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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임신소식을 듣고 친구가 자몽청을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빈병만 남아있다.
▲ 친구가 만들어준 자몽청 내 임신소식을 듣고 친구가 자몽청을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빈병만 남아있다.
ⓒ 곽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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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한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나 좋은 소식이 생겼나 봐 ㅋ"

문자를 보자마자 '좋은 소식'이라는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아! 아기 생겼구나!'

내가 홈런이(우리 아기 태명)가 생겼다고 이 친구에게 연락했을 때, 친구는 내가 좋아하는 자몽으로 자몽청을 만들어 집 앞까지 왔다. 그날, 집 근처 공원에 앉아 오랜만에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친구 시댁에서 아이를 원하고 있지만, 친구 부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시댁에서 아이 얘기가 나올 때마다 곤란하다고 했다. 시어머님이 '여의치 않은 상황'을 알면서도 계속 재촉하니 곤란하기도 하고 섭섭하다고 했다. 그때가 석 달 전쯤일까. 그런데 친구 부부의 '여의치 않은 상황'이 해결되자마자 이렇게 기쁜 일이 생긴 것이었다.

친구의 소식을 들은 그 날은 마침 친정에 잠깐 가기로 한 날이었고, 그 친구가 친정 가까이에 살고 있어서 가는 길에 잠깐 만나자고 했다. 친구의 자몽청엔 한참 못 미치지만, 오는 길에 산 과자와 사탕을 건네주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또, 같은 2014년생 자녀를 두게 돼 기쁘다고, 앞으로 임산부로, 학부모로 같은 길을 가게 되니 잘 부탁한다며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친구 얼굴이 예전과 달라 보였다. 원래도 여유롭고 호수처럼 잔잔했던 친구였는데 임신 후 더 편안해 보였다. 아직 초기이니 남편에게 많은 협조를 부탁하고 몸조심하라고 했더니 친구는 "그동안에도 너무 엄살 피웠더니 안 먹히네"하며 아쉬움을 내비친다. 그 남편 만나서 "내 친구 힘들게 하면 혼내줄 거야!"하고 엄포라도 놓고 싶은 마음이다.

친구와 헤어진 뒤 친정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 동안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 육아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생겨 기뻤고, 내가 처음 내 안에 자리 잡은 홈런이를 만났을 때의 기쁨이 생생하게 떠올라 기뻤다.

잠보에서 먹보로

홈런이가 생긴 뒤부터 지금까지를 되짚어봤다. 복부초음파 촬영 화면으로 보이는 조그만 아기집을 봤을 때의 감동, 그 감동에 울먹거리느라 남편이 시부모님과 통화하고 날 바꿔주는데도 전화를 못 받은 일, 그 날 산부인과 병원에 홈런이를 확인하러 가는 길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던 일이 기억났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다섯 달이 돼간다.

홈런이가 생기고 처음 맞은 여름엔 갑자기 없던 입덧이 생겨서 레몬 맛 사탕을 달고 살던 때도 있었고, 변비가 생겨 고생도 했다. 아! 참, 남편이 내 몸이 뜨겁다며 팔베개 안 해줘서 운 날도 있었구나. 남편과 처음으로 손잡고 산부인과 병원에 함께 가서 홈런이를 만난 날, 홈런이가 태동을 시작하면서 정말 홈런이가 살아 있는 존재로 느껴진 그 날, 그리고 남편이 내 배 위에 손을 얹고 홈런이의 발길질을 처음 느낀 날 등 홈런이를 만났기 때문에 마주할 수 있었던 일들이 참 많다.

홈런이가 생긴 후부터 지금까지 보통 때는 임신한 걸 못 느꼈다. 그러다가 '아, 내가 임신부이긴 임신부구나'하는 생각을 인생 처음으로 하게 된 일들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밥'보다는 '잠'이 우선이었던 나였다. 서너 살 때쯤엔 부모님이 나를 할머니 댁에 잠시 나를 맡겨두고 나가셨던 적이 있다. 나는 잠이 들었고, 할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깨어나지 않아 어디가 잘못된 줄 알고 병원에 데려가려는 찰나 내가 깼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난 '밥'보단 '잠'이 더 좋은데 임신하고 나서는 그 둘이 역전됐다. 현재 밥과 잠의 선호 비율은 7:3 정도.

예전엔 살찔까봐 잘 안먹던 와플이었는데 지금은 먹고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 겨울엔 와플이 진리(?) 예전엔 살찔까봐 잘 안먹던 와플이었는데 지금은 먹고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다.
ⓒ 곽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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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추석 때다. 시댁에 가져갈 좋은 사과를 거실에 두었다. 그런데 그 사과 상자를 볼 때마다 자꾸만 사과가 탐이 났다. 이를 어쩌나…. 그때 과일이 세상 그 어느 음식보다 맛있을 때였긴 하지만, 그래도 어쩌자고 차례 때 쓰려고 한 사과를 탐하는지. 그런데 그때는 딱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저 사과 먹고 싶다'와 '저 사과 정말 먹고 싶다'. 결국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남편은 "그럼 먹어"라는 말로 그동안 내 고민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고, 그때 그 사과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추석 직후 신림동 마을축제에 갔을 때, 배가 많이 고프진 않았는데 그날 간식으로 준비된 떡꼬치가 몹시 맛있어 보였다. 용기를 내어 하나 먹으러 갔더니 "이건 아이들을 위해 준비한 거라서… 조금만 기다렸다가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가고 남으면 그때 드세요"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부끄럽지만, 그땐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안 먹고 말 것을 바로 옆 의자에 앉아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가는 떡꼬치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속으로 '아, 남아야 되는데. 기다렸다가 남으면 바로 먹어야지'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덜 먹어서 떡꼬치가 많이 남았고, 난 기쁜 마음으로 옆 사람의 눈치 따윈 생각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그날 난 내가 임신부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이렇게 먹을 것을 탐내다니 정말 신기하다. 식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11월 초 동생 결혼식 전날에도 친정에 가면서, 할머니랑 친정에 와 있는 조카가 먹을 빵을 사서 버스에 탔다. 집까지는 30분 정도 걸리는데, 갑자기 빵이 먹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조금 참았다가 집에서 먹으면 될 걸 못 참고 버스에서 바스락거리며 빵을 뜯어 먹었다. 내 삼십 평생에 길거리나 버스나, 아무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손으로 뭔가를 뜯어먹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임신의 위력이 대단하다.

언제까지 피를 봐야 한단 말인가

그래도 먹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게 하나 있으면 나쁜 것도 하나 있어 줘야 인생 아닌가. 최근 임신 상태여서 괴로운 것이 생겼다. 임신 후 당분간 안 볼 것 같았던 피를 보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있던 월경이 없어지니 피 볼 일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수하면서 비누로 얼굴 구석구석 씻고 눈을 뜨면 세면대가 빨갛게 물들어 있다.

코피가 자주 나는 것이다. 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콧물이 흐르는 것 같아 닦고 나면 주르륵 코피가 흐른다. 가을엔 건조해서 그런가 했는데 겨울에 더 심해졌다. 하루 걸러 하루는 꼭 코피가 나는데, 하루에 많으면 서너 번까지 코피가 터진다. 그동안 남편은 코피가 나는 것이 코를 파서 그런 것 아니냐고 장난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코피가 계속 터지니 걱정됐는지 인터넷으로 임신부 코피에 대해 알아봤다.

"임신하게 되면 호르몬의 영향으로 혈관이 약해진대, 그리고 피의 양도 많아지고. 또 열이 오르니까 피가 위로 쏠려서 약한 혈관에서 피가 나는데, 그래서 코나 잇몸에서 피가 나는 거래."

남편도 나도 어렸을 때 한 '코피(?)' 했던 이들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자다가도 코피가 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고, 남편도 어렸을 때 약해서 코피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코피 나는 것이 대수롭진 않았지만, 몇 달째 계속되는 코피 앞에서 이젠 지친다. 이렇게 지쳐갈 때쯤 남편이 이렇게 관심 있게 찾아봐 주고 지혈법도 알려주고 코 연골을 누르며 직접 지혈도 해주고 있어 그나마 견딜 만하다. 하지만 이번 주에 산부인과 병원에 가면 꼭 상담해봐야지.

병원에서는 입체 초음파 촬영을 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돌고래의 초음파로 태교도 한다고 한다(그래서 제주도 돌고래 태교여행 상품도 있단다). 그런데 난 이번을 마지막으로 산부인과 병원에서 초음파 촬영을 그만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혹시 초음파 촬영이 홈런이에게 귀찮은 것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체 초음파 화면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홈런이의 얼굴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홈런이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굴 더 닮았을까.


태그:#임신 중기, #식탐, #코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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