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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 셋째날 아침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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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텐트를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몸이 뽀송한 걸로 봐선 간밤을 무사히 넘긴 모양이다. 그리 많은 비도 아니었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걱정만 잔뜩 했나보다. 비가 내려 추웠는지 누리는 침낭을 돌돌 말고서 자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번데기 한 마리다. 

하루의 시작은 늘 똑같이 텐트 문을 열어 바깥 동향을 살펴보는 것이다. 별 생각 없이 텐트 앞 지퍼를 여는 순간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구름이 산봉오리를 타고 넘습니다.
▲ 아침풍경 구름이 산봉오리를 타고 넘습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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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도록 왁자지껄하게 들떠 있던 어수선한 분위기는 밤새 내린 비 덕분인지 차분히 가라앉아 평화롭게 변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섬진강 건너편을 보니 어제 낮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황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나지막히 내려선 구름은 가정역 뒤편의 낮은 산봉오리들의 능선을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마치 미술관의 산수화에서나 보던 그런 모습이랄까? 찬찬히 들여다보니 슬로우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아주 느릿한 속도로 봉우리를 넘어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만나기 힘든 풍경이었다.

멋진 풍경도 잠시, 현실로 돌아오고보니 어느새 잊고 있던 걱정들이 밀려들었다.

아침도 먹어야 하고, 비에 젖어 축축해진 텐트를 무사히 잘 걷을 수 있을지, 또 텐트 뒤에 놔둔 짐들이 밤새 젖지나 않았는지, 누리가 빗속의 라이딩을 잘 해낼지까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일단은 최대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짐을 꾸렸다.

이 날의 비는 거의 일주일 전부터 예고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옷은 물론이고 방수를 위해 김장비닐까지 단단히 준비해 왔다.

걱정이 태산인 나에 비해 누리는 한가하기만 하다. 걱정은 커녕 아예 한 술 더떠서 비속 라이딩할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하긴 어젯밤에 비가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던 누리였으니까.

"누리야, 비오는 날 자전거 타는 게 왜 그렇게 좋아?"
"시원하니까!"


대답이 너무 간결하니 오히려 묻는 내 말문이 막혔다.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기대한 내 잘못이다.

누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나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인가보다. 누리에게는 내 머리 속 그 많은 걱정은 다 쓸데없고 부질없는 것일 뿐. 관심사는 오로지 시원하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것 하나 뿐.

'그래, 누리 말처럼 그저 시원한 것 하나만 생각하며 달려보자!'

오늘은 구례구역을 지나 사성암, 화개장터가 있는 남도대교로 향한다. 남도대교를 건너면 그 이름도 유명한 화개장터이다. 거기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어디든 캠핑할 만한 곳이 나오면 하룻밤 쉬어가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고맙게도 짐을 정리하고 싸는 동안에 비가 그쳐주었고 걱정한 것과는 달리 텐트도 그리 많이 젖은 편은 아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짐을 모두 싣고서 인증사진을 찍고 나니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안경에 떨어져 시야를 살짝 흐려놓는 것만 뺀다면 우중 라이딩도 나쁘지는 않다. 아니 어떻게 보면 옷이 젖어 싫다는 생각 하나만 극복한다면 땡볕 아래서 팥죽땀 흘리며 달리는 것보단 훨씬 나을 수 있다.

옷이 젖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불안감만 내려놓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이다.
옷 걱정따위는 애초에 머릿속에 없을 누리는 출발할 때부터 고개를 위로 살짝 쳐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을 작은 얼굴로 받아내며 '지금 여기'와 '이 순간'을 한껏 즐기며 달리고 있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빗속 라이딩을 즐기는 '누리'

빗속 라이딩을 즐기는 중...
▲ 바로 지금, 여기! 빗속 라이딩을 즐기는 중...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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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간은 자동차와 함께 달리는 길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차들이 지나갈 때 자전거 여행자들을 배려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도시에서의 라이딩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규정상 자전거 전용 또는 보행자와 자전거 겸용도로일 때에만 인도로 갈 수 있다.

설령 인도로 간다고 해도 늘 행인들과의 접촉사고를 걱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차도로 가자니 자동차 운전자들의 노골적인 견제에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도심의 라이딩은 늘 스릴과 사고의 경계를 넘나들기 마련인데 이곳 섬진강 자전거길의 상황은 도시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차도와 자전거도로의 경계라고 해봐야 파랗게 그어진 선 하나뿐이지만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빠르지 않은 속도로 자전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추월했다. 하고많은 자전거길 코스 중에서도 서울에서 꽤 먼 이 곳을 택한 보람을 느낄만큼 이 곳의 운전자들은 젠틀한 운전으로 라이더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는 듯했다.

그런 운전자들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비속의 라이딩에 젖은 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구례구'라는 이름은 '구례의 입구'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기차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누리에게 역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참새 방앗간이다. 누리의 장래희망 목록에서 늘 맨 윗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는 것도 고속열차 기관사다. 이번 여행도 고속버스가 아닌 기차로 가야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기도 했던 누리는 개찰구 근처에서 바라 보는 것으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나보다.

열차도착시간을 체크하고서는 말한다.

"아빠, 이 다음 열차오는 거 플램폼에 가서 직접 보고 싶어."
"그래?"


순간 고민에 빠졌다.

늘상 서두는 게 몸에 배인 성질 급한 아빠이지만 이 여행의 지분 절반을 갖고 있는 동반자이자 파트너이기도 한 누리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평소에 진득하게 기다려주지 못하고 재촉해대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니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서 쉬고 싶은 마음 속의 욕구를 잠시 내려놓고 누리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 누리야. 그럼 이번 열차도착해서 출발하는 거까지 보고 출발하자!"
"오케이!"


누리의 꿈은 고속열차 기관사랍니다.
▲ 구례구역 플랫폼 누리의 꿈은 고속열차 기관사랍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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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를 위해 비장의 카드를 내밀다

마지못해 누리의견에 따르긴 했지만 사실 마음 속 불안함의 근본원인은 오늘 밤 캠핑장소 걱정 때문이었다.

남들은 계획없이도 여행만 잘 다닌다던데 분단위까지 계획을 세워 여행하는 스타일인 나에게 여행의 불확실성은 확실히 견디기 힘든 것이다.

악양면 평사리 근처에 캠핑장이 하나 있지만 자전거길이 없는 강 건너편이고, 부근에는 강을 건너 자전거도로가 있는 이쪽편까지 넘어올 다리도 마땅치 않다. 머릿속 계획으로는 하동을 지나 다압면 면소재지 정도에 적당한 곳이 있으면 묵으려 생각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열차구경을 마치고 구례구역에서의 잠깐 휴식을 뒤로 한 채 이제 우리는 구례에서 백운산을 두고 왼쪽인 광양쪽으로 크게 돌아 화개로 향했다.

그런데 점심에 사성암 지나 어느 이름모를 버스간이정류장에 쪼그려 앉아 끓여먹은 라면이 부족했던 것인지 남도대교를 앞두고 누리는 눈에 띄게 지쳐서 걷는 것보다 조금 빠른 시속 5Km 까지 내려가기에 이르렀다.

다그쳐보는 것도 그 어떤 격려도 소용이 없어 속도는 빨리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누리야, 화계장터에 가면 박카스 한 병 사줄게! 대신 엄마한테는 비밀인 거 알지?"

어린아이에게 먹이면 안되는 걸 알고 있고, 아이 엄마가 있었다면 절대 허락할 리 없겠지만 지금은 '몹시' 위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며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이 작전은 결국 큰 힘을 발휘했다. 역시 박카스의 힘은 위대했다. 아직 먹은 것도 아니고 그저 말만 했을 뿐인데 누리의 다리가 힘을 내기 시작했다. 온 몸의 힘을 짜내서 결국 남도대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는 어느새 그쳤지만 하늘은 여전히 구름이 가득 덮인 회색빛이었다.

난간 너머로 섬진강이 흘러갑니다.
▲ 남도대교 난간 너머로 섬진강이 흘러갑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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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리를 건너면 2014년 11월 화재로 불탔다가 얼마 전 다시 개장한 화개장터이다. 새 단장을 하여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사람도 많고 활력이 넘쳤다. 제철을 맞은 섬진강 벚굴부터 지리산이 품었던 갖가지 산나물과 약초로 좌판은 풍요로웠다.

약속대로 박카스 한 병을 안겨주니 누리 입이 찢어진다. 마치 금단의 열매라도 따먹는 듯 마시는 한 모금 한 모금이 조심스럽기만 해 보였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 화개장터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다시 출발했다.

카페인 성분 때문일까? 마법의 영약이라도 마신 듯 누리의 페달링이 가볍다.

누리 말에 따르면 '하루 종일 달린 게 아니라 오늘 자전거 처음 타는 것 같은 느낌'이라나?

이제 캠핑이 가능할 만한 곳이 나오면 무조건 그곳에서 짐을 풀기로 했다. 남도대교를 출발하여 강변길을 따라 3Km쯤 떨어진 곳에서 공중화장실이 딸린 정자를 별견했다. 섬진강을 굽어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는 바닥에 흙먼지가 있는 것과 식수가 없다는 점만 빼면 하룻밤 묵어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다.

풍경이 끝내줍니다.
▲ 오늘의 안식처 풍경이 끝내줍니다.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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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가 아니라면 특별히 와닿는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정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비를 막아줄 지붕을 가진 두 평 남짓의 이 공간은 길 위에 선 여행자에게 몸과 마음의 피곤함을 달래줄 소중한 곳 이상의 큰 의미를 갖는다.

저녁밥은 야심차게 준비한 쇠고기 샤브샤브이다. 재료라고 해봐야 메밀국수 장국을 풀어넣은 육수에 얇게 썰은 쇠고기와 팽이버섯 뿐이지만 떠돌이 여행자에게는 과분한 메뉴이다.

입이 짧아 가리는 음식 많은 누리도 샤브샤브만큼은 입에 잘 맞아해서 앞접시에 올려놓기가 무섭게 입속으로 사라져 간다.

대충 정리를 마친 후 섬진강변 이름모를 정자 아래에 아들과 나란히 누웠다.

이제 남은 여행은 하루 뿐. 내일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끝나가는 여행의 아쉬움과 일상으로의 복귀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한다. 아마도 이런 종류의 여행이 갖는 의미는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을 견뎌낼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 아닐까?

강바람에 텐트 끝자락이 유난히 펄럭이는 밤이다.

(5편에서 계속)

○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섬진강, #자전거여행, #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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