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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의 분홍색 비단 묵주주머니
 장모님의 분홍색 비단 묵주주머니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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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주머니

지난달(5월) 28일, 그라시아 이경조 장모님은 93세로 원주가톨릭병원 병상에서 선종하셨다. 이튿날인 5월 29일 오전 10시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 1층 입관실에서 입관식과 입관미사가 있었다.

장례식장 소속 두 장의사는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모님을 알코올로 깨끗이 닦은 뒤 매우 능숙한 솜씨로 수의를 입혀 드렸다.

장의사는 겉옷 두루마기 수의를 입힌 뒤 유리문을 열고 유족에게 고인의 묵주를 달라고 했다. 장모님 곁을 끝까지 지키던 아내가 손가방에서 분홍색 비단 묵주주머니를 장의사에게 건넸다. 그는 그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장모님 손목에 끼워드린 다음 수의를 마저 입히고 얼굴 화장을 한 뒤 밖에서 지켜보던 유족과 고별 인사를 하게 했다.

나는 장모님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장의사가 작업대에 둔 묵주주머니를 내 주머니에 넣고 입관실 유리문 밖으로 나왔다. 곧 천주교 원주우산성당 교우들의 입관미사가 있었다. 고인이 병상에서 가장 자주 부르시던 성가 151절 <주여 임하소서>가 낭랑히 흘렀다.

주여 임하소서 내 마음에 암흑에 헤매는 한 마리 양을 …
거룩한 몸이여 구원의 성체여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소서.

천주교 원주 우산동성당에서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라시아 이경조 장모님의 장엄한 장례미사가 올려지고 있다.
 천주교 원주 우산동성당에서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라시아 이경조 장모님의 장엄한 장례미사가 올려지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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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흙으로 새 생명의 거름이 되다 

1시간 정도의 입관식 및 입관 미사가 모두 끝났다. 이튿날이었던 5월 30일 오전 8시, 천주교 원주우산성당에서 장엄한 장례미사가 있었다. 그 미사가 끝나자 장모님은 리무진장의차에 실려 원주화장장으로 옮겨지고 두 시간 뒤 한 줌 유해가 한지에 싸여 상주(처남)에게 전달됐다.

곧 상주는 어머니의 한 줌 유해를 승용차에 모시고, 고인이 어린 시절 나물도 뜯고 뛰놀던 생가마을인 경북 고령으로 달렸다. 고인의 유해는 당신 생가마을을 한 바퀴 돈 뒤 시가 청도 선산 깊은 산골 소나무 뿌리에 수목장으로 묻혔다. 마침내 고인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한 줌의 흙으로 새 생명의 거름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서른둘인 1976년 5월에 결혼했는데, 당시 기준으로는 만혼이었다. 수업시작 시간 학급반장이 "차렷 경례!"를 하면 학생들이 일제히 "국수!"라고 외칠 정도로 나의 미혼은 그들에게 안타까움의 대상이었다. 그때 나는 여든에 이른 할머니의 조석 수발을 받았는데, 그해 연초 포항제철에 다닌 아우가 할머니와 형을 보고자 서울 구기동 내 집에 왔다.

당시 내 집은 산중턱 낡은 한옥이었는데 외풍이 몹시 셌다. 그래서 방안에 연탄난로를 설치해 두고 지냈는데 한밤중에 머리가 어지러워 일어나 보니 연탄난로의 뚜껑이 열려 있었다. 깜짝 놀라 방문을 연 뒤 환기를 시키고 김칫국물을 먹은 뒤 전후사정을 알아보니, 그날 밤 늦게 할머니가 두 손자가 자는 방에 들어와 따뜻하게 자라고 연탄난로 뚜껑을 열어둔 것이었다. 그때 할머니는 연탄가스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무서운 독가스인지도 모르시는 시골 할머니였다. 뒤늦게야 연탄가스의 독성과 위험을 아신 할머니는 나에게 하소연했다.

"이제 나는 네 밥해주기도 힘에 부친다. 어서 빗자루 몽뎅이라도 구해 오너라."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고향 구미에 사시는 둘째 고모가 사방으로 친정 조카신붓감을 광고한 모양이었다. 일찍 고모부를 여읜 고모는 구미~대구 간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를 했다. 구미에서 대구로 갈 때는 곡식이나 고치 등을, 대구에서 구미로 올 때는 도매상에서 과자류를 떼다가 구미 구멍가게 소매상에 넘겨 약간의 이문을 남겼다. 마침 고모의 대구 친구들이 그 소식을 듣고, 신붓감 서너 곳을 점지해놨다. 그런 뒤 내게 한 번 다녀가라고 기별했다.

장모님과의 인연

당시만 해도 교통편이 매우 불편하여 나는 건성으로 대답만 한 채 지내던 가운데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구미 선기동 밭 명의이전문제로 갑자기 고향에 내려가게 됐다. 그래서 1976년 3월 1일, 이른 아침 고모와 대구로 가자 고모 친구는 세 아가씨와의 만남을 오전 10시, 낮 12시, 오후 2시로 일방 정해놓고 신랑감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유해를 수목장으로 청도 선산 소나무 뿌리 밑에 묻고 있다.
 둘째 아들이 어머니의 유해를 수목장으로 청도 선산 소나무 뿌리 밑에 묻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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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 10시 대구 역 앞 한 다방에서 장모님과 아내를 처음 만났다. 한 10여 분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뒤 헤어지자 고모와 고모친구는 다음 아가씨를 보자고 보챘다.

그러나 나는 '이건 아니다'라고, 창경원 동물이냐고 반응하면서 더 이상 맞선을 보지 않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편지가 한두 차례 오가고, 아내가 서울로 와 한 번 더 만난 뒤 그해 5월 9일 대단히 '용감하게' 결혼했다.

사실 내가 서른둘에 이르기까지 몇 번은 결혼할 뻔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에는 나보다 상대편에서 더 주판알을 튀겼다. 그때마다 불쑥 튀어나온 섭섭한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일어서거나 상대가 말없이 일어서곤 했다. 나는 세속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형편없이 몰락한 반가의 8대 종손에, 4대 봉제사, 6남매 맏이에다 양어머니, 거기다가 여든이 되는 할머니를 내가 모셔야 했다.

세속적인 주판알

1973년 봄, 어느 신문에서 내 글을 본 대학동창이 학교로 연락이 와 친구로 사귀게 됐다. 어느 날 그 친구 어머니가 부산에 사시는 아버지를 보자고 해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집안사정을 골똘히 질문하던 친구어머니가 끝내 눈을 동그랗게 뜨시고는 딸의 손을 잡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찻집을 나가셨다. 그분은 내가 빈털터리로 할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말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얼마 후 그 친구가 연락해 와 다시 만났지만 내 마음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 뒤로도 언저리 사람의 소개로 맞선을 여러 차례 봤지만 "왜 하필 그 좋은 대학까지 나와 학교 선생을 하느냐?" "영어나 수학 선생이면 몰라도 왜 하필 국어 선생이냐?" 등등의 반응이 나왔다. 혼인에 세속적인 주판알을 튀기는 말에 나는 그들을 경멸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혼인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이다"라는 말처럼.

나의 고모가 당신 친구를 통해 내 단점을 모두 아가씨 측에 전했으나 장모님은 그 단점들을 오히려 장점으로 여기고, 딸에게 좋은 신랑감이라고 끝내 우기신 모양이다. 결혼 후에도 늘 그러신 듯했다. 아이들이 외가에 다녀오면 그랬다.

"외할머니는 아빠를 최고의 사위로 여기신다."

형부가 오셔서 데려가이소

나는 고스톱과 포커를 늦게 배웠다. "늦바람이 용마름 벗긴다"는 속담처럼, 거기에 빠져 결혼 초 아내 속을 무던히 썩였다. 어느 하루 동료들과 포커로 밤샘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가 두 아이를 앞세우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처가로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꿋꿋이 지냈다. 열흘이 지난 뒤 처제가 전화를 걸었다.

"형부예, 언니 집에 있는데 형부가 오셔서 데려가이소."

그 전화를 받고도 묵묵히 지내자 보름이 지난 뒤 아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슬그머니 돌아왔다. 후문을 들으니 장모님은 딸 말은 듣지 않고 일방으로 나무라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늘 장모님은 딸보다 사위 편을 들었다. 사위가 돈도 되지도 않는, 오히려 주머닛돈을 쓰는 의병이나 독립군이야기를 쓰고자 중국·일본·러시아·우리나라 각 고을을 쏘다녀도 "박 서방, 기왕이면 자네 고향사람 출세한 이야기를 쓰면 훨씬 낫지 않겠는가?"라는 군말조차도 않고, 당신 사위가 쓰는 글을 천하명문으로 여기셨다.

2003년 2월, 일본 기타도호쿠(북동북) 지방 아키타·이와테·아오모리 3개 현의 초청으로 취재를 갔다가 아오모리 현의 한 여관 구내매점을 지났다. 수예품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내는 해외여행을 떠날 때마다 선물을 사오지 말라고 닦달했지만 나는 분홍색 비단주머니를 산 뒤 가방 깊숙이 넣고 귀국 후 장모님에게 드렸다. 그때 여든이 넘는 장모님은 그 분홍색 비단주머니를 받고는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장모님은 그 주머니에 돈이나 동전을 넣고 늘 당신 가방에 넣고 다니신 모양이었다.

장모님은 늘그막에 천주교에 귀의하셨다. 2007년 장모님은 병환으로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하셨다. 이따금 내가 그곳에 들리면 머리맡에는 늘 분홍색 비단주머니가 놓여 있었다. 장모님은 그 뒤 끝내 일어나지 못하신 채 3년 전, 내가 사는 원주로 오셨다.   

아내는 원주시 단계동에 있는 프란치스코 사회복지회 부설 '사랑의 집'은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으로, 당신 종교와도 맞을 뿐더러 시설도 좋고, 가족 이상으로 돌본다고 당신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셨다.

장모님은 대구에서 구급차를 타고 오는 침상 머리맡에도 내가 드린 분홍색 비단주머니가 놓여 있었는데, 병원에 입원하신 이후로는 돈주머니 대신 묵주주머니로 쓰신다고 했다. 날마다 장모님은 그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시면서 천주님에게 사위의 건강과 문운을 빌었음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진정으로 나를 위해주는 사람

신혼 초 장모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경복궁에서(1977).
 신혼 초 장모님이 서울에 오셨을 때 경복궁에서(1977).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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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님이 원주로 오신 뒤 아내는 거의 날마다 '사랑의 집'을 드나들었다. 나도 이따금 장모님의 병상을 찾으면 매번 알아보시고, 특히 내가 당신을 안아드리면 더없이 좋아하셨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병원에 가자 손등은 온통 주삿바늘 자국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며칠 전, 의사 선생님이 아내에게 음식을 입으로 넣을 수 없어 그제부터는 목을 뚫겠다는 것을 사양하자 하는 수 없이 영양제를 주사로 투여한 결과였다.

"장모님, 이제 천주님 곁으로 가십시오."

장모님은 아무 대꾸도 못한 채 눈으로 끔쩍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제야 당신 생명의 끈을 놓은신 듯했다. 이틀 후 아침 장모님은 주무시듯 눈을 감으셨다. 아내는 곧 당신 어머니 머리맡은 놓인 분홍색 비단 묵주주머니를 가방에 챙겼다.

아내는 장모님 장례기간 중, 나와 장모님에게 수년간 밥을 가장 여러 번 얻어먹은 둘째 처남 한 친구가 가장 많이 울더라고 했다. 장모님이 떠나신 지 보름이 지나도 나는 아직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장모님은 내 가정을 결속 시키는 든든한 끈이었다.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나를 위해주는 사람을 떠나보낸 슬픔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장모님! 부디 하늘나라에서 편히 사십시오.


태그:#장모님, #묵주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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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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