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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서성(山西省, 산시성)과 하북성(河北省, 허베이성), 산동성(山東省, 산둥성), 하남성(河南省, 허난성)의 경계인 태항산맥(남북 600㎞, 동서가 250㎞로 험준한 산맥으로 그랜드캐니언에 견줄만한 경관을 지님)은 북쪽은 오대(五臺, 우타이)산맥이 연결되며, 남쪽은 설산[霍山, 훠산]산맥과 이어지는 산맥으로 험준한 산세로 인해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부터 중원의 방어를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지역으로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곳이다. 이 산맥의 하나인 오지산은 사람의 다섯 발가락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는 팔로군 후방인 중원촌에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고 중국 공산당 팔로군(八路軍)에 있던 조선인 김무정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10월에 석정 윤세주와 진광화 등 조선혁명열사의 장례식을 치룬 후 남장촌으로 이동을 한다. 하지만 중국은 전시중이었고, 특히 43년은 중국에 가뭄이 들어 모두가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의용군도 남장촌의 토굴에서 생활을 하면서 밤에는 공부와 함께 훈련을 하고 낮에는 감자와 고구마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하며 밤낮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청춘을 불태웠던 곳이다.

1943년 중국이 흉년이 들자 조선의용군은 남장촌의 토굴과 왕교진할머니댁에서 머물면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항일 투쟁을 하였던 곳
▲ 남장촌 왕교진 할머니 1943년 중국이 흉년이 들자 조선의용군은 남장촌의 토굴과 왕교진할머니댁에서 머물면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항일 투쟁을 하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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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남장촌(南庄村, 난좡춘)에는 왕교진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는데 이 할머니집에서 조선의용군들이 묵었으며, 왕교진할머니의 남편도 조선의용군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용군이 묵었던 집과 집 내부에 있는 동굴도 당시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당시 조선의용군 오빠들의 늠름함과 투철함에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조선의용군 오빠들이 태어난 한반도를 방문하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고 하셨을 정도로 조선의용군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보였다.
1943년부터 조선의용군이 항일투쟁 지도자들을 양성했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 남장촌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1943년부터 조선의용군이 항일투쟁 지도자들을 양성했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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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촌은 조선의용군 총본부와 함께 조선의용군이 마지막으로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남장촌의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1943.9)>는 조선의 젊은이들을 독립 투쟁을 이끄는 지휘관으로 길러내는 교육과 훈련의 장이었는데 아직도 당시 시설 그래도 보전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기념사업회에서 제공한 칠판이 걸려 있었고, 2002년에 군정학교 옆으로 유치원이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 순례단은 유치원생들을 위해 국내서 준비해간 학용품과 사탕을 유치원장에게 전달하여 유적지 관리의 협조와 함께 유치원생들의 건강을 기원하였다.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주변 연병장에는 유치원이 들어서 있는데 미리 준비해간 물품을 전달하며 한중 우호 증진의 뜻을 전달하였다
▲ 남장촌 유치원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주변 연병장에는 유치원이 들어서 있는데 미리 준비해간 물품을 전달하며 한중 우호 증진의 뜻을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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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정학교의 초대 교육장은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중국의 '혁명 음악의 대부'인 전라남도 광주 출신 정율성(본명 정부은)이다,

오지산의 남장촌은 중국 정부에서 휴양지로 개발하고 있었으며, 남장촌의 토굴은 아직도 훼손되지 않고 있고 그대로이나 지역 주민이 휴양지 방문객들을 위한 양고기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정율성 박물관이 있는 곳도 관리인이 없어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라 마음이 아팠다. 이러한 시설들은 항일투쟁의 전적지이기에 교육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만큼 한중 정부 간의 외교적인 협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연화산 자락의 석문촌의 묘역은 중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우리의 현충원격인 진기로예열사능원으로 옮겨졌는데 1950년 10월에 조성하면서 석정 윤세주 열사와 진광화 열사의 유해도 열사능원으로 옮겨 안장되었다. 남쪽 열사 능원에는 석정 윤세주 열사가, 북쪽 능원에는 좌권 부참모장의 묘역 옆에 진강화 열사의 묘가 잘 조성되어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는 1982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은 석정 윤세주 열사의 묘역에서 최필숙선생이 손수 준비해간 제물과 석정 윤세주 열사의 증손자를 초헌관으로 예를 올리고 밀양아리랑을 다함께 부르며 영령들을 추모하였다.
우리의 현충원격인 열사능원에 석정 윤세주 열사와 진광화 열사가 모셔져 있고, 묘역에서 태극기를 품에 안기고 대한민국에서 가지고 간 제물로 제를 지냈다
▲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 우리의 현충원격인 열사능원에 석정 윤세주 열사와 진광화 열사가 모셔져 있고, 묘역에서 태극기를 품에 안기고 대한민국에서 가지고 간 제물로 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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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로예열사능원은 개방되어 시민들이 산책하며 시민의 일상과 함께 사용하고 있었는데 해방된 한국의 후손들의 많은 방문도 기원해 보았다.

매년 방문 시마다 현지 안내를 해주시는 한단시 공무원인 왕춘향(王春香:왕춘샹)선생은 남장촌 방문 시 사견을 전제로 "한국이 분단된 상황이라 이데올로기로 민감한 문제가 있지만 한국민의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정부간 교류를 통해 체계적인 관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함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했다.

하북성 석가장시내로 들어가면서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였다. 이 석가장 포로수용소는 북경과 한단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여 태항산맥 주변의 전쟁 포로들을 수용하였는데 5만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었을 정도로 컸다고 하며, 지난해 방문 시에는 포로수용소 뒤쪽에 망루가 그대로 있었던 것을 보면서 일본군들의 전쟁범죄의 현장을 볼 수 있었으나 이번은 교통 체증으로 주차가 불가능해 창밖으로만 보고 발걸음을 돌렸다.

석가장 포로수용소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이원대 열사가 고문을 받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총살당하기까지 수용되었던 곳이며, 일본군은 이곳에서도 위안부를 운영하다가 패전하자 길원옥 할머니 등 조선인 위안부 피해자들을 이곳에 버리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일외교협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픔에 또 상처를 주고,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를 거부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과 1970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비 오는 날 독일의 수상인 빌리 브란트가 무릎 꿇고 눈물로 사과한 사진이 뇌리를 스치면서 전쟁범죄에 대한 두 나라의 대조적인 역사관에 너무나 안타까웠다.


태그:#암살, #조선의용대(군), #진기로예열사능원, #동북아시아문화연구소,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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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보장된 정의의 실현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실천하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이 지속될 때 가능하리라 믿는다. 지방자치는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토대이며,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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