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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 30분 전, 어머님의 손을 잡고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어머님의 손과 내 손이 닮았음을 알았다.
▲ 어머니이 손 임종 30분 전, 어머님의 손을 잡고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어머님의 손과 내 손이 닮았음을 알았다.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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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목) 오후 8시 50분, 84년의 삶을 평온한 가운데 맞이하신 무명인이 계십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오셨기에 일간지에 부고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었고, 가족과 지인 외에는 그분 죽음에 관심을 둘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누구나 왔다가 가는 길을 가신 분,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아주 특별하셨던 분이신 어머님이 이 땅의 삶을 마감하시고 선산에 묻히셨습니다. 응급실로 이송한 이후 장례 절차를 마치기까지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제 일 주일 정도 되어가니 조금씩 실감이 납니다.

이것도 뉴스일까? 아니, 뉴스가 아니라 '사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곧 '뉴스'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임종하시기 전까지의 삶을 기록하여 혹시라도 저와 같은 경우에 있는 분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거나 위로받으신다면 하는 마음으로 지난 일 년여의 시간을 돌아봅니다.

착한 치매라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어머님이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셨습니다. 특정한 일에 집착하셨는데, 그것은 삼시세끼 챙겨먹는 일이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식구들을 만나도 늘 "밥은 먹었냐?" 물으셨지요. 방금 식사를 마친 후에도 "밥 먹어야지?" 물으셨습니다.

검사 결과,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소위 '착한 치매'였습니다.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 치매 그래서 오히려 치매가 온 이후 어머니는 표정이 밝아지셨고,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지내셨기에 건강도 더 좋아지셨습니다. 그러나 착한 치매라고 가족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름 감사하긴 하지만 늘 곁에서 어머니를 24시간 누군가 간호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일 년여를 지내던 어느날 어머니가 호흡 곤란과 가슴 통증을 호소하셨습니다. 응급실로 달려간 우리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폐암 말기 판정이었습니다. 6개월여의 시간이 남았다고 했습니다. 길어야 올 봄에 돌아가실 것이라는 판정이었지요. 항암치료를 해도 호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했습니다.

가족회의 결과, 항암치료보다는 남은 기간 동안 가족들이 효도하는 시간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우리는 통증 없이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체기능 중에서 청력이 가장 오래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퇴원 후 어머니는 삼시세끼 잘 드시며 건강하게 지내셨습니다. 간혹 치매 증상이 심해지시긴 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본인의 상태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어 가족의 입장에서는 다행이었습니다.

그렇게 4개월여를 편안하게 집에서 보내시다가 통증이 시작되어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이전처럼 폐에 물이 찬 것이라 생각했고, 물을 빼고 돌아오시면 또 건강하게 생활하실 것으로 가족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응급실에서 들려온 소식은 비보였습니다. 서둘러서 가족들과 이별인사를 하고 언제든지 임종실로 옮길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지만, 서둘러 가족들에게 연락해 속속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치매 환자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게 가족들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주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대소변이 보고 싶으시다며 며느리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습니다. 임종실로 옮긴 뒤 가족들이 어머님 귀에 대고 감사의 말들을 전했습니다. 신체의 기능 중에서 청각기능이 가장 오래 남아 있다는 조언 때문에 임종을 앞둔 어머니 앞에서 좋은 말들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며 깊은 수면에 빠져드신 지 4시간여 만에 숨을 거두시고 84년의 이 땅의 삶을 마치셨습니다.

항암치료와 인공호흡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의 폐암 말기 판정이 나온 후 가족들은 항암치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치매로 약해지신 어머니가 험난한 항암치료를 견딜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설령 항암치료가 성공을 한다고 해도 치매로 고생하는 노년의 삶을 어머니가 원하실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습니다.

어머님은 응급실에서 간헐적으로 통증을 호소하셨고, 응급실에 도착한 다음 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켜보는 가족으로서는 상당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안락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심하게 통증을 호소하지 않으셨기에 절실함이 덜하긴 했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을 품위있게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야 아직 법적으로 승인되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알 수 없는 일이니 내가 건강하고 정신이 온전할 때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품위를 지키며 지나치게 아프지 않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유서는 남겨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이에 안락사가 승인이 된다면 좋은 일이겠구요.

결과적인 이야기고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하는 기제가 작용하긴 하겠지만, 어머니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여주고 가급적이면 기계적인 수명연장을 최소화하고 자연사하실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어머니를 위해서도 잘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섭섭하지만 어머님이 심한 통증을 호소하다 돌아가셨거나 기계장치로 연명하다 돌아갔다면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것입니다.

영정사진을 보니 하얗게 센 머리칼도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농사일을 많이 하셨던 어머니는 손이 거칠었습니다. 쩍쩍 갈라진 손, 풀때가 시커먼 손, 어머니의 손바닥이 등을 슥 지나치기만 해도 까끌하여 시원했습니다. 보드라운 어머니의 손을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치매가 온 뒤로 살림에서조차도 모든 손을 놓으신 후에야 어머니의 손은 보드라워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부드러워졌다고 한들 마디마디 손주름이나 상처는 어디로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간호할 때에도 그랬지만, 임종 직전에도 어머니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머니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내 손이 있었습니다. 내 손과 어머니 손이 엄청나게 닮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처음 확인한 것입니다.

장례식장에서 어머님 영정 사진을 보니 하얗게 센 머리칼도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자녀들 중에서 막내인 내가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많이 닮았다고 가장 많이 효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을 한 후에는 아내에게 어머니 모시는 것을 거반 다 맡겼으니, 어머니는 저보다 며느리가 더 예뻤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자녀들을 배려해 주셨습니다. 장례식 내내 날씨는 봄날 같이 좋았고, 짧은 사흘장이라 너무 힘들지 않게 장례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살아생전 인사할 수 있었고, 자녀들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웃으시며 임종하셨으니 너무도 감사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태그:#어머니, #불효자, #손,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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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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