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설이면 자연스레 오가는 인사말일 겁니다. 설을 맞아 가까운 이들에게 진솔한 마음을 드러내는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설날에 쓰는 편지', 지금 시작합니다. [편집자말]
내가 어머니께 글을 띄우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 번은 막 세상을 떠나시고 사모제(思慕祭) 때(2006년 2월 17일)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남긴 글이다. 우리 어머니는 글을 해독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으니, 살아생전에 내가 굳이 어머니께 편지 보낼 일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모제를 마치고 집에 와서 나는 <'어머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이렇게 적어 내려갔다.

"새해 설을 넘기고 아흔여섯 해를 살아온 어머니께서 정월 대보름을 이틀 남겨두고 해 뜰 무렵 고달픈 삶의 여정을 모두 끝내고 조용히 영면하셨다. 지난 추석 때는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달포가 지나 뵈었더니 막내아들인 나를 일아 보지 못했다.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러고는 나더러 고향집에 좀 데려 달라고 졸랐다. 여기(구미 큰형님댁)는 적막해서 못 살겠다면서 혼자 장롱 속의 이불을 챙기신다. 막내아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졸라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억장이 무너졌다."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막내아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님 회갑 잔치 날 고향집 마당에서 회갑잔치상 앞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 아버님 회갑 때 '회갑 상'을 받은 아버지와 어머니(1959년) 아버님 회갑 잔치 날 고향집 마당에서 회갑잔치상 앞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꼭 10년이 지나 그 설을 앞두고 지금 두 번째 글을 띄운다. 어머니는 6.25 한국전쟁 때 여섯 살 난 내가 고된 피난길을 걸어서 갔다 온 후에, 그게 무리가 돼서 약 한 달간이나 걷지도 못하고 방에 산통으로 누워있었던 걸 몹시 애처로워하셨다. 당신께서 나를 업고 마당 건너 아래채에 떨어져 있는 화장실(내 어릴 때는 '정낭' 혹은 '통시'라 했다)까지 데려다줄 정도였다.

그러고 이듬해 늦봄 어느 날, 낙동강 건너 땅콩 심으러 아버지와 형들이 일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려고 강변까지 갔다가 되돌려 보내서 혼자 그냥 돌아왔다. 그 길로 집에 와서 혼자 놀던 중 폭발물 사고로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는 마당에서 누에 뽕잎을 따고 있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 놀라셨단다. 그때 사고로 나는 오른손 손가락 세 개를 잃고 말았지만, 그나마 그 손으로 글씨는 쓸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나는 어릴 때 6.25 한국전쟁을 된통 온몸으로 겪고 용케 살아남은 게다.

5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릴 때에 이런저런 고비를 넘긴 탓에 어머니께서 설 명절 때마다 내 설빔만은 마음먹고 챙겨주셨다. 설날 새 옷을 입고 동네 어른들께 세배하러 나가면, "설 치레는 종마이(내가 종말이라고 어릴 때는 '종마이'라 불렸다) 네가 제일 잘했다"고 마을 사람들이 치켜세워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더 신이 나서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게 모두 내 바로 위에 태어난 누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어머니께서 바라지도 않았는데 생긴 아들)인 막내 종말이를 어머니가 끔찍이도 챙겨준 탓이다. 내 위에 셋째 형이 나보다 열한 살이나 많아, 그 위로 형들도 모두 한참 나이가 어린 막냇동생인 나를 귀여워했다. 형들에겐 퍽 엄하시던 아버님도 막내아들에게는 비교적 인자하셨다. 이처럼 나는 가족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탓에 칠순에 접어든 지금도 '심신'(心身)이 함께 건강한 편이다. 사람은 뭐니 해도 사랑을 먹고 자라야 한다.

"우리 대통령 오시는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0년 전 쯤 찍은 영정사진.
▲ 어머니 박봉석(1910~2006)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10년 전 쯤 찍은 영정사진.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어릴 적에는 누구나 그랬지만, 설날은 내가 밤마다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1950년대의 농촌은 모두가 가난했지만, 설 명절 음식 준비는 차근차근 형편에 맞춰 미리 준비를 해놨다. 그 준비과정에서 이미 설은 내 마음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던 게다. 설을 약 20일에서 보름 정도 앞두고 미리 쌀을 쪄 양지바른 곳에 늘어놓고 말린다. 그 무렵 동네 어귀에 뻥튀기하는 사람이 와서 자리를 잡으면, 나는 어머니를 졸라 쌀 밥상을 엄청 푸짐하게 튀겨 놓는다.

설 며칠 전부터 추운 날을 택해 어머니는 강정을 만드는데, 쪄 말린 쌀을 볶아 노릿한 강정을 해놓으면 바삭바삭 씹는 맛이 일품이다. 특히 어머니가 마음먹고 만들어 놓는 땅콩강정과 깨강정은 다른 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명품이었다. 나는 특히 땅콩강정을 좋아해, 다락 깊숙이 넣어 놓은 걸 몰래 시도 때도 없이 내어 먹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다락에 쥐 들락거리듯 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고 그냥 넘기신 거다. 

세월이 한참 지나 내가 대학 졸업할 무렵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나는 방학 때 집에 가면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랑 나랑 셋이서 함께 잠을 잤다. 막내인 나는 그때까지도 추우면 어머니 가슴 속을 파고들곤 했다. 한동안 어머니 혼자 고향집에 계실 적에 내가 주말에 가끔 집에 가면 어머니는 "우리 대통령 오시는가!"라면서 마당까지 나와서 나를 반겼다.

혼자 외로이 사시던 어머니께 나는 대통령처럼 귀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던 게다. 그 후 어머니는 부산 큰형님 댁으로 옮겨서 사시다가 형님이 직장을 정리하고 구미로 오자, 그 길로 구미에서 생을 마치셨다. 원래 내가 태어난 고향은 구미에서 10리쯤 떨어진 낙동강가의 '평촌'이라는 마을이었다. 그 평촌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그토록 가고 싶어 한 '우리 집'이다.

내가 결혼한 후로는 어머니께서 한 번씩 우리 집에 와서 며칠 동안 계시곤 했지만, 나랑 함께 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모님은 아들도 없었고 건강이 좋지 않은 터여서 한동안 우리 집에 와 함께 살았다. 한 번은 어머니가 오셔서 두 분이 함께 아파트 경로당에 갔다가 저녁때가 돼 두 분이 정겨운 모습으로 돌아오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지금은 두 분 모두 고인이 됐지만, 그 장면을 떠올리면 참 보기 좋았다는 느낌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어머님 계시는 그곳은 만날 설날 같지 않을까

내 결혼식(1973년 4월 13일) 때 양가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내 왼쪽에 어머니께서 서 계시다.
 내 결혼식(1973년 4월 13일) 때 양가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 내 왼쪽에 어머니께서 서 계시다.
ⓒ 김병하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내가 그런 느낌을 굳이 한 번씩 회상하는 건 두 분을 살아생전에 정성 들여 모시지 못한 내 심층의 죄책감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나는 영정 사진을 서재에 두고는 어디 출장이라도 가면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올리곤 했다. 어쩌다 집사람이 내가 그러는 걸 보고 너무 그러지 말라고 조용히 일러줬다. 그러는 동안 불심이 강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나는 60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부쩍 불학(佛學) 쪽에 관심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나는 늘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신 어머니를 두고 "내 어머니가 곧 부처다"라는 생각을 굳혀가게 됐다. 그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곧 부처'라는 데까지 와 닿는 걸 알고는 참 신통하게 여겼다. 원래 불교에서는 내가 곧 부처라는 불퇴전의 믿음을 뭣보다도 중시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런저런 연기(緣起)로 얽혀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어머니가 생전에 불심으로 사셨으니 집사람이 내게 사십구재(四十九齋)를 올려 드리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으나, 막내며느리가 시어머니를 위해 불공 드리겠다는 데 아들인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게다.

어머니 산소와 가깝고 외가 쪽과 깊은 인연이 있는 해평 도리사(桃李寺)에서 어머니 사십구재를 올리기로 했다. 그로부터 나는 차츰 절 문화에 친숙해졌다. 그해 여름 나는 이홍우 교수가 멋지게 해석한 <대승기신론통석>(2006)을 우연히 접하고는 거기에 빨려들어, 그 후로 기신론을 거듭 탐독했다. 그리고는 내 대학원 강좌에서 기신론을 윤독 교재로 채택하기까지 했다. 원래 기신론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큰 믿음을 일으키는 논서다.

나는 정년 후 가을에 낙엽 진 나목처럼 사소한 일상을 정리하고는 '자기 이유'를 찾는 '자유'를 훨씬 많이 누리게 됐다. 늦었지만 삶의 문제를 '마음 안'의 문제로 삼을 줄 알기 시작한 게다. 이런 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어머니로부터 비롯된 내 존재의 연기성(緣起性)이 아닌가 생각한다.

근데 내가 듣기로 어머니께서 계시는 그곳에는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린다고 하니... 그곳은 만날 설날 같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어머니, 부디 그런 세상에서 편히 쉬소서!


태그:#설날 어머니께 드리는 사모곡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