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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도 꽃이 핍니다. 작물에 따라 봄이나 여름에 또 가을에도 꽃을 피웁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작물은 꽃을 피워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우리 인간에게 소중한 먹을거리를 주고, 더 많은 자손을 퍼트리기 위해 종자를 만듭니다.

가을에 꽃피는 작물은 뭐가 있을까요? 가을에 거두는 작물은 대개 단일식물들이 많습니다. 들깨, 서리태와 같은 단일식물은 점점 해가 짧아지게 되면 꽃을 피웁니다. 때를 감지하고 꽃을 피우는 자연의 이치가 참 신비스럽습니다.

상쾌한 아침의 가을 들녘

9월 들어 해도 짧아지고 일교차도 심합니다. 동이 트는 이른 아침, 아내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립니다. 목표지점은 양도면 건평포구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까지입니다.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나루 옆 쉼터에는 우리 고장 출신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나루 옆 쉼터에는 우리 고장 출신 한상억 작시, 최영섭 작곡의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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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없는 들길에 소슬바람이 붑니다. 바람에 벼이삭들이 출렁이며 춤을 춥니다. 보기에 참 좋습니다.

아내와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넓은 길에선 나란히 달립니다.

"여보, 언제 이렇게 들판 색깔이 달라졌죠?"
"그래, 하루하루가 다르지!"
"나락모가지 쑤욱 올라와 벼꽃이 핀지가 엊그제 같은데…."
"당신, 벼꽃을 다 알아?"

아내는 자랄 때 부모님 일을 도운 농부의 딸인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며 핀잔을 줍니다. 벼꽃을 다 모를 거냐면서요.

 요즘 들길은 황금벌판으로 물 들어가고 있다. 바라 보이는 산이 마니산이다.
 요즘 들길은 황금벌판으로 물 들어가고 있다. 바라 보이는 산이 마니산이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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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벼꽃이야기를 하면 벼에도 꽃이 피냐고 할 것입니다. 벼는 하지 지나 낮의 길이가 짧아지면 꽃눈이 생기는 단일식물의 일종입니다. 또, 온도에 따라 이삭 패기가 빨라지기도 합니다. 벼꽃은 피는 지도, 지는 지도 모르게 피웁니다. 길게는 한 나절, 짧게는 한 시간여 동안 벼꽃이 열렸다가 꽃가루를 쏟아 붓고 닫습니다. 제 꽃가루받이를 통해 씨앗을 잉태시키고 떨어져버리는 것이죠.

씨앗을 잉태한 나락이 익어 가면 고개를 숙입니다. 고개 숙인 벼이삭에서 겸손의 미덕을 배웁니다. 알이 여문 나락들은 황금들판을 이룹니다. 수고하고 땀 흘린 농부는 황금벌판을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고 합니다.

 키다리 수수밭은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일렬로 늘어서서 열병식을 하여준다.
 키다리 수수밭은 자전거 타는 사람에게 일렬로 늘어서서 열병식을 하여준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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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판의 주연은 고개숙인 누런 나락이고, 조연은 수수 같습니다. 하천변, 논둑길에 심어놓은 수수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바람에 휘청휘청합니다. 잘 가꿔놓은 수수밭이 참 멋있습니다. 열병식을 하는 것처럼 일 열로 쭉 늘어선 키다리 수수밭길을 달릴 때는 가을 속으로 들어갑니다. 가끔 수수알을 탐내다 들킨 참새 떼들이 화들짝 놀라 도망갑니다.

혼비백산 줄행랑치는 참새 녀석들에게 아내가 소리 지릅니다.

"녀석들! 아무리 배고파도 농부님들 수고나 알고 쬐끔만 먹어라!"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전거도로로 접어듭니다. 우리 동네는 해안도로를 끼고 자전거길이 닦여졌습니다. 자전거도로에서 자전거 타기는 정말 좋습니다. 지나가는 차량에 신경 쓰지 않고 씽씽 달릴 수 있습니다. 논길 콘크리트보다 타이어 탄력도 좋습니다. 해안가 바닷바람의 선선함이 가슴속 깊이 파고듭니다. 이런 상쾌함이 있어 우리는 매일 자전거를 즐겁게 타는 지도 모릅니다.

산모퉁이를 돌아 오르막길입니다. 이곳을 오를 때는 숨이 턱에 찹니다. 처음 자전거타기를 시작할 때는 이곳에서 힘에 지치면 도중에 끌고 갔습니다. 이젠 엉덩이를 들고 힘차게 페달을 밟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질 때쯤 되면 내리막길입니다.

 오르막길에서의 아내.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운동량이 많다.
 오르막길에서의 아내. 숨이 턱에 차오르지만 운동량이 많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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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리막길은 자전거 탈 때 신이 난다. 조심해야 한다.
 내리막길은 자전거 탈 때 신이 난다. 조심해야 한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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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길에도 오르막, 내리막이 있습니다. 힘들게 오르막에 오르면 반드시 쉽게 내려가는 내리막이 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고 열심이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있습니다.

나는 아내한테 오르막을 지날 때마다 늘 주의를 당부합니다.

"오를 때는 힘차게, 내려갈 때는 천천히! 조심해! 브레이크 잘 잡어!"

세상이치도 그러할 겁니다. 정상을 향해 달릴 때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리막에선 겸손하고 더 조심해야 합니다.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지요. 나는 경사 큰 내리막길에는 천천히 달리자고 합니다.

내리막을 다 내려오고 아내가 뜬금없는 말을 겁니다.

"여보, 이제 우리도 인생의 내리막인가? 산 날보다 살 날이 많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렇기도 하지. 그래 사는 동안 건강해야하는 거야. 건강은 아무도 지켜주지 않으니까!"

내리막길은 수월하게 내려오기도 하지만, 인생의 여정에서 보면 서글픈 일입니다. 반환점을 돌아선 내리막은 삶의 끝이 다가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오를 때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고, 내리막을 대비해야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죠.

앞에 가끔 만나는 어느 부부가 다정히 아침 걷기운동을 합니다. 우리는 서서히 속도를 늦춥니다. 살짝 비켜주는 고마움에 "미안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

'그리운 금강산' 가곡 노래비에서

우리는 어느새 건평포구를 지납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건평나루 쉼터입니다. 쉼터는 양도어판장에서 가깝고, 해질녘 일몰조망지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입니다. 쉼터에 그늘막이 있고, 여러 운동기구가 갖추어져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도 만납니다.

 이른 아침 건평포구. 양도 어판장이 있다.
 이른 아침 건평포구. 양도 어판장이 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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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평나루 쉼터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여러 가지 운동기구와 자전거 보관대가 설치되었다.
 건평나루 쉼터에는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다. 여러 가지 운동기구와 자전거 보관대가 설치되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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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는 먼저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화남(華南) 고재형(高在亨 1846-1916) 선생의 심도기행(沁都紀行)의 한시 한 수가 보입니다. '건평동(乾枰洞)'이란 시가 글 판에 새겨있습니다.

名是乾坪卽水坪(명시건평즉수평) … 이름은 건평인데 물 많은 수평인가,
滿堰春派灌稻粳(만언춘파관도갱) … 뚝에 가득 봄물 차니 논에 물을 대기 좋다.
且畊且讀諸君子(차경차독제군자) … 밭 갈면서 책 읽은 이 모두가 군자이니,
聊得斯中一味淸(요득사중일미청) … 그러한 가운데서 맑은 기운 얻는다.

 화남 고재형 선생의 한시 '건평동'. 이른 아침, 시 한 수를 음미한다.
 화남 고재형 선생의 한시 '건평동'. 이른 아침, 시 한 수를 음미한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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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도기행은 화남선생 자신이 태어난 불은면 두운리 두두미마을에서 출발하여 17개면 100여 마을을 필마(匹馬)로 섭렵하며 쓴 기행 시문이지요. 심도는 강화의 옛 지명입니다.

붉은 해 솟는 포구에서 시를 읽으며 맑은 정신을 가다듬습니다. '밭 갈면서 책 읽는 사람은 모두 군자'라는 구절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깨우칩니다.

아내는 어느새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앞에 섰습니다. 쉼터에는 우리에게 널리 사랑받는 가곡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있습니다. 작사가, 작곡가 모두 우리 고장 강화출신이어서 이곳에 노래비를 세운 것입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강화 양도면 출신 한상억 선생이 노랫말을 짓고, 화도면 출신 최영섭 선생이 곡을 붙였습니다.

아내는 벌써 노래비 약보를 보며 '그리운 금강산'을 흥얼거립니다. 노래를 천천히 부르다 뭐가 의심스럽다는 듯 내게 묻습니다.

"여기 첫 대목 '누구의 주재런가' 했는데, '주제련가'가 맞는 거 아닌가요? 강화평화전망대 노래비에서는 '주제'였는데…."
"나도 궁금했어! 그런데 여기 나온 '주재'가 원래 맞대!"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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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리운 금강산'의 첫 대목 '누구의 주제련가'는 작사가의 노랫말에는 '누구의 주재런가'였다고 합니다. '맡아서 관장하다'라는 뜻의 주재(主宰)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작사가 한상억 선생의 의도는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고운 명산을 만들어냈겠느냐'는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늘이 아름다운 금강산을 주재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처음 악보집이 나올 당시 '주제'라고 잘못 인쇄되어 나온 바람에 그대로 부르다보니 굳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참 우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서 아내는 노래비에 나온 첫 소절대로 다시 부릅니다.

'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산 그리운 만이천봉 말은 없어도'

"여보, 그만 흥얼거리고 어서 가자구! 당신, 집에 가서 출근 서둘러야지?"
"어머 벌써 시간이! 그나저나 금광산관광이나 재개되면 좋으련만…. 그래, 출발합시다."

우리는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누런빛 가을색으로 다시 빠져듭니다. 돌아오는 내내 '그리운 금강산'을 흥얼거리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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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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