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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역북동에 자리하고 있는 채제공 선생의 묘역
▲ 묘역 용인시 역북동에 자리하고 있는 채제공 선생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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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사라져 버린 안내판. 도저히 문화재를 찾아 들어가는 길이 어디인지 구별도 되지 않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들. 요즈음 들어 갑자기 문화재 주변이 바뀌면서 점점 답사가 어려워진다. 길이 바뀔 때마다 안내판을 부착해 놓았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근처를 배회하기 일쑤이다.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 3-12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6호 채제공 선생 뇌문비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편에는 역북동 산 5번지에 경기도 기념물 제17호인 채제공 선생 묘가 자리하고 있다. 16일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몇 번이고 찾아보고 싶었던 채제공 선생의 유적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큰 길 입구에는 안내판이 서 있어 그나마 초입 길을 찾아 들어가는 것까지는 수월하다. 그런데 정작 안으로 들어가니 좁은 길만 남겨놓고 이리저리 건물들이 들어차 있어 난감하다. 거기다가 안내판도 사라져 버렸다. 휴대폰을 이용해 겨우 길을 찾아들어 골목 안쪽 산 밑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로 올랐다.

채제공 선생의 묘역은 단출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산양, 망주석이 있을 뿐이다
▲ 상석 채제공 선생의 묘역은 단출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산양, 망주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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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한 채제공 선생

채제공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백규 호는 번암, 시호는 문숙이다. 평강 채씨인 선생은 충주에서 태어나 영조 19년인 174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채제공 선생은 화성 성역의 주역이었다. 선생의 묘를 찾아가 보아야겠다는 생각도 선생의 화성 성역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정조대왕과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선생은 영조 34년인 1758년 도승지 시절, 사도세자의 폐위에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를 하였으며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 등으로 중용되었다. 채제공 선생은 정조의 특명을 받아 절의 노비를 폐하는 <사노비절목(寺奴婢節目)>을 마련하여 후에 순조 1년인 1801년에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묘역 앞에는 한 쌍의 산양이 좌우로 자리하고 있다
▲ 산양 묘역 앞에는 한 쌍의 산양이 좌우로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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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의 몰락과 더불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한 채제공 선생은 정조 12년인 1788년 국왕의 명으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정조 14년 천주교의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 신봉의 묵인을 주장하였다. 정조 17년인 1793년 영의정이 된 후 10여 년간은 천주교의 박해가 없었다. 그 후 정조의 큰 꿈을 실현시킬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설계 및 경영을 지휘하여 가장 짧은 공기 안에 화성 축성을 완공하였다.

정조의 채제공 선생에 대한 믿음은 남다르다. 정조가 즉위한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벌할 때 채제공 선생은 형조판서로 옥사를 처리하였다. 정조 23년인 1793년 별세하니 정조는 친히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선생의 묘 아래 쪽에 자리하고 있는 뇌문비가 바로 정조가 보낸 뇌문이다. 500여 마디의 글로 지어진 이 뇌문비의 글은 체재공의 명복을 신에게 비는 일종의 제문이다.

뇌문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 뇌문비는 정조가 지은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 뇌문비각 뇌문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 뇌문비는 정조가 지은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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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선생의 공적을 기린 뇌문비(誄文碑)

뇌문비는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팔작지붕의 전각 안에 자리한 뇌문비는 영조, 정조 시대의 명신인 채제공(1720~1799) 선생의 장례에 정조가 직접 지어 보낸 뇌문을 새긴 비이다. 오석에 해서로 적은 이 뇌문비는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비좌와 팔작지붕형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의 내용은 채제공의 공적을 기리고 애도를 표현한 글로 "조정에 노성(老成)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를 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도다"라고 적혀있다. 비문 말미에는 기미삽월이십육일이라는 명문으로 보아 이 비문은 정조 23년인 1799년 3월 26일에 지어 새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뇌문비를 보존하기 위한 전각을 돌아보고 난 뒤 산 위편에 있는 채제공 선생의 묘소에 올랐다. 일국의 재상으로 수많은 일을 해결한 채제공 선생의 묘소는 의외로 단출하다. 묘역에는 봉분과 상석, 망주석이 있고 석양이 한 쌍 배열되어 있다. 채제공 선생의 봉분 앞에는 묘표가 없는데, 이는 묘소 아래 뇌문비가 자리하기 때문이다.   

뇌문비는 오석에 해서로 적었다.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다
▲ 뇌문비 뇌문비는 오석에 해서로 적었다. 정조가 채제공 선생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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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앞에 서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환란의 시대에 두 임금을 보좌하며 할 일을 다 하고 간 채제공 선생. 선생의 삶처럼 봉분도 화려하지 않다. 봉문 앞에서면 앞으로 펼쳐진 대자연의 능선이 보인다. 선생의 꿈이 펼쳐진 것일까? 다만 그 대자연에 너무나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자연의 풍광을 막아버린 것이 죄스럽기만 하다. 선생의 묘소 한편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4월의 햇살에 잎을 반짝인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묘소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일대를 풍미하던 채제공 선생. 만일 선생이 없었다면 지금 수원 화성의 축성이 가능했을까?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선생이 계셨기에 오늘 우리가 화성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선생의 묘소에 하직인사를 하고 뒤돌아선다. 오를 때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시원한 바람에 사그라진다. 그 바람이 선생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모든 사람을 포용했던 선생의 마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E수원뉴스와 티스토리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채제공, #뇌문비, #묘소, #용인 역북동,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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