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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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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제가 뭐 좀 보여드릴 게 있는데요. FM 라디오 방송국에서 받은 자료인데요. 제가 자주 듣는 <저녁의 인기가요>라는 프로그램이에요. 여기에 <우울한 편지>를 꾸준히 신청하는 사람이 있어요(중략)."

여자 경찰 권귀옥(고서희 분)은 직접 카세트를 들고 와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튼다. 부녀자 연쇄 살인을 해결 못 하는 경찰서 안에 노래가 퍼진다. 

"이 노래 방송된 날이 전부 여기서 사건 터진 날이랑 일치해요. '비 오는 밤 꼭 틀어주세요'…."

여기서부터 영화 캐릭터상의 반전이 일어난다. 고문과 강압 수사를 일삼는 박두만(송강호 분)은 코웃음을 치고, 합리적으로 수사하려는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은 객관적 증거 아닌 우연과 정황에 매달린다.

"하하하하. 미스 권, 굿! 학교 다닐 때 추리소설 많이 봤구만!"(박두만 형사)
"반장님, 우연치고는 너무 정확한데요. 서류를 보세요.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하거든요."(서태윤 형사)

불법 수집한 시나리오의 살인 장면

얼마 뒤 라디오에서 <우울한 편지>가 나온다. 정말 비가 내린다. 마을에선 부녀자 한 명이 또 살해됐다. 노래를 신청한 이는 박현규(박해일 분). 용의자 손이 부드럽다는 증언대로 그는 손이 부드러운 남자다. 경찰서로 끌려온 박현규에게 서 형사가 말한다.

"손이 아주 부드럽네. 네가 군대 제대하고 이 동네 공장에 온 뒤부터 여기서 사건이 줄줄이 일어난 셈이지. 맞지? 네 신청곡이 나온 오후 7시 8분부터 8시까지 뭐했어?"
"집에 있었어요."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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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증거 없이 노래 <우울한 편지>로 용의자를 추궁하는 추리소설 같은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선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진다. 보험금을 노리고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형을 선고받은 김신혜 이야기도 그와 비슷하다.

법원은 살해 도구 등 구체적인 물적 증거 없이 김신혜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수사 기관이 작성한 조서상 자백, 주변인들의 증언이 주요 증거였다. 이 외에 다른 증거는 두 개뿐이다. 보험 증권과 노트 한 권. 당연히 이 둘은 살해 도구가 아니다. 살인사건에서 물적 증거 없이 어떻게 무기징역이 내려졌을까?

김신혜의 누드 사진을 불법으로 압수한 전남 완도경찰서. 기획 '그녀는 정말 아버지를 죽였나' 두 번째 기사에서 쓴 대로다. 경찰은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김신혜의 집을 뒤져 사건과 관련 없는 누드 사진을 가져갔다.

경찰이 불법으로 가져간 건 또 있다. 김신혜의 노트 세 권과 문서 파일 한 권 등도 가져갔다. 노트에는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김신혜의 습작과 메모, 낙서 등이 담겼다. 경찰은 세 노트 중 한 권에 김신혜가 쓴 '아버지 살해 계획'이 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를 받아들여 노트 일부를 김신혜 유죄 증거로 삼았다.

아버지 살해 계획, 사실일까? 이를 따지기 전에 분명히 할 게 하나 있다. 앞서 밝힌 대로, 법원이 김신혜 유죄 증거로 삼은 그 노트는 경찰이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물이란 점이다. 대법원은 2007년 11월 전원합의체 판결로 이렇게 밝혔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기본적 인권 보장을 위해 마련된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은 것이어서 원칙적으로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 수사기관의 위법한 압수수색을 억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대응책은, 이를 통하여 수집한 증거는 물론 이를 기초로 획득한 2차적 증거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김신혜가 다시 재판을 받는다면 해당 노트는 '유죄 인정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법원의 문턱도 넘을 수 없는 증거이기에 법적 다툼 대상도 아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그 노트를 기사로 다루려니, 좀 난감하다. 그동안 여러 방송에서도 보도했으니, 독자들의 궁금증 해소 차원에서 다룬다.

둘 중 하나다. 김신혜가 진짜로 아버지 살해 계획을 세웠거나, 수사 기관이 마음대로 '소설'을 썼거나. 이제 독자들이 판단해보길 바란다. 경찰은 김신혜의 서울 집을 불법으로 압수수색한 다음 날인 2000년 3월 12일, 김신혜에게 묻는다.

- (노트를 보여주며) 무엇을 할 때 사용한 노트인가요?
"공부를 하거나 낙서를 한 노트입니다."

- 피의자의 노트에 살해 계획이 적혀 있는데, 피의자가 작성한 것이 맞는가요?
"예, 맞습니다."

- 누구를 살해할 계획인가요?
"시나리오 줄거리에 있는 여주인공의 아버지를 살해하는 방법입니다."

- 피의자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세운 살해 계획이 아닌가요?
"결코 아닙니다."

- 피의자가 작성한 살해 계획과 아버지가 사망한 것이 (우연히) 일치한 것인가요?
"제가 작성한 시나리오(상의) 살해 계획은 맞는데,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작성한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살해 정황과 근접"... 사실일까?

경찰은 계속 '살해 계획'이라 지칭하고, 김신혜는 '시나리오'라고 말한다. 팩트는 시나리오가 맞다. 사건을 수사한 한 경찰은 2003년 MBC <피디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김신혜가 쓴) 시나리오를 보면 불우한 환경 때문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내용이 있어요. 가상이겠지만, (아버지가 살해된 상황과) 근접해요."

경찰의 주장은 '일치'에서 '근접'으로 바뀌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일까? 무슨 이유 때문인지 경찰은 스스로 '아버지 살해 계획'이라고 지칭한 해당 시나리오를 수사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경찰은 노트 세 권과 문서 파일 한 권을 불법으로 가져갔지만, 법원에 제출한 사건 기록에는 달랑 다섯 페이지의 문서만 첨부했다. 다른 노트와 파일은 기록 어디에도 없다.

우선 방망이, 비닐, 마스크 등의 낱말이 적힌 시나리오 초안으로 보이는 문서가 한 장 있다. 화학 약품에 관한 짧은 기록도 보인다. 또 다른 종이는 '폐인', '수면제', '알코올'이 적힌 낙서다.

무기수 김신혜가 감옥에서도 소지했던 노트와 원고들. 그녀가 쓴 글의 종류와 양은 방대하다.
 무기수 김신혜가 감옥에서도 소지했던 노트와 원고들. 그녀가 쓴 글의 종류와 양은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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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두 장의 종이에는 보험 관련 내용이 적혀 있다. 하나는 김신혜가 가입한 보험회사 담당자들의 연락처 목록이다. 다른 한 장에는 자신이 아버지 이름으로 가입한 보험 상품의 최고 보험금이 적혀 있다. 집, 차, 저축 등 목록 옆에 숫자도 기록돼 있다.

이 다섯 페이지의 문서는 정말 살해 계획서일까? 경찰 말대로 '수면제' 등의 키워드는 김신혜 아버지 사망사고와 겹친다. 하지만 부검 결과 김신혜 아버지 몸에서 검출된 건, 살해용 수면제 성분으로 보기 어려운 독실아민 성분이었다. 독실아민은 의사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구입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한 수면제 성분이다. 감기약에도 쓰일 정도다. 감기약을 먹으면 졸린 이유가 바로 독실아민 때문이다. '방망이' 등은 김신혜 사건과 관련이 없다.

김신혜는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여러 글쓰기 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그녀가 쓴 글은 다양하고, 양은 방대하다. 그녀가 최근까지 소유한, 수감 전에 쓴 노트와 원고지만 따져도 수백 페이지에 이른다. 그녀의 완도 고향집에도 한 움큼의 원고가 있다. 김신혜는 지금도 일기, 편지 등을 많이 쓴다.

종류와 분량이 방대한 그녀의 글 중에서 전후 맥락을 제거한 시나리오의 한 대목, 노트에서 떼어낸 몇 장의 종이를 '살해 계획서'로 여기는 건 과연 합당한 일일까? 아버지 사망 전, 김신혜가 쓴 일기의 한 대목을 보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항상 패기 넘치고, 강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실패로 얼룩져서 한없이 패배자의 그늘로 얼룩져갔을 때…. 그래, 내가 미웠던 건 아버지가 아니라 그 실패였는지도 모른다.(중략)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아가시는 아버지. 내가 외로움이 무엇인지 느끼는 나이가 되어서 아버지를 보니, 참으로 외로운 삶을 사셨다는 생각이 든다.(중략) 언젠가는 아버지에게 성공한 모습, 아니 성공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김신혜가 학창시절 글쓰기로 받은 각종 상장.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김신혜가 학창시절 글쓰기로 받은 각종 상장.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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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김신혜의 글. 이 일기의 한 대목만으로 '김신혜 = 효녀'로 단정할 수 없듯이, 시나리오의 작은 부분을 무서운 살해 계획서로 보는 건 억지스러워 보인다.

정황 증거로만 무기징역

경찰은 보험 관련 메모를 근거로 김신혜가 아버지 사망 보험금 사용처까지 계획했다고 밝혔다. 김신혜의 주장은 이렇다.

"보험을 여러 개 가입한 뒤 약관에 명시된 최고 보험금을 계산해봤을 뿐이에요. 내게 큰 돈이 생기면 무엇을 할까 등을 생각하며 낙서도 했고요. 가입했던 보험 8개 상품 중 3개는 곧바로 해약했잖아요. 어차피 다른 보험도 아버지가 사망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요. 사실과 다른 낙서가 어떻게 '계획 살인'의 증거가 됩니까? 게다가 저는 그런 '가상 재산'을 어렸을 때부터 적어보곤 했어요."

2001년 김신혜 사건을 추적한 고상만 전 반부패국민연대 국장이 쓴 책 <니가 뭔데>는 이런 김신혜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고 전 국장은 책에서 "(김신혜가 작성한 어떤 노트에는) 가상의 재산을 두고 계획을 세운 내용이 숱하게 많다"면서 "(그런 내용의 낙서는) 40여 군데나 기록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게다가 김신혜는 고교생이던 1997년 12월부터 이런 가상 재산 낙서를 했다고 고 전 국장은 밝혔다.

김신혜 사건은, 사건 발생 이후 무려 15년째 논란이다. MBC <피디수첩>, SBS <뉴스추적>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서 다뤘다. 앞서 말한 대로 구체적인 물적 증거 없이 한 개인에게 유죄가 선고되고, 무기징역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은 김신혜를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주장대로, 수면제와 양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교통사고로 위장하려 아버지 사체 주변에 자동차 파편을 뿌려 놓은 게 사실이라면 말이다. 극소량의 수면제 가루나 그 구입처를 확인했으면, 양주병을 찾았으면, 사체를 유기할 때 사용했다는 차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발견했으면, 사체 주변에 뿌려진 자동차 전조등 파편 출처를 확인했으면 김신혜 사건은 깜끔하게 정리됐을 터.

하지만 수사기관은 어느 것 하나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이 내세운 물적 증거는 고작(?) 종이로 된 보험 증권와 시나리오가 적힌 노트뿐이다. 피의자의 습작 시나리오와 낙서 등은 과연 존속살해의 증거로 합당할까? 게다가 이는 법정 문턱도 넘을 수 없는 불법 압수물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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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에서 집중적인 의심과 감시를 받은 박현규. 그에 대한 의혹은 비 오는 날 듣고 싶은 노래 <우울한 편지>에서 출발했다. 정작 피해 여성 사체에선 박현규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경찰의 손에서 벗어났다.

시나리오 초안이 무기징역의 근거 중 하나가 된 김신혜 사건.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




태그:#김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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