규(송강호 분)였다면, <동창생>에서는 학생의 신분에서 왕따여서 결과적으로 전학 온 낯선 신분으로서 리명훈과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이혜인, 그리고 리명훈을 쫓는 임무를 갖되 리명훈과 동생을 만나게 하고 삶의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고 싶은 국정원 요원 차정민(윤제문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동생을 그리워하는 만큼, '오직 한 사람'의 자리를 더 이상 내어 줄 수 없는 리명훈에게 동창생 이혜인과의 연인 관계로의 발전이나 우정의 다른 이름으로 그 긴밀한 관계의 지속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혜인이란 존재는 리명훈의 동생 리혜인과 이름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한층 기묘해진다. '혜인'은 그렇게 부재하며 리명훈 앞에 현존하고, 현존하면서도 여전히 부재하는 영화적 알레고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미 두 '혜인'의 운명적 관계는 결코 온전할 수 없는 간극을 상정하며, 동생과의 지속될 수 있는 삶의 형태가 불가능함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적 대안 그리고 구원의 자리 역시 없다

 영화 <동창생>스틸

영화 <동창생>스틸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 더 램프㈜


리명훈과 운명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두 '혜인'과 달리, 그저 사람 좋고 계략이나 상부 지시의 간교함에 물들지 않는 차정민은 <의형제>의 이한규를 닮아 있는데, 영화의 한계는 곧 너무 많은 알레고리를 리명훈으로 소급시켰다는 점에 있다. 반면 그것이 리명훈의 다양한 면모와 함께 최승현의 연기자로서의 성숙된 모습을 영화에서 확인시켜주는 (특히 그의 팬으로서는) 긍정의 지점이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적으로 치명적 단점이기도 할 것이다.

리명훈이 집단 대치의 상황에서 개입한 수사망을 너무 쉽게 유유히 빠져 나갈 때 유일하게 그를 주목하는 이가 바로 차정민이다. 이는 단순히 리명훈을 쫓는 카메라의 시선의 접점을 만들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 그가 리명훈에게 구원을 주는, 또 우선적으로 그에게 마음을 주는 사람으로서 모습을 창출하기 위한 장면으로 봐야 한다.

<의형제>가 외부인인 남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없는 송지원에게 국정원 요원이면서도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주고 관계의 따뜻함을 형성한 이한규의 모습을 통해 구원 없는 자의 불가능한 삶의 출구를 우리 입장에서의 또 다른 입구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줬다면, 차정민의 뒤늦은 개입과 리명훈 자체에 쏠려 있는 <동창생>의 전개는 그 구원의 가능성을, 또 그에 대한 사유를 충분히 생산하지 못한다.

국가 이데올로기가 전제된 영화들에서는 무엇보다 국가가 상징적·절대적 아버지이며 혈연상의 아버지를 대신하는 것이다. 곧 '아버지-정부'에 버림받은 자는 그 안의 영역에서 축출되어 떠돌며, 그 즉시 아무 의미 없이 죽음을 당해야 하는 이가 된다. <동창생>은 남파된 북한 공작원과 같은 삶을 그리는 데 있어 비극의 전형적인 결말의 궤적을 따르며 한계를 드러낸다.

동(창)생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나아가다

'왕따' 취급을 당하는 이혜인을 경유해서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풋풋한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과 함께 학원물의 성격을 포개 놓지만, 곧 여기서 영화는 이탈한다. 어중간하게 연인도 아닌, 엄밀히 새로운 가족의 관계로도 볼 수 없는 관계를 이혜인과 유지하며 '동창생'이라는 제목을 무색하게 만든다.

따라서 <동창생>에 대한 몰입의 정도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우정이나 추억의 함의를 담고 있기보다는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외부 조건으로서 특수하고도 실제적인 남북 분단의 상황 속에 탄생한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인 인물 유형에 대한 동의, 그리고 최승현이라는 배우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고 바도 무방할 것이다.

애초 동생 리혜인을 위해 삶의 모든 것을 건 곤궁한 삶의 리명훈과 그를 무조건적으로 돕는 동창생 이혜인, 그리고 그 바깥에서 리명훈을 구출해 내고자 하는 차정민, 후자의 몫이 실패로 끝나는 것은 곧 <동창생>이 수많은 북파 공작원의 삶을 다룬 영화적 계보 아래, 대안적 결말을 마련하지 못했음을 말한다. 이는 동시에 직간접적으로 현실에 대한 암울한 초상의 반영이기도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아트신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동창생 최승현 의형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