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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어릴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의 가사처럼 나의 고향 무녀도는 거짓말처럼 육지가 되었다. 1990년도 초반부터 시작된 새만금 개발, 근 25년이 지난 작년부터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게 되어 드디어 육지와 연결된 섬이 된 것이다. 그 유명한 '선유팔경' 외에 뭐 딱히 내세울 것이 없었던 '고군산군도', 63개의 유인도와 무인도로 이루어진 군도로써 그중 요즘 가장 핫한 섬인 신시도(전북 군산시 옥도면)의 이야기를 꺼내어 본다.

수차례 유선 연락 끝에 어렵게 신시도 이영집 이장님과 3·1절날 인터뷰 날짜를 잡고 댁을 방문했다. 대문 앞에 말끔하게 매단 태극기로 하여금 조그마한 섬이지만 기관장의 소양의식이 느껴진다.

신시도 자택 거실에서 기자와 인터뷰 하고있는 이영집 이장
 신시도 자택 거실에서 기자와 인터뷰 하고있는 이영집 이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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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시도는 고운 최치원 선생님이 공부를 했던 영광스러운 섬"

"기자 양반, 신라말 대학자이셨던 고운 최치원 선생을 아시지요? 우리 신시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최치원 선생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지요."

마치 그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인터뷰 초반 에피타이저(?)로 최치원 선생의 설화로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우리마을 동쪽 월영산(月影山, 198m) 정상에 월영대가 있는데 그곳에 최치원 선생이 돌로 단을 쌓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책을 읽었다는 전설이 있어요. 글을 읽는 소리가 하도 커서 그 소리가 중국에까지 들렸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요. 그쯤되면 최치원 선생의 선비정신이 중국 대륙까지 충분한 감동을 주고도 남지않겠습니까.(웃음)."

월영대에 쌓아있다는 '돌단', 설화로 내려져 오던 흔적만 있을 뿐 형체는 알아보기가 어려웠단다. 7년 전 당시 어촌계장 시절 소중한 자원인 만큼 형체라도 알 수있도록 마을 청년 몇몇을 데리고 정성을 들여 켜켜히 돌단을 쌓았다. 지금도 그는 당시의 추억에 잠기며 역사적 흔적을 살렸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당시의 노고에 대해서 청년들에게 감사를 돌린다.

신시도 대각산쪽을 바라보면서 최치원 선생의 전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고 계신다.(사진 이영집 이장)
 신시도 대각산쪽을 바라보면서 최치원 선생의 전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고 계신다.(사진 이영집 이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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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랑(?),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이영집 이장님, 통념적인 거친 어부들의 모습인 섬 원주민과는 다른 차원의 포스를 풍겼다. 달리 말하면 선비와 같은 온화한 모습을 풍겼다.

"섬에 사시는 분처럼 안 생겼어요. 도시에서 섬으로 이제 막 귀어를 하신 분 같이 보이시네요"라는 기자의 말에 웃으면서 답한다.

"제 고향이 신시도입니다. 어릴적 하도 가난해서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를 못했네요. 그래서 제 키가 작은 모양입니다.(웃음). 가난해서 학업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잘 사는 선후배들이 육지로 나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서 속으로 많은 눈물을 삼켰습니다. 가난한 것이 죄는 아니잖아요. 창피함을 무릅쓰고 육지로 유학을 간 선·후배들이 방학 때 섬으로 들어오면 영어와 수학을 알려 달라고 졸랐습니다. 학교을 제대로 못 다녔기 때문에 배움의 갈증을 그런식으로 달랬지요."

27살 때부터 시작된 신시도에서의 소규모 단체장의 활동은 그의 공부에서 비롯되었단다. 남들보다 부족한 학식으로는 떨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역사부터 고전, 철학을 망라하여 닥치는 대로 읽고 또 읽게 된 배경이 되었다. 낮에는 죽어라 일을 하고 밤에는 잠잘 시간을 줄여서 다양한 책을 섭렵하였다. 섬 주민들의 일상이었던 주경야주(酒), 그에게는 주경야독(讀)이었던 셈이었다.

"제가 신시도 단체장을 27살 때부터 시작했으니 거의 35년간을 내 고향의 앞만 보고 달려왔네요. 요즘은 변화가 진짜로 빨라요. 뭐든지 빠른 요즘 시대에 변화에 대응을 하지 못하면 단체장직을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청년회장을 시작으로  어촌계장, 수협 대의원, 수협 이사, 개발위원장, 이장 등등... 단체장의 자리에서 직을 수행하느라 고생을 좀 했지요. 젊었을 적에 미리해둔 공부로 신시도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신시도내 치안은 신시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단다.(방범순찰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영집 이장)
 신시도내 치안은 신시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한단다.(방범순찰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영집 이장)
ⓒ 이생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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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활동과 공동분배는 신시도 주민들이 살아가는 방식

인터뷰 내내 그는 '참여활동'이란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발전하기까지 동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활동'이 뒤따랐을 터.

"우리 마을은 최치원 선생께서 공부를 했던 대각산과, 바다가 사면으로 둘러쌓여 다양한 체험행사 운영이 가능하며 관광 프로그램으로 공동체 소득을 올리는 곳입니다. 또한 전통 어업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게매기(게막이)' 체험장을 통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고요. 2006년 3월 자율관리공동체에 가입해서 섬문화를 자원으로 전환시켜 이 또한 재정적인 소득에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신시도 마을공동체는 리, 어촌계, 산림계,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등 리를 위시하여 6개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고 나이와 직급에 따라 복수로 가입이 가능하단다. 각 조직의 장은 속해 있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권리증진을 위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을 모색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총괄조직인 '리'에서는 년 2회 총회를 합니다. 총회의 형식은 여느 조직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준비를 합니다. 예를 들어 각 조직에서 벌어들인 수입과 지출에 대해서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고 계획 대비 미흡한 항목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을 하고 신시도 미래비전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발표하면서 마무리를 합니다."

신시도자율관리어업공동체는 2014년 전국 최우수공동체로 선정되었고, 정부로부터 일정지원금까지 받은 바 있는 공신력있는 전국적인 공동체란다. 최근 어촌체험마을 형태로 사업구조가 개선되면서 학생들과 기업체 및 기타 조직단체등의 워크숍 형태의 단체 체험이 가능한 체험행사로 신시도 관광의 특화 상품으로 개발해서 공동체 소득증대에도 기여하고 있다.

신시도 어촌체험마을 프로그램을 설명해주고있는 이영집 이장
 신시도 어촌체험마을 프로그램을 설명해주고있는 이영집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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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 연결도로 일반인 통행은 양날의 검

반에 반세기 만에 완공된 고군산군도의 육지화, 섬주민들에게 염원이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진 요즘, 마냥 긍정적인 요소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다.

"지금까지 신시도 주민들의 아낌없는 참여로 관광상품 및 체험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했고요. 그런 프로그램들이 많이 활성화되어 우리마을은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습니다. 요즘말로 핫한 섬마을입니다.(웃음) 이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육지가 되면 관광활성화로 인한 소득 창출에 대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올해 하반기 중에는 일반인들에게도 차량 통행이 허락될 수도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단다. 차량 통행이 되면 누구가 쉽게 오갈 수가 있기 때문에 과연 이곳 신시도가 머물 수 있는 곳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이곳 신시도는 고군산군도를 출입하는 관문입니다. 관광객에겐 관문은 통과의 대상이지 머물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시도를 대표할 수 있는 특산품 및 관광 인프라 등이 아직은 미흡합니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신시도가 경제적 활성화를 꾀하는 데 직면한 문제라고 볼수가 있지요."

고군산군도의 육지화는 섬주민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그 염원이 현실이 되면서 염려스런 부분들이 매우 많다. 신시도가 더욱 발전하느냐? 경유지로써 관문 역할만 하느냐? 고민스러운 부분이지만 신시도 발전을 위한 그의 열정과 의지는 매우 뜨거웠다.


태그:#고군산 군도, #신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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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시의 열혈남아... 백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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