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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최남단 마라도. 금섬이어서 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더 슬픈 섬.
 국토 최남단 마라도. 금섬이어서 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더 슬픈 섬.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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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짜장면을 배운 시간은 단 3시간에 불과했다. 부산 고향 형님의 친구가 운영하는 동네 중국집에 찾아가 3시간 동안 짜장과 짬뽕 만드는 것을 눈으로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사내는 자신만만하게 돌아와 거짓말처럼 맛있는 짜장과 짬뽕을 만들어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의 첫 짜장면을 시식하면서 그때까지 먹어본 짜장면 중에 최고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민박 손님에게 하루 세 끼 다른 음식을 맛깔나게 만들어 먹이면서 오래된 단골 장사를 유지하던 그 요리 실력은 짜장과 짬뽕이라는 완전히 다른 조리 방식의 음식에서도 빛을 발했다. 물론 그때는 춘장도 캐러멜 색소가 들어간 까만 색이었고, 당연히 미원도 들어갔다. 어쨌거나 그때나 지금이나 사내는 기본에 충실했다. 육수를 만들어 썼다. 너무 당연한 얘기지만, 당시 마라도에서 육수를 만들어 쓴 짜장면집은 우리집밖에 없었다. 그러니 사내는 미원에 크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배운 대로 미원을 넣었는데, 그 양도 적어서 커피 한 스푼 정도였다.

그러나 짜장면 장사를 시작하자니, 하나부터 열까지 난관이었다. 화구를 사들여 올 수도 없었고, 기존의 민박집 주방을 개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중식은 불맛이라고 하는데, 허름한 중식당 주방 흉내조차 내기가 어려웠다. 녹록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섬에는 양파 하나 나지 않았고, 부피가 크거나 무거운 물건은 큰돈이 드는 바지선이 떠야만 들어올 수 있었다.

마을에서 한 번씩 바지선을 띄우는데, 이때 뭐라도 싣고 들어오려면 마을의 실세 눈을 벗어나서는 안 되었다. 정보를 주지 않으니, 바지선이 뜨는 날을 알아내기도 쉽지 않았다. 어째어째 날짜를 알아내어 그날에 맞춰 본섬 모슬포항에 물건을 대기해 놓았다가도 자리가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퇴짜를 맞는 일도 여러 차례였다.

마라도에서 호되게 치른 '신고식'

모두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생긴 변화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두 달 동안, 사내는 이 궁리 저 궁리 시간을 보내었고, 나는 섬도 낯설고 남편이 된 사내도 낯설고, 짜장면은 더 낯설어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일밖에 할 게 없었다. 장사를 돕기야 하겠지만, 멍석은 사내가 알아서 깔 줄 알고 기다렸다. 그때까지도 한 달에 한 번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던 프리랜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도 계속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 달에 한번 취재를 핑계로 육지로 나가는 일이 내겐 해녀들이 물속에서 참던 숨을 물 밖으로 나오면서 뱉어내는 숨비소리와도 같았다. 숨통을 틔울 일이 필요했다.

게다가 나는 마라도에서 본격적인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풍토병에 시달렸다. 밤만 되면 기침이 터져 나왔고, 동이 틀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밤새도록 잠 한 숨 못 자고 기침을 해대었고, 기침이 얼마나 심한지 먹은 것을 다 토해낼 정도였다. 3, 4일을 그렇게 시달리면 나중에는 기도로 숨이 들어가지 않아 눕지도 못하고 벽에 기댄 채 한 숨 한 숨 겨우겨우 밀어넣으며 아침을 맞아야 했다. 동이 틀 시간쯤이면 온몸이 지쳐서 쓰러져 잠이 들곤 했다. 염분 많은 해풍 때문이었다.

그놈의 젠장맞을 섬은 집필한답시고 잠시 들어와 살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 진짜 살려고 들어오니 신고식을 혹독하게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저를 싫어하는지 잘 아는 모양이었다. 섬을 떠나야 할 이유들이 그렇게 쌓여만 갔건만, 떠나지도 못하고 병원도 없는 섬에서 그렇게 앓으며 근 한 달이 지날 무렵에야 효험 있는 약을 만났다. 기원정사의 처사가 억새 뿌리를 달여 먹으라고 했다. 천식에는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마라도에는 억새가 지천이었고, 이 억새는 또, 다른 곳의 억새와는 성분이 다른 모양이었다.

이후 기관지가 약하다는 사람들에게 억새 뿌리 이야기를 여러 번 하기도 했고, 마라도 억새를 캐서 택배로 보내준 적도 있는데, 다른 곳의 억새는 효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바닷것이나 땅의 것이나 마라도의 풍토가 남다른 것은 확실했다. 기침하다 죽거나, 만성 천식 환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무섭도록 괴롭히던 증세가 마라도 억새 뿌리를 달여 먹으니, 눈에 띄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 안 가 기침이 멎었고, 그 이후로도 기침 증세가 보일라치면 당장 억새 뿌리를 캐와 물을 끓여 마시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시나브로 완전히 기침에서 해방되기에 이르렀다.

나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마라도에 나를 적응시키느라 하루가 일 년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사내가 계획한 대로 일이 도모되기를 기다렸다. 사내의 구체적인 계획을 알 수 없었기에 속이 타면서도 쉬 물어보거나 재촉할 수 없었다.

사내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성정이 거칠지는 않아도, 몹시 무심하고 무뚝뚝하다. 물론 연애 때는 전혀 몰랐다. 묻기 전에 먼저 일러주거나 모르는 것을 조곤조곤 설명해주는 법도 없었다. 사내로부터 어떤 대답을 들으려면 스무고개를 해야 한다. 한두 마디 질문이면 끝날 간단한 이야기도 복잡다단하게 만드는 재주가 비상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화딱지가 나게 만드는 것은 고개 흔들기다. 그는 '아니다'와 '모른다'를 구분하지 않았다.

그러니 오해가 생기기 일쑤였고, 그 고개 흔들기가 '아니다'와 '모른다' 둘 다 뜻할 수 있으니, 꼭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사내가 내 질문에 고개부터 흔들고 나오면 나는 짜증부터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아, 그냥 말로 해!" 물론 연애 때는 전혀 안 그랬다. 그리고 물론 지금은 아주 많이 개선되었다. 살아남으려면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도 별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준비는 더디게 더디게 진행되었다. 내부 주방을 개조할 수 없어 외부에 화구를 놓을 자리를 만들고, 면을 삶을 솥과 면을 씻을 중고 싱크대를 어렵사리 들여놓고, 비가 들이치지 않도록 비닐을 치고 하는 일련의 일들이 아주 더디게 진행되었다. 나중에야 깨달은 바지만, 그것은 마라도라는 섬이 갖는 특수하고 불편한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내는 게을렀고, 박자가 느렸고, 추진력이 모자랐다.

한 가지 일을 진행하는 데 시동이 걸리는 시간이 길고도 길었다. 어떤 경우에는 일단 시작만 하면 후다닥 해치우기도 하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는 한, 아니, 발등에서 불이 타고 있는데도 미루고 미루는 것이 일상이었다. 여행을 다니고 놀러를 다닐 때는 바지런하고 민첩하고,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김밥을 싸는 적도 많더니, 일 앞에서는 정반대였다.

게으름뱅이 사내 때문에 늙어버린 나

남편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남편이 음식을 만들고 있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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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여러 해를 살다 보니 나중에는 어떻게 하면 일을 미룰까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내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행동이 느린 것도 아니고, 일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럴까,라고 나는 5년, 6년을 해답을 찾으며, 질문하고 다그치고 대답을 기다리느라 천불이 났고, 그만큼 팍팍 늙어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게으름이었다. 사내는 게으름 대마왕이었다. 경상도 말로 '깨을받았다'. 그 성정대로라면 석 달 안에 짜장면 장사를 시작한 것이 경이로운 일이라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복수를 해야 했으니, 자신의 응어리가 그래야 풀리니, 그나마 빠르게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 쓰는 성란 언니가 사내의 군살 하나 없는 뒤태를 보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느니 하며 내린 진단은 완전 헛짚은 것이었다. 그건 그냥 체질이고 집안 내력이었다. 실내에 들어가면 앉아 있는 법이 없이 거의 모로 누워서 지냈다. 그 자세로 한 팔을 괸 채 흐트러짐 없이 두어 시간 잠도 잤다.

그런 사내의 게으름에 준하자면 배가 불룩 나오고 엉덩이살도 두리뭉실 쪄서 허리띠에 배가 씹히거나 비스듬히 걸리는 전형적인 사십대 아저씨의 몸매여야 하지만, 이 집안의 외모 유전자는 상당히 축복받은 축에 속했다. 당시에는 거의 매일 오겹살을 먹었다. 마라도살이 15년이 지나니 회는 물릴 대로 물려서 민박 손님이 으레 알아서 챙겨오는 오겹살을 소주 안주 삼아 먹는 것이 사내의 낙이었다. 밥도 한 끼에 기본 세 그릇이었다. 그런데도 뱃살이며 군살이 하나도 없다. 갯바위 낚시가 힘을 아주 많이 요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기럭지만 긴 우월한 인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렇게 어렵사리 설비를 마치고도 짜장면집은 문을 열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따져 물었다. 이번엔 문제가 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면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면을 당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안이 없었다. 짜장 소스 만드는 건 보고 왔어도, 면 반죽하는 건 못 봤다. 반죽이 다 된 밀가루 덩어리를 제면기에 밀어 넣고 가늘게 뽑아내는 것만 봤다. 그래서 제면기는 사다 놨다. 반죽기는 안 샀다. 제주에서는 반죽기 파는 데가 어딘지도 몰랐고, 아는 데라곤 부산 어디였다. 그걸 사러 부산까지 갔다 오는 일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면에 대한 계획이 있긴 했다. 톳을 넣자는 것이었다.

마라도에 흔해서 마라도의 특산물이 된 톳을 이용하자는 계획은 아주 근사했다. 마라도 톳은 마라도 물고기가 그렇듯이 제주 본섬이나 가까운 가파도 톳하고도 달랐다. 모양도 조금 다르게 생겼고, 영양면에서 월등히 뛰어나 톳을 콩나물 먹듯 먹는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단다. 또한 해녀들의 재산으로 묶여 있어서 마을 사람이라고 해도 집에서 먹을 소량 외에는 채취도 할 수 없었고, 해녀들이 딴 톳은 수협에서 사들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한다. 그래서 마라도 톳은 제주 본섬에서도, 육지에서도 구경조차 못한다.

그런 톳을 가루로 만들어 면에 집어넣는 것은 전례가 있었다. 마라도 기원정사의 본 절인 부산 문수사에서 톳국수를 만들어 팔아오고 있었다. 그걸 벤치마킹하여 이왕 하는 거 마라도답게 특색 있게 하자는 계획이었는데, 문제는 그 톳면을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해도 내가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 먼 거리를 오가며 취재하고 기사 쓰는 일만도 벅찼으니, 그냥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라고 모든 걸 맡겨 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내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나더러 해보란 소리도 없었다. 그저 갑갑한 표정만 짓다가 시간 되면 낚시하러 휭하니 사라졌다 고기 몇 마리 잡아서 나타났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회 떠 주는 고기나 받아먹으면서 청탁 끊어질세라 시나 열심히 쓰면서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아무리 봄이 오는 소리를 따라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해도 조급해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답답한 걸 못 견디는 이놈의 성미가 사내가 모르는 척 흘려놓은 미끼를 결국 덥석 물어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와 톳가루와 소금과 소다를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반죽을 했다. 칼국수 같은 반죽도 해본 적이 없고, 전도 혼자 준비해서 부쳐본 적이 없던 내가 면을 만든답시고 밀가루를 주물럭거리고 있자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냐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해내고 말리라는, 못 할 거 뭐 있냐는 오기가 스멀스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죽기도 없이 맨손으로 톳을 조금 넣었다, 많이 넣었다 해가며 수없이 치대고 치댔다. 어디서 본 것은 있어 가지고 그렇게 치댄 반죽을 냉장고에 넣어 저온숙성도 해보았다. 생각보다 결과가 빨리 드러났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도 모르는 내 감이 좋았던 건지 적당한 톳의 양을 알아내는 데 많은 날이 걸리지는 않았다.

마라도 자연주의 짜장의 서막

마라도 특산물인 '바다의 산삼' 톳. 일본으로 전량 수출되어 국내에선 구경하기도 어려운 귀한 몸이다.
 마라도 특산물인 '바다의 산삼' 톳. 일본으로 전량 수출되어 국내에선 구경하기도 어려운 귀한 몸이다.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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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나의 면장 인생이 시작된 것이었다. 사내는 서로가 생각지도 못한 흡족한 결과를 가지고 나를 마구 추켜세우며 면장 자리에 앉혀 버렸다. 자신은 도저히 그럴 능력이 없으니, 면은 네가 책임져라, 뭐 이런 식의 말들이었던 것 같다. 그때 개발은 개발이고, 실전은 실전이니 그만 물러나겠다며 레시피를 던져줘 버렸어야 하는 건데, 나 스스로도 내가 놀랍고 대견스러워 그 자리를 꿰차고 앉아 버린 것이 내 인생의 족적을 백팔십도 바꾼 결과를 낳고야 말았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우리의 톳면이다. 물론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수입밀을 사용했고, 식소다도 조금 들어갔다. 으레 그래야 반죽이 된다고 알았던 탓인데, 이 소다가 소화불량의 원인이 되는 첨가물이라는 것을 얼마 안 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다를 빼보기로 했다. 면은 소다를 넣었을 때나 뺐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 톳을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은 소다가 필수인지 모르겠지만, 톳면은 톳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톳짜장면
 톳짜장면
ⓒ 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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톳은 영양도 뛰어난 데다 그 성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중에 우리밀로 바꾸었을 때도 톳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대개 우리밀은 글루텐 함량이 떨어져서 반죽이 어렵고, 그 중에서도 밀도가 높은 면은 빵보다 더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밀을 쓰고 싶어도 찰기가 없이 잘 끊어진다는 한계 때문에 쓰지 못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톳은 수입밀이든 우리밀이든 약간의 비율만 달리 해주면 큰 차이가 없게 만들어주었다. 그야말로 신통방통한 녀석이었다. 그에 관한 과학적 데이터가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이 면 때문에 병원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반죽기 없이 손으로만 치대다 보니, 손목 인대에 무리가 간 것이었다. 물혹도 생겨 손목 위로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데, 새벽녘에 극심한 통증이 몰아쳐 오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매일 비명소리와 함께 잠을 깨야만 했다. 그럼에도 침이라도 맞아보려고 한의원까지 가는 데 많은 날이 걸렸다.

여기서 또 우리 무심한 사내가 등장해 주신다. 사내는 비명소리에 같이 잠이 깨서 얼결에 내 손목을 몇 번 주무르다 다시 잠이 들곤 했는데, 그것이 전부였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을 때 정석은 이런 것이겠다.

"병원에 같이 가보자." 그도 아니면 "병원에 갔다 온나."

나는 기다리다 못해 혼자 병원을 가겠다고 나섰으며, 사내는 '그럼, 그러든지'라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그나마 남편이랍시고 모슬포에서 차를 몰고 제주시까지 가는 빠른 길을 그려주었으나, 그 길 따라 가다 삼천포로 빠질 뻔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서글프고 막막해서 엉망진창이었는데, 사내의 약도는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운전하면서 그 화를 삭이느라 얼마나 한숨을 뱉어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한의원을 오가며 침을 맞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두 달 정도 걸렸고, 그 사이에 상해 버린 인대를 어찌할 수 없으니, 사내는 부산에 올라가 반죽기를 사들고 내려왔다.

바야흐로 마라도는 봄 손님들로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자연주의 짜장 역사의 서막은 그렇게 막을 올렸다. 2008년 3월이었고, 마라도에서 세 번째로 문을 여는 짜장면집이었다.

○ 편집ㅣ장지헤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경제매거진 '이코노믹리뷰'에 연재해 오고 있는 것으로 그 열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짜장면이라는 음식을 통해 자연주의를 실현하고자 우리 부부가 지난 7년 동안 고군분투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낸 글입니다. 오마이뉴스에 뒤늦게 연재를 하고자 문을 두드렸는데, 앞의 열한 가지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들려드릴 수가 없어 다소 연결이 안 되고 생뚱맞을 수는 있지만, 열두 번째 이야기, 그러니까 마라도에서 짜장면집을 연 그 시점부터의 이야기를 싣기로 합니다. 이 글은 이코노믹리뷰 온라인 판 7월 28일자에도 중복게재됩니다. 현재 '마라도에서온자장면집'은 마라도가 아니라 서귀포시 화순에 있습니다.



태그:#자연주의음식, #자연주의짜장면, #마라도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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