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광주 양림동은 버드나무 숲으로 덮인 마을이다. 그래서 양림동(楊林洞)이다. '서양촌', '광주의 예루살렘'으로도 불린다. 일찍이 1904년부터 미국에서 오웬 등 선교사가 들어와 광주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심상치 않은 곳이다. 선교사들은 우선 수피아여고, 제중병원부터 세우며 선교는 물론 근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래서 양림동에는 대형교회만 6개가 있고, 약 65%의 주민이 교인이다. 일종의 종교촌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마을의 근대화역사 때문인지 1960년대 초까지 양림동은 단연 광주 지역의 문화·예술 중심지였다. 광주지역의 부호, 명사들도 살기좋은 마을, 양림산 기슭에 터를 잡았다. 광주시 문화재로 지정된 최승효 가옥, 이장우 가옥 등이 100년 넘게 그 자리를 아직 지키고 있다. 정율성 생가도 빼놓을 수 없다. 광주가 낳은 항일운동가로서 중국에서는 최고의 인민 음악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의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됐다.

그밖에 유형, 무형의 근대문화유산은 마을 곳곳에 산재해있다. 1914년 네덜란드식 벽돌쌓기로 지어진 오웬기념각, 그 옆에 광주 최초의 교회 양림교회, 호남신학대의 우월순(wilson) 선교사 사택 등이 양림동의 무게를 잡고 있다. 가히 마을 자체가 근대 문화역사의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근대 광주를 더듬어 보려는 탐방객들에게 양림동은 각별하다. 60~70년대의 모습과 흔적이 도처에 살아있다. 특히 천천히, 또는 느릿느릿 걸어가며 발바닥으로 느끼는 골목골목의 질감은 저마다 의미와 재미가 있다. 걸음걸음마다 힘겨웠던 시절, 어린 날의 애틋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시간여행의 참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다. 

-
▲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양림동의 '마을만들기'는 안녕한가 

이런 범상치 않은 양림동을 광주시도 알아봐 준다. 광주의 대표마을로 꾸미고 있다. 2008년부터 2016년까지 307억 원의 큰 돈을 투자해 양림역사문화마을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좋아하거나 반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돈이 잘 못 쓰이고 있다는 불만과 비판이 적지 않다. 문화프로그램이나 스토리 텔링 같은 운영에 대한 계획이나 대안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토건사업에만 치중돼 오히려 양림동의 가치와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소중한 역사적, 문화적 흔적이 사라지고 지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순교자기념공원 조성, 역사문화마을 관광자원화 개선사업, 양림길 관광코스 개발 등이 주요 사업이다. 주로 커뮤니티센터, 주차장 등 시설을 건축하고, 도로 포장, 공공디자인 등 경관을 꾸미는 작업들이다. 그런다고 보행환경이 개선되거나 주민의 경제생활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니라는 평가다. 주로 외부 탐방객들의 볼거리, 구경거리로 만들려는 목적에 충실한 결과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양림동에 사는 내부 주민들의 생활의 질을 높이려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무엇보다 마을주민들의 참여도가 낮은 게 문제다. 양림동 마을만들기에 행정과 전문가 용역업자만 있고 주민은 없는 형국이다. 특히 주차장 조성 부지에 남아있던 한옥 폐가 10여 채를 살리지 못하고 철거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얼마든지 예술가들의 레지던시 공간이나 갤러리, 공방으로 재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동산 업자 등 일부 주민들의 민원에 밀려 애초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되살리겠다는 사업 목적과 방향이 왜곡된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양림동 마을문화 공동체 '굿모닝양림'의 한희원 추진위원장은 개탄을 금치 못한다. "한옥폐가를 리모델링해 양림동을 상징하는 문화역사적 인물 하나하나를 조명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짙은 아쉬움을 토로한다. "광주시 등 행정에서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과 상관없이 그저 행정적, 토건적 사고로 '전혀 양림동 스럽지 않은' 시설물을 짓는 데 급급했다"며 비판한다.

-
▲ 한옥을 재생한 한희원미술관 -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양림동에 대한 헌사, 마을미술관

마침내 양림동의 원형과 순정을 지키려고 한희원 위원장은 사재를 털었다. 평소 양림동에 역사문화공간은 있으나 살아있는 문화예술공간이 없어 허전했다. 그래서 양림동의 문화와 역사와 인물을 되살리려고 본인이 직접 뛰어들었다. 대지 50여 평, 건물 25평의 동네 한옥을 '한희원미술관'으로 재생시킨 것이다. "골목길 안에 서민들의 삶과 연관되는 예술적인 공간들이 많이 들어섰으면 좋겠다"는 평소의 바람과 지론을 결행한 것이다.

한희원 위원장, 아니 한희원 화가에게 양림동은 고향과 같은 곳이다. 태어난 곳은 송정동이지만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왔다. 월남한 교사이자 시인인 아버지가 전라남도 각지 학교로 전근을 다니다 양림동에 정착한 것이다. 첫 직장을 얻을 때까지 이곳을 지켰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오롯이 양림동에 바친 것이다.

그에게 양림동은 미래에 화가가 될 그의 성장통을 돌보고 보살펴 준 공간이다. 화가가 양림동을 대하는 추억과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게 한희원미술관은 "소년 한희원, 청소년 한희원 그리고 청년 한희원에게 오랫동안 예술적 자양분을 아낌없이 줘서 마침내 화가로 키워준 양림동에 대한 헌사"의 의미다. 

"양림동은 광주에서 기독교를 통해 처음 근대화가 시작된 곳이죠. 그래서 그런지 김현승 시인, 문순태 소설가, 조아라 선생 등 지식인들과 예술인들이 많이 모여 살았어요.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들 가운데 '양림동 언덕 위의 교회'(양림 웃교회) 출신들이 많기도 하고요. 우리는 그들이 추구하고 실천하던 사랑과 위로, 예술을 '양림정신'이라고 부르죠. 그런 양림정신이 배어 있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고 싶었어요. 비록 골목안 작은 집이지만 양림동 주민들과 광주시민들이 문화와 예술을 체험할 수 있는 '문화의 실핏줄' 같은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한 화가는 이미 '굿모닝양림'을 중심으로 양림동 마을축제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돈을 벌려고 상업적인 장사꾼들이 기웃거리는 축제는 지양한다. 전시적으로 시설 개발만 하려는 행정, 상업적 이익을 욕심 내는 주민, 마을을 모르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축제는 마을을 망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2011년부터 술과 음식이 없는 동네 축제를 운영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을 배제하고 1만여 명 이상이 찾는 인문과 예술의 축제로 정착시키고 있다.

'아름답고 시적인 민중미술화가' 한의원.
 '아름답고 시적인 민중미술화가' 한의원.
ⓒ 정기석

관련사진보기


'아름답고 시적인 민중미술 화가', 한희원

한 화가는 고교 때까지만 해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공인 3단의 태권도 선수였다. 그런데 당시 태권도 특기자로 갈 만한 대학이 없었다. 재수를 하면서 국문학도를 지망했다. 시인인 아버지와 목사인 큰아버지(한경직목사)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기본적이 소양은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하고 습작하기 시작했다. 지금 화가 뿐 아니라 시인으로 대접받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 또 실패한다. 실의에 빠져있던 그에게 대학생이던 누나가 그림을 권유했다.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고 오승윤 화백의 화실을 찾아가 운명적으로 그림을 만났다. 1년간 그림에 미친듯 푹 빠져 지냈다. 드디어 자신의 길을 찾은 것이다. 이듬해 조선대 미대에 당당히 합격했다.

한 화가의 화풍은 다분히 '양림동' 스럽다. 그가 자란 양림동의 역사나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 4학년 때인 1978년 양림교회 지하에서 가난한 민중들의 모습을 그렸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몰두해 폭 5m의 대형그림을 창작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그림이다. 평론가들은 '민중미술의 시초'로 평가한다. 올림픽이 열린 1988년부터는 광주미술인공동체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주로 민중미술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대는 힘든데 왜 화가들은 태평스럽게 이쁜 풍경이나 꽃만 그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다 제대하고 순천여상에서 교사로 부임해 '찾아가는 미술관'을 시작했죠. 트럭에 그림과 화구를 싣고 광양장, 화개장, 구례장, 순천장 등으로 현장의 민초들을 찾아다니는 '장터전'을 3년 넘게 했어요. 민생고에 시달리는 민초들의 삶의 뿌리를 찾아다닌 거죠."

하지만 걸개그림이나 현장미술은 의도적으로 피했다. 리얼리즘을 하더라도 예술적인 향기가 있는 '아름다운 민중미술', '시적인 민중미술'을 지향한 셈이다. 그렇게 민초의 현장에서 창작한 그림 150점을 트럭 3대에 나눠싣고 서울 중앙화단에 입성한다. 미대 졸업 14년만인 1993년이다. 첫 전시회였는데 화단에서는 "시적인 느낌과 광활하고 쓸쓸한 고독이 배어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대성공이었다.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아름답고 시적인 민중미술'을 지향하는 화가는 고흐, 베토벤, 도스토예프스키, 이중섭을 좋아한다. 존재에 대한 예술은 하는 선인들이라 그렇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리라"는 믿음을 주기 때문이다.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작품은 '여수로 가는 막차'다. 보고 있으면 아름다운 시나 노래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림이다. 박완서 소설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민병일 시인은 이 그림에 같은 이름의 시 '여수로 가는 막차'를 지어 바쳤다.

그리움이 총총히 빛나는 밤하늘에
기적 소리 물듭니다

노오란 별무리 무너져내릴 듯 서성이는데
수줍어 하는 처녀 앞가슴 닮은
남도 봉우리와 능선 사이로
하얀 등불 밝힌 밤기차 들어섭니다

사연많은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싣고
자식일 농사 걱정에 두런대는

마을 불빛따라 개 짖는 소리 따라
그리움 찾아 잠못 이루는

기찻길 따라 눈물방울 같은 밤기차 달려갑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양림동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