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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엄마, 저 군대 한 번 더 가야겠어요."
"꼭 그래야 하니, 다른 방법은 없어?"
"예, 우리나라에서는 돈 주고도 배우기 힘들어요. 군대에 다시 가서 기술을 익히겠어요."

약 30년 전 이맘때 일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1년 남짓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 스물다섯, 육군에서 모집하는 항공 준사관에 지원하겠다는 결심을 식구들 앞에서 털어놓았다. 이미 친구들한테는 다시 군대에 간다고 신나게 떠들어댄 한참 뒤였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어머니는 눈물 바람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확고했다. 큰 아들에 장손이라는 집안에서 위상 같은 건 아예 고려대상도 아니었다.  

군 복무 후 복학해서야 우연히 군대에서 전투 헬리콥터 조종사를 뽑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뛸 듯 기뻤다. 대륙을 누비는 화물 트럭 운전사로 미국 이민을 꿈꾸다가, 좌절한 뒤여서 더욱 그랬다.

"미국이 아니면 어때, 호주에서 헬기 조종사라…" 우와~,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대형트럭을 몰 수 있는 운전면허증과 헬기 조종사 면허증은 이민의 수단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게 그때 판단이었다. 호주는 땅덩어리가 크지만, 대륙 구석구석까지 도로를 놓을 수 없어, 헬리콥터 활용 분야가 넓다는 사실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꿈 이루기 위한 군 재입대 결정, 그러나...

헬리콥터 조종면허만 따면, 호주 이민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호주의 하늘을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날아다니며 살 수 있다니, 인생의 앞길이 훤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어머니의 눈물이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부모 허락도 받아냈겠다, 들뜬 기분으로 이튿날 아침 곧바로 학교 병사과를 찾았다. 

"김창엽씨, 준사관 입대하겠다고요?"
"예, 군대 가려고요. 최소 복무기간이 5년인데 휴학신청 하려고요."

"그래요, 의무복무를 하지 않았다면 5년 휴학도 됩니다."
"엥~, 전 3년 동안 이미 군 생활을 했는데요."

"아, 그럼 또다시 군대 가면 자퇴 처리됩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학교로 되돌아올 수 없어요."
"…"

꿈이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말 그대로 어깨에 힘이 쭉 빠졌다. 어깨 힘 빠지는 체험은 그 뒤로도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때 나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대륙을 누비는 트럭 운전기사든 혹은 헬리콥터 조종사든, 집 떠나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은 비록 수십 년의 시차가 났지만, 결국은 이뤄지고 말았다.

떠돌이의 본능... 상사병과 비슷하게 되고 만다

떠돌이 기질이 없다면 몰고 다니기 힘든 '슈퍼 트럭'. 침실은 물론 주방시설, 욕실 등까지 갖춰져 있어, 길 위에서 생활하는데 안성맞춤이다. 차 머리 부분이 일반 트레일러 차량에 비해 유난히 크다. 두 명의 운전자가 잠을 자지 않고 교대로 운전할 수 있어, 빠른 화물 배송에 유리하다. 슈퍼 트럭의 내부. (오른쪽 사진) 전자레인지 등이 보인다.
▲ 집시 기질 떠돌이 기질이 없다면 몰고 다니기 힘든 '슈퍼 트럭'. 침실은 물론 주방시설, 욕실 등까지 갖춰져 있어, 길 위에서 생활하는데 안성맞춤이다. 차 머리 부분이 일반 트레일러 차량에 비해 유난히 크다. 두 명의 운전자가 잠을 자지 않고 교대로 운전할 수 있어, 빠른 화물 배송에 유리하다. 슈퍼 트럭의 내부. (오른쪽 사진) 전자레인지 등이 보인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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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늦여름부터 이듬해 초여름까지 북미대륙 자동차 여행이 그것이다. 무작정 이민 가고 싶었던 생각은, 가출 본능 혹은 떠돌이 본능과 상당 부분 겹친다. 뒤늦게야 깨닫고, 또 자인한 사실이긴 하지만.

미국이나 캐나다 교포들 사이에 "'이민병'은 이민 가야 낫는다"는 말이 한때 있었다. 무슨 연유에서든, 또 목적지가 미국이든 캐나다든 호주든 유럽이나 남미든, 한 번 이민 가야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이게 상사병 비슷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조금 부적절한 비유일 수도 있는데, 한 번 음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해소되지 않는 한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도 아주 유사하다. 일종의 본능이니까.

유타 주 고속도로에서 만난 슈퍼 트럭의 주 운전기사. (왼쪽 사진) 50세가 조금 넘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줄곧 트럭기사로 일했다. 원래는 여간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워 두고 밤을 나지 않지만, 독감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하룻밤 잤다고 말했다.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20대 중반의 보조 운전기사. (오른쪽 사진) 만 17세부터 트럭 운전 일을 해왔는데, 사고 방식이 노마드 그 자체였다.
▲ 길 위의 사람들 유타 주 고속도로에서 만난 슈퍼 트럭의 주 운전기사. (왼쪽 사진) 50세가 조금 넘은 그는 젊었을 때부터 줄곧 트럭기사로 일했다. 원래는 여간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워 두고 밤을 나지 않지만, 독감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하룻밤 잤다고 말했다. 얼굴 표정이 좋지 않다.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20대 중반의 보조 운전기사. (오른쪽 사진) 만 17세부터 트럭 운전 일을 해왔는데, 사고 방식이 노마드 그 자체였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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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큰 규모의 단독주택이 트럭에 실려 있다. (위) 이주가 잦은 미국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워싱턴 주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무료 와이파이가 연결된다는 표식이 붙여져 있다. (아래 왼쪽). 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트럭 운전기사를 포함한 모든 여행객들에게 아침 시간 무료로 커피와 도너츠를 나눠줬다. 자원봉사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커피와 도너츠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었다.
▲ 이동 꽤 큰 규모의 단독주택이 트럭에 실려 있다. (위) 이주가 잦은 미국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워싱턴 주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무료 와이파이가 연결된다는 표식이 붙여져 있다. (아래 왼쪽). 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트럭 운전기사를 포함한 모든 여행객들에게 아침 시간 무료로 커피와 도너츠를 나눠줬다. 자원봉사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커피와 도너츠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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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대륙은 지구에서 대형화물차를 이용한 물류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대륙을 종횡하는 화물차들이 하루아침에 멈춘다고 가정하면, 미국이나 캐나다 경제는 그날로 '스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대륙횡단 트레일러 화물차는 보통 바퀴가 18개 달려있다. 그래서 '에이틴 휠러(eighteen wheeler)'라고도 불린다. 미국과 캐나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아침 이른 시간 혹은 밤늦은 시간 들르면, 에이틴 휠러들이 밤을 나는 것을 거의 예외 없이 사시사철 목격할 수 있다. 약 10개월에 걸친 나의 자동차 대륙여행은 에이틴 휠러 운전자들과 호흡을 함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에이틴 휠러 운전자들의 다수가 보헤미안 혹은 집시 기질이 있다는 점이다. 에이틴 휠러 운전기사는 육체노동자 치고는 비교적 급여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떠돌이 근성이 없다면, 이 직업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거리에서 대화를 나눈 에이틴 휠러 운전자들 가운데 이혼하거나 미혼인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그럴 만도 하다. 결혼은 정주 생활을 전제로 하는데, 적잖은 에이틴 휠러 운전자들이 집 밖으로 나도는 성향이니 그만큼 가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기 쉽다.

요즘 아예 직장을 그만두거나, 생업을 팽개치고 장기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민을 꿈꾸는 젊은이들도 꽤 많다.

여행병, 무조건 짐 싸서 떠나는 게 유일한 약

10개월에 걸친 여행이 끝날 무렵 엉덩이 부분이 다 해진 바지.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 근처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한 에이틴 휠러들.(아래) 화물칸 뒤에 운전기사를 구한다는 문구와 연락처가 눈에 띈다. 대륙횡단 트럭 운전기사 광고를 볼 때마다 지원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다.
 10개월에 걸친 여행이 끝날 무렵 엉덩이 부분이 다 해진 바지. 유타주 솔트레이크 시티 근처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정차한 에이틴 휠러들.(아래) 화물칸 뒤에 운전기사를 구한다는 문구와 연락처가 눈에 띈다. 대륙횡단 트럭 운전기사 광고를 볼 때마다 지원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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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얘기하면, 이거 저지르지 않으면 영영 풀리지 않는 가슴앓이가 되고 만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이긴 한데, 무조건 짐 싸서 떠나는 게 유일한 약일 수도 있다. "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홀가분해진다. 눈에 콩깍지가 씌워져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는 것과도 비슷한 원리이다.

나중에 상대의 적나라한 '생얼'을 보더라도 어쩔 수 없다. 좋게 생각하면, 광고 문구에 나오는 것처럼 "꿈은 꼭 이뤄지고야 마는" 법이다. 안온한 일상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면, 천형으로 알고 떠나시라. 떠돌이로 살든, 이민을 가든. 

네바다 주 출신의 대륙횡단 트럭운전기사. 주행거리와 기름 값 등을 적은 장부를 보여줬다. (왼쪽 사진)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 없었다는데, 그의 집은 홀어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평상시 이들 모자는 휴대전화를 이용해 서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 혼자만의 여행 네바다 주 출신의 대륙횡단 트럭운전기사. 주행거리와 기름 값 등을 적은 장부를 보여줬다. (왼쪽 사진) 가정을 제대로 꾸릴 수 없었다는데, 그의 집은 홀어머니가 지키고 있었다. 평상시 이들 모자는 휴대전화를 이용해 서로 안부를 주고 받는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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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세종시 닷넷(sejongsee.net)에도 실립니다. 세종시 닷넷은 세종시에 관한 소식과 정보를 담은 비영리 커뮤니티 포털입니다.



태그:#상사병, #떠돌이, #이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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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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