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자농구계는 첼시 리 사태로 충격에 빠졌다. 지난 시즌 KEB하나은행에서 활약했던 첼시 리가 특별귀화 추진 중 해당 부서인 법무부로부터 관련 서류 위-변조 의혹이 제기되어 검찰수사를 받게 된 것.

미국 국적인 리는 한국 국적을 정식으로 취득하지 못했지만 '해외 동포 선수' 자격으로 한국무대에 데뷔했다. WKBL은 부모나 조부모가 한국 국적자이면 국내 선수 신분으로 뛸 수 있게 하고 있다. 리는 자신이 한국인 친조모와 흑인 친조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조모와 친부모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위탁 입양 가정에서 자랐다고 주장했다.

리는 지난해 KEB하나은행을 처음으로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KDB생명 2015∼2016 여자프로농구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신인왕과 윤덕주상, 베스트5, 득점상, 2점 야투상, 리바운드상 등 총 6개부문에서 트로피를 받으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여자농구계는 리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오는 리우올림픽 최종예선을 준비 중인 여자농구 대표팀에 발탁하기 위하여 대한체육회로부터 특별귀화 추천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리 역시 여러 차례 대표팀에서 뛰고 싶다는 의지를 보인 바 있다.

첼시 리의 국적에 대한 의구심, 해소 될까

수상소감 밝히는 첼시 리 첼시 리(KEB하나은행)가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63스퀘어에서 열린 KDB생명 2015-2016 여자프로농구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스타 신인 선수상을 받은 후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 수상소감 밝히는 첼시 리 첼시 리(KEB하나은행)가 지난 3월 7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63스퀘어에서 열린 KDB생명 2015-2016 여자프로농구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스타 신인 선수상을 받은 후 수상소감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사실 리의 국적에 대한 의심은 지난해 일부 구단에서도 제기된 바 있다. 리가 한국인 피를 물려받았다는 증명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육안으로 봐도 리의 외모는 전형적인 흑인에 더 가까웠기에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은행과 WKBL 측은 리의 미국 내 에이전트를 통해 본인과 부친의 출생증명서, 할머니의 사망확인서를 확보해 리의 재외동포 자격을 인증하면서 논란은 일단 사그라들었다. 농구계는 당연히 특별 귀화 절차 역시 별 문제없이 통과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법무부 심사에서 예상치 못한 의혹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농구계는 일단 검찰 수사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물론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단순한 착오나 서류 미비에서 비롯된 해프닝 정도로로 끝나는 것이다. 만일 검찰 수사에서 위조가 아니라고 최종 결론이 난다면 그동안 리에 대하여 여전히 남아있던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는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검찰 수사 결과 의혹이 불행하게도 사실로 드러난다면, 이는 곧 농구계에 그야말로 핵폭탄이 된다. 프로구단과 WKBL의 재외동포 검증 시스템에 심각한 구멍이 뜷려있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증명하는 셈이 된다. 1차적인 책임은 물론 리가 져야하지만, 그의 신분을 승인해준 KEB하나은행 구단과 WKBL도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뢰가 생명인 프로 구단과 모기업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협회의 위상까지 한꺼번에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또한 지난해 리가 하나은행 유니폼을 입고 한국무대에서 올린 성적은 모두 부정행위가 되어버린다. 사실상 '승부조작급'의 사건으로 WKBL 역사의 한 페이지 전체가 오염되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외국인 선수의 국제 사기극에 한국 농구계 전체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사실 한국 농구계가 몇 년간 귀화선수 문제로 도마에 오른 것은 한 두 번이 아니다. 2년 전 남자농구는 2014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KBL 출신 외국인 선수 애런 헤인즈의 귀화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귀화선수 출전 자격에 관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의 기본 규정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일을 추진하다가 무산되며 국제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2014년 당시 여자농구 삼성생명에서 활약하던 김한별은 지금의 리와 비슷하게 대표팀 발탁을 전제로 특별귀화 자격을 취득했으나 정작 대표팀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못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여기서 한번쯤 돌아봐야할 것은, 첼시 리의 진실 여부를 떠나 한국농구계의 무분별한 귀화 추진이 초래한 구조적인 문제점이다. 애초에 허술한 규정과 주먹구구식 검증 시스템으로 분란의 불씨를 초래한 것도 문제지만, 사실 귀화 과정 자체를 원칙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추진하기만 했어도 이런 망신스러운 상황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특별귀화는 과학·경제·문화·체육 등 특정 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능력을 인재 중 대한민국의 국익에 기여할 것으로 인정되는 인물에게 속성으로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제도다.  보통 귀화를 하려면 3년의 거주기간이 필요하고 귀화시험도 통과해야 하지만 특별귀화 자격을 얻으면 짧은 시간 안에 곧바로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특별귀화제도, 원칙 없는 특혜가 돼서는 안된다

문제는 이런 특혜가 남발될 경우, 귀화 제도의 본래 취지를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다. 첼시 리처럼 이미 WKBL 진출 당시부터 신원이 불분명하여 의혹을 받은 인물이 정상적인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도 한국 국적을 얻어 각종 직업적-환경적인 혜택만 누리는 상황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농구계는 리를 당장 6월 올림픽 최종예선에 참가시킬 목적으로 특별귀화를 신청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회기간 안에 그녀에게 국가대표 자격을 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농구인들에게 리의 정체성이나 귀화 의지의 진정성 등은 어차피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단지 성적이 절실한 대표팀에서 단기간 리를 어떻게 써먹을 수 있느냐만이 관심사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국적을 흥정의 도구로 삼아서 대표팀에서 합법적으로 '용병'을 들이자는 발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귀화는 단순히 서류상으로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공동체와 문화의 일원으로 함께 동참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당장 쓸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검증 과정도 없이 국적을 손쉽게 거래하는 행위가 빈번해 진다면, 귀화와 용병 수입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농구계는 해외에서도 귀화선수 영입 사례가 보편화되었다는 것을 명분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런 철학도 비전도 없이,  남들이 하니까 그냥 나도 따라가자는 것은 천박한 발상이다.

남자농구도 이미 여러 명의 귀화선수들이 한국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승준이나 전태풍 등은 정식으로 귀화 자격을 이수하고 시험까지 치르서 당당하게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반면 똑같은 귀화혼혈선수 출신임에도 문태종이나 문태영처럼 특별귀화 제도를 통하여 한국 국적을 단기간에 취득한 케이스도 있다.

하지만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하여 미국 국적을 포기했던 이승준이나 전태풍에 비하여, 문태종 형제는 이중국적까지 인정받고 있다. 이승준과 전태풍은 데뷔 초기부터 공식석상에서 어설프더라도 한국어로 인터뷰를 해왔지만, 문태종 형제는 지금도 외국인 선수들처럼 영어만을 쓴다. 이미 남들보다 쉽게 국적을 얻었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는 한국인이 되기위하여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감수해야 했는데, 누구는 노력하지 않고도 쉽게 권리를 얻는 것은 공평한 대우가 아니다.

첼시 리 사태가 어떻게 결론이 나든 농구계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귀화 제도의 근본적 취지와  목적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대한체육회와 법무부 또한 자격심사를 강화하여 무분별한 특별귀화제도 남용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한국농구의 수준 하락을 고작 귀화선수 영입같은 단편적인 방안으로 메워보겠다는 안이한 발상으로는 언제든 제 2, 제 3의 첼시 리 사태같은 망신만 초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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