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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입니다. 11월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수도권입니다. [편집자말]
오래된 소나무들이 초병처럼 지키고 서있는 남한산성 성곽길.
 오래된 소나무들이 초병처럼 지키고 서있는 남한산성 성곽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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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지도 않고 산세도 웅장하지 않은데 계절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한 폭의 그림을 선사하는 산들이 있다. 조금 심심하고 지루할 만한 산 속 구불구불한 능선을 따라 오래된 산성(山城)이 숨어있듯 자리하고 있다면 그 그림은 더욱 풍성하게 변한다.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500m 조금 넘는 키의 아담한 남한산과 남한산성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지난봄 남한산의 포근한 봄 풍경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계절이 가을로 바뀌고 땅위로 낙엽이 융단처럼 깔리니 남한산과 산성은 언제 그랬냐는 듯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가을 색으로 물든 성곽길이 산 능선 위에서 굽이치며 춤추듯 이어져 있다. 옛 조상들과 해방 이후 인근 주민들이 심어놓은 산성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 군락 외에 신갈나무, 단풍나무, 서어나무,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 등의 활엽수가 많이 살고 있어서 가을 풍경이 더욱 풍성하다.

인상적으로 읽은 김훈의 소설 속 배경이기도 한 남한산성에 올라서면, 쓰러져가는 왕조의 운명 앞에서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럽혀질 것인가' 고뇌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그 옛날, 나라를 방어하고 왕조를 지키던 산성은 이제 도시인들에게 건강과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가을색 완연한 남한산성

산성과 노거수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 조상들의 미적 감각이 엿보인다.
 산성과 노거수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 조상들의 미적 감각이 엿보인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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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립공원이 될 정도로 규모가 큰 산성엔 남한산 등산로와 함께 동서남북 산성문을 잇는 약 12km의 성곽길이 있다. 산성까지 차도가 나 있어 수도권 전철 8호선 산성역(2번 출구) 앞 정류장에서 산성입구까지 데려다주는 마을버스가 있다. 창밖으로 가을 풍경이 가득한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 남한산성에서 가장 큰 남문에 내렸다. 남문을 산성 성곽길의 초입으로 삼은 것은 문 앞에 서있는 수백 년 묵은 고목 느티나무들이 보고 싶어서다.

나이를 많이 먹어 지지대를 하고 서있지만 아름드리 장대한 나무의 분위기가 남한산과 산성을 지키는 신목(神木) 같다고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매년 도당제라는 제사를 지낸단다 (마을의 평안과 행복을 빌며 나무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보통 당산제라고 하는데 경기지역에서는 도당제라고 한다). 이날도 사람들이 나무 앞에서 소박하게 제를 올리고 있었다. 산성의 커다란 남문과 노거수 나무들이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가을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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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의 돋보이는 미적 감각은 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서문을 향해 가는 길에도 볼 수 있다. 마치 성벽을 지키는 초병들처럼 크고 작은 오래된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어 성곽을 따라 이어져 있다. 성벽 밖을 향해 신묘하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 적송(赤松)이라 하여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붉은 피부를 드러내는 소나무, 거대한 아름드리 소나무들 사이엔 벤치가 놓여있어 다리가 아프지 않아도 앉았다가 가고 싶게 한다.

남문에서 서문까지의 산성 일대에는 주민들이 정성으로 돌보고 지켜온 소나무 숲이 72ha나 펼쳐져 있다. 서울·경기지역에서 노송이 넓은 군락을 형성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이 소나무 숲은 일제강점기 때 마을 주민 303명이 국유림을 불하받은 후 벌채를 금지하는 금림조합을 만들어 보호해왔기 때문에 지금껏 숲을 유지하고 있다. 이 소나무 숲이 좋아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하더니 그럴 만하다.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작고 귀여운 새, 동고비들이 재잘거리며 노래를 불러준다. 절로 기분이 상쾌하다.

곧이어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인 '수어장대(守禦將臺)'를 마주한다. 입구에서 가지를 땅으로 늘어뜨려 방문객에게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처진 소나무'를 지나, 2층 내부로 향했다. 이곳엔 '무망루(無忘樓) 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는데,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하여 북벌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수어장대를 둘러보자니 나무 위에서 까마귀들이 저음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인근의 군부대에서 사격연습을 하는지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간간이 요란한 소음을 내며 헬리콥터까지 지나가고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긴장되는 게, 그 옛날 불린 콩 몇 알로 버티며 임금과 백성을 지키고자 한 고단한 조선병사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했다.

산성안에 자리한 소나무 군락 사이에서 쉬어가기도 좋다.
 산성안에 자리한 소나무 군락 사이에서 쉬어가기도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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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의 위용 속에 감춰진 치욕의 역사

산성(山城)이란 도성(都城)이나 읍성(邑城)과는 달리 전란(戰亂)과 같은 위급상황이 닥쳤을 때 임금을 비롯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여 적과 대치하며 항전을 벌였던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억울한 죽음과 고통스런 삶이 함께 했던 회한의 사연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을 것만 같다. 인조 임금이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나섰다는 서문을 지나다 마주친 주인 잃은 백구 한 마리에게서 버려지고 방치된 백성들의 서러움과 슬픔이 느껴지는 듯했다. 왕은 1637년 1월 30일 혹한의 추위 속에서 이 문을 지나 잠실 부근의 한강변 삼전 나루터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어쩌다 주인을 잃고 산성에서 배회하는 백구 한마리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어쩌다 주인을 잃고 산성에서 배회하는 백구 한마리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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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임금이 항복을 하러 나섰던 산성의 서문, 왕은 이 문을 나와 잠실 부근의 삼전 나루터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인조 임금이 항복을 하러 나섰던 산성의 서문, 왕은 이 문을 나와 잠실 부근의 삼전 나루터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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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병자년 12월 4일 모진 추위 속에 압록강이 얼어붙자 14만 명의 청군이 강을 건너와 단 5일 만에 서울 녹번동까지 침입했다. 강화도에 피신하려고 했던 인조는 허겁지겁 이곳 남한산성으로 피신한다. 결국 40여 일만에 항복한 인조 임금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되고, 이어 공녀(貢女)가 섞인 60만 명의 백성들이 전쟁포로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이후 가족들이 몸값을 주고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지만, 이들 부녀자들(환향녀: 還鄕女)은 '화냥' 취급을 당하는 사회적 비극까지 낳았다.

남한산성은 험준한 자연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하고 있어 적이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성이었다.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춘 큰 성으로 여기에 왕이 거처하는 행궁과 9개의 사찰까지 성 안에 자리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이 천혜의 요새는 병자호란이라는 치욕과 절망의 역사가 산 채로 매장된 곳이기도 하다.

인조는 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 꿇었지만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청은 항복문서에 '청나라 군대가 물러가고 난 후 어떠한 경우라도 산성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다. 청나라 황제와 군대는 분명 남한산성의 위용을 보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느꼈을 듯싶다.

남한산성의 또 다른 매력, 옹성과 암문

옹성이 있는 벌봉 가는 길, 성벽의 옛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옹성이 있는 벌봉 가는 길, 성벽의 옛 자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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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길 가운데 가장 길고 오르락내리락 변화무쌍한 북문길을 걷다보면 나무 벤치가 있는 쉼터와 함께 작고 좁은 암문(暗門)이 나온다. 암문은 성곽의 후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드는 비밀 출입구로, 남한산성엔 이런 비밀스런 문이 16개나 있다. 그 중 13번째의 이 암문 앞 이정표에 '벌봉(봉암)'이 표시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하나의 단순한 성곽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성과 그 주변에 봉암성, 한봉성, 신남성과 같은 옹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옹성은 일종의 외성(外城)으로 적이 직접 성문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목적으로 성문 밖으로 또 한 겹의 성벽을 둘러 이중으로 쌓은 것을 말한다. 북문길에서 벌봉 방향으로 따라 가면 옛 성벽의 자취가 남아있는 옹성과 여장, 옹성의 암문 등 본성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여장이란, 성벽 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탄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현대식으로 복원한 본성의 성벽과 달리 옹성의 성벽은 부서지고 깨져 남루했지만, 그 옛날 치열한 전투를 치러냈던 역사속의 산성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깊은 숲속 사이 오솔길을 20여분 걸으면 작고 좁은 암문과 함께 둔중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벌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한산성에 16개나 있다는 비밀의 출입구 암문, 그 모양도 다양하다.
 남한산성에 16개나 있다는 비밀의 출입구 암문, 그 모양도 다양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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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을 청군에게 빼앗겨 곤란을 당했고, 청 태종은 정기가 서려 있는 이 벌봉을 깨트려야 산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하여 큰 바위를 깨트리고 산성을 굴복시켰다는 전설이 안내판에 적혀있다. 그런데 정말 벌봉의 바위들 가운데 가장 큰 바위 한쪽이 무참히 깨져있다.

벌봉에서 북문 성곽길로 돌아와 마지막 지점인 동문을 향해 가는 길은 그동안 걷느라 수고했다는 듯 내내 내리막이다. 성곽 중간에 장경사라는 자그마한 절이 있어 목마름을 채우려 들어갔지만 약수터가 하필 커다란 은행나무 밑에 있어서 은행잎들이 물을 온통 덮어 버렸다.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안 되어 보였는지 절에서 일하시는 분이 마시라며 물을 건네주었다.

4시간이 넘게 걸려 성곽길을 둘러보았지만 남한산성은 왕이 묵었던 행궁과 사당, 사찰이 있는 산성안의 길, 성곽의 안쪽 길과 바깥쪽으로도 길이 나있어 걸음걸음이 다채롭고 여러 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게다가 험준하거나 급경사의 산행길이 아니라서 백발이 성성한 어르신들도 많이 찾는다. 우연히 만나 이야기 나누며 함께 걷게 된 어머니뻘의 어떤 분은 몇 년 전 다리 관절이 아파서 고생을 했었는데, 남한산과 산성길을 꾸준히 오르면서 나았다고 했다. 노약자를 특히 우대하고 포용하는 남한산과 산성이 괜시리 고맙게 느껴졌다.

간간이 나타나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 산성에 사는 까마귀.
 간간이 나타나 신령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 산성에 사는 까마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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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주요 도보 성곽길 : 남한산성 남문 - 수어장대 - 서문 - 북문 - 벌봉(봉암) - 장경사 - 동문 (약 4시간 반 소요)

덧붙이는 글 | ㅇ 남한산성 도립공원 : (031)743-6610, http://www.namhansansung.or.kr



태그:#남한산성, #남한산, #병자호란, #벌봉, #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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