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추방되나 한국사회10년표류기 이번사건이남긴것 인터뷰 페이스북 공유 트위터 공유 유우성 스토리 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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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기(anongi) 기자 l 2014.04.26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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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가 12일 집에 걸려있는 화이트보드에 '오빠 조금만 참고 견뎌줘, 사실은 꼭 밝혀지고 무조건 무죄로 나올거야!"고 적혀 있는 글을 읽고 있다. 이 글은 유씨가 간첩 혐의로 수감 되 있을 당시 동생 유가려씨가 방문해 남겨 놓았다.
ⓒ 이희훈

유우성씨가 두 번째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4월 25일은 그가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온 지 딱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북한 함경북도 회령시 오봉리에서 화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유우성씨의 본래 이름은 유가강이다. 회령시 제1인민병원에서 준의사로 근무하던 유씨는 2004년 3월 10일 북한을 떠나 중국→라오스→베트남→태국을 거쳐 한달 보름 뒤인 그해 4월 25일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중국식인 '유가강'이 아닌 조선식인 '유광일'로 신고했다. 실제로 북한에서 친구들은 그를 '광일이'로 불렀다.

유씨는 "수술 중에 전기가 나가서 팔이 부러져라 배터리 전등을 들어야 하는 현실, 지위 고하에 따라 처방할 약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현실"에 절망한 게 북한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고 말한다. 고등중학교 2년만 화교학교를 다니고 나머지는 다른 북한 주민들과 같은 학교를 다녔던 유씨는 "중국어는 말만 할 줄 알지 글은 잘 몰라" 남한행을 선택했다고 한다.

쉽지 않은 '탈북자 출신 남한 의사'의 꿈

/ 북한 탈출 1년 전 2003년 1월 1일 김정숙 동상 앞에서 회령시 제1인민병원 준의사였던 유우성과 고등중학교 학생이던 유가려가 찍은 사진이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유씨 탈북 동기에 대해 "수술 중에 전기가 나가서 팔이 부러져라 배터리 전등을 들어야 하는 현실, 지위 고하에 따라 처방할 약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현실"에 절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유우성 제공

2004년 8월 하나원을 나온 유씨는 대전에 자리를 잡고 의학대학 편입시험부터 준비했다. 10여 군데 편입시험을 봤지만 다 떨어졌다. 2005년 의대가 아닌 약학대학에 합격했지만 한 달 만에 휴학했다. "북한에 있을 때 먼저 탈북한 친구한테 듣기론 의대 편입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실제 해보니까 너무 어려웠다"고 유씨는 회상했다.

유씨는 건설현장에서 외장단열재 시공과 페인트칠 일을 했다. 주유소 아르바이트, 가스배달도 했다. 어린이들을 상대로 쉬운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했다. 그렇게 돈을 모아 영어학원을 다녔다. 탈북자 담당 형사를 따라 성당에 다니기 시작한 유씨는 2005년 4월 세례를 받으면서 신앙의 멘토라 할 수 있는 대부모도 생겼다. 대부님은 '은행 이자는 얼마 안 되니 모아둔 돈이 있으면 나한테 맡겨라, 많이 불려주겠다'고 했다. 유씨는 정착지원금을 맡겼지만, 이자는커녕 원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사기였다.

2005년 4월 말 유씨는 심장병 치료를 위해 중국으로 나온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 머물며 통원치료를 다녔다. 2005년 8월 초 어머니가 베이징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도 두 달 정도 병간호를 했다. 이 때 중국인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이듬해 4월에도 어머니와 함께 베이징에 가서 심장수술 경과를 검사했다.

2006년 5월 21일 복권방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중국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가 갑자기 끊겼다. 다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중국에 있는 외당숙이 전한 것은 어머니의 부음이었다. 유씨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국가안전보위부 단속반이 전파를 탐지하고 들이닥쳤고, 이들의 추궁을 받던 어머니는 심장마비로 숨졌다.

밀입북 : 어머니의 죽음



/ 어머니와 아들 유우성씨가 어릴 적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어머니와 찍은 사진이다. 유씨의 어머니는 2006년 5월 남한의 아들과 전화통화를 하다 단속에 걸려 추궁을 받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망은 유씨 밀입북의 계기가 됐고, 이후 이 밀입북으로 인해 유씨는 남한에게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다.
ⓒ 유우성 제공

유씨는 곧장 중국 옌지로 가서 중국에서 발행하는 북한 통행증을 받아 외가 친척들과 함께 5월 23일 싼허세관을 거쳐 북한 회령으로 들어갔다. 밀입북이었다. 유씨는 닷새간 상을 치르고 5월 27일 중국으로 나왔다. 이후 다시는 북한에 들어간 적이 없다는 게 유씨의 일관된 진술이고, 27일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보위부에 포섭돼 공작원 교육을 받고 6월 10일 북한을 떠났다는 게 국정원과 검찰의 공소 내용이다.

의대 편입의 꿈을 접어둔 유씨는 2007년 3월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탈북자 동아리에도 들었다. 베이징사범대학 교환학생에 뽑힌 유씨는 학기 시작 한 달여 전에 중국으로 갔다. 여자친구와 휴가를 보내고 베이징에 셋방을 구하는 등 유학을 준비한 시기라는 게 유씨의 설명이다. 반면 국정원과 검찰은 이때 유씨가 두만강을 건너 밀입북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씨는 여행비자를 유학비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한국으로 추방됐다.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통해 탈북자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국 정착의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는 영어였다. 유씨는 "북한에서 가르치는 영어수준으론 남한의 영어시험을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1월 영국으로 영어연수를 떠났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현지 어학원이 한국에서 광고한 것과는 달리 공부할 환경이 되지 않았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난민을 대상으로 하는 무료 영어강좌를 듣기로 했다. '북한 난민 조광일'로 난민신청을 했다. 영국에서 6개월 머문 유씨는 그해 7월 귀국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탈북자들의 진술



/ ▲ 유우성씨가 베이징 유학 꿈에 부풀어 있던 2007년, 국정원은 그를 간첩으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탈북자들의 진술은 차곡차곡 쌓여갔고 국정원은 그를 향해 포위망을 좁혀갔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진술은 객관적인 사실관계에도 들어맞지 않는 오류와 과장이 뒤섞여 있었다.
ⓒ 이희훈

유씨가 베이징 유학의 꿈에 부풀어 있던 2007년 6월, 국정원은 유씨에 대한 탈북자 2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진술조서에는 국정원은 유씨가 중국에 한 달 이상 머문 일이 많다는 점을 수상하게 여겼고, 탈북자들은 유씨가 화교이고 보위부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진술한 걸로 나온다.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한 조사가 최소한 2007년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다.

국정원은 탈북자들의 진술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2008년 12월 유씨와 가깝게 지낸 한 탈북자는 유씨가 모친 장례를 위해 밀입북한 사실을 국정원에 진술했다. 잦은 중국 방문과 장기간의 해외여행에 대해 의심하던 국정원은 이렇게 2006년 5월의 밀입북 사실까지 파악했다.

유씨와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한 고향친구는 국정원 직원에게 녹음기를 받아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하고 녹취록을 제출했다. 이 녹취록은 "유우성이 어머니 돌제사(1주기)에 북한을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출입국기록 등 객관적인 사실과는 맞지 않았다. 이렇게 탈북자들의 진술에는 과장과 오류가 뒤섞여 있었다.

최초 탈북자 진술을 확보한 지 2년 후인 2009년 6월부터 유씨 본인에 대한 조사도 시작됐다. 유씨는 국정원 조사에서 2006년 5월의 밀입북 사실을 시인했지만 밀입북은 단 한차례였다고 주장했다. 유씨가 걱정한 건 자신이 북한 공민이 아니었다는 게 탄로나 탈북자 자격을 잃는 일이었다.

"탈북자가 어떻게 북한에 5일 동안 머무르고 무사히 나올 수 있느냐"는 질문에 유씨는 "중국인 명의로 통행증을 발급받아 사진을 바꿔치기 했다", "보위부에 쌀·기름·노트북 등 뇌물을 주고 무사히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 유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기자에게 "북한으로 보냈다는 노트북 그림까지 그려서 내니까 국정원 수사관은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도 한국에 살고 싶냐'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정원 수사관은) 내가 거짓말 하는 걸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간첩이 아닙니다".... 불기소



/ 남한에서 대학을 졸업하다 2011년 2월 연대 중문과를 졸업한 유우성씨는 그해 6월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에서 계약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그는 남북한 출신의 청년들이 함께 탈북자 정착을 돕는 모임 결성에 참여해 부회장을 맡았고 나중엔 회장도 맡았다. 남한 생활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여동생도 데려오기로 마음먹었다.
ⓒ 유우성 제공

국정원은 2010년 3월 유씨의 집을 수색했다. 유씨는 비로소 이 수사가 단순밀입북이나 화교신분이 아니라 간첩혐의에 대한 수사라는 걸 깨달았다. 유씨는 혐의를 부인했다. 2010년 6월 서울동부지검 진술조서에 유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나온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조사를 받는 이유는 국정원, 경찰, 검찰에서 모두 저의 말을 믿지 않고 제가 탈북한 후 북한을 여러 번 다녀 온 것으로 간주해 간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북한을 다녀온 것은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딱 한 번입니다."

한 달 뒤인 2010년 7월 26일 서울동부지검은 유우성씨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 중국의 외당숙에게 빌려준 은행계좌 때문에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입건된 일도 기소유예됐다. 유씨는 국정원에서 자신을 봐줘서 이렇게 처분됐다고 여겼다. 그는 "그땐 국정원 수사관들이 고마웠다"고 했다.

이렇게 조사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그는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다. 탈북자 정착을 돕는 한 자선재단이 운영하는 안보교육 프로그램의 강사를 맡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을 하면서 동아리 회원, 안보강사 명단을 이메일로 받았다. 이 내용은 나중에 '간첩 유우성이 북한 보위부에 보고한 탈북자 신원정보'로 공소장에 기록되게 된다.

국정원 조사가 계속되던 2010년 3월 유씨는 점집에 갔다. 장기간 수사를 받고 있는 신세를 한탄한 유씨는 "이름을 바꾸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말에 유우성이란 이름으로 법원에 개명신청을 했다. 불기소처분을 받은 두 달 뒤 개명 허가가 나왔다.

새 이름으로 바꾸고는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2011년 2월 대학교를 졸업한 유씨는 남북한 출신의 청년들이 함께 탈북자 정착을 돕는 모임 결성에 참여해 부회장을 맡았고 나중엔 회장도 맡았다. '초보 탈북자'에 대한 멘토링, 장학금 주선, 각종 옷가지 등 생활용품 지원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때 취합한 명단도 나중에 '간첩 유우성이 북한 보위부에 보고한 탈북자 신원정보'로 공소장에 기록된다.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 채용에 응시한 유씨는 2011년 6월부터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에서 마급 계약직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탈북자 서울시 공무원'으로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2011년 7월 가족들도 북한 회령시 주택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나왔다. 이듬해 설날 유씨는 탈북한 뒤 처음으로 가족과 함께 설 명절을 보냈다.

동생 합신센터에 보내고 박근혜 후보 지지 활동을 하다



/ ▲ 유우성씨가 12일 오후 자신의 집을 나서고 있다.
ⓒ 이희훈

여동생은 늘 한국에 오고 싶어 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여력이 된다고 생각한 유씨는 남한 정착 8년 만인 2012년 10월 30일 여동생과 함께 입국해 탈북자로 신고했다. 여동생 유가려씨는 국정원 합동신문센터로 인계됐다. 유씨는 알고 지내던 국정원 직원에게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문자도 보냈다. 국정원은 다 끝난 것 같았던 간첩 혐의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한국은 점점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국정원 합신센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까맣게 모르던 유씨는 그 즈음 새누리당 송파병 대통령선거연락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원은 아니었지만 주변 사람들, 특히 탈북자들에게 박근혜 대통령 후보를 지지해달라는 선전활동이었다.

합신센터 조사 시작 20여일 만에 여동생은 자신과 오빠가 북한 보위부 공작원이라고 자백했다. 2013년 1월 10일 그도 체포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1년 6개월간 악몽이 이어지고 있다.

재판에 제출된 객관적인 자료로만 봐도 유씨는 남한 정착 10년 중 2007년 6월부터 지금까지 약 7년 동안 국정원과 검찰에게 간첩이라는 의심을 받으며, 또 실제 조사와 재판을 받으며 지냈다. 불기소 처분이 있었던 2010년 7월부터 2012년 10월 여동생의 입국까지 2년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5년여 세월이다. 최소한 남한 생활 10년 중 절반을 간첩 아니냐는 꼬리표를 달고 생활한 것이다. 탈북자 자격을 인정받으려 화교 신분을 감춘 대가치고는 너무 크다.

한 탈북 청년의 남한 성공의 꿈은 그렇게 표류했다.



/ ▲ 유우성씨가 '유광일'이라는 이름을 쓰던 당시 개명을 위해 작명소에서 받은 작명서.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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