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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 독립하기 전, 누군가 적정한 퇴근 시간을 물으면 나는 오후 7시라고 답하곤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1시간으로 잡아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책을 읽거나 영화 한 편 정도는 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후, 이런 내 생각이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집으로 돌아오면 우선 나는 내가 먹을 저녁을 준비했다. 밀린 빨래가 있다면 얼른 세탁기를 돌렸고, 하루 동안 쌓인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청소하기 바빴다. 그러다 보면 시계는 금방 오후 9시를 가리키기 마련이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정리하는 것도 일이라, 하루의 노동에 지친 몸은 더 피곤해졌다. 그 상태에서 나는 무언가를 읽거나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사노동'

나는 몰랐다. 가사노동의 존재를.
 나는 몰랐다. 가사노동의 존재를.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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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어린 시절, 집에 돌아가면 곧장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요리를 하고 집을 돌보는 시간, 가사노동의 시간을 일과에 포함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일찌감치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살게 되면 누가 내 식사를 준비해주지도, 청소를 대신해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나는 내가 그 일을 하리라 생각하지 않은 것일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첫 번째로, 나는 가사노동이 남성인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가사노동 자체를 '노동'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노동은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해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모든 노동은 '생산'을 통해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이뤄진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노동의 개념을 시장 경제 중심으로 이해한다. 즉 임금 지불의 대상이 되는 활동이나, 시장에서 팔릴 생산물을 만드는 일을 노동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가사노동을 노동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집을 청소하거나 빨래를 하는 일이 금전적 가치를 지닌 생산물을 만드는 것 같지도 않고, 식사를 마련한다고 해서 이 음식이 돈을 받고 팔리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곧장 소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사노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래서 노동이 아니며, 경제의 일부분이 아닌 건 아니다. 가사노동은 줄곧 '재생산 노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왔다. 즉 노동으로 지친 몸을 다시 노동이 가능한 몸으로 되돌리는 일인 것이다.

가령 집으로 돌아온 내가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노동을 지속할 만큼 건강한 상태로 있을 수 없다. 당장 깨끗한 옷이 없다면 나는 출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지저분하게 방치된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가사노동은 분명 노동이며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톱니바퀴 중 하나다. 그것도 아주 큰 톱니바퀴다. 만약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손을 놓아버리면, 우리 중 제대로 일터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 4.2배 차이... 이것의 의미

가사 노동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왜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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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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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독립을 하기 전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 노동의 수혜를 입어왔다. 그렇기에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로 커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가사노동을 하나의 일로서 인지하지 못한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그간 가사노동을 '젠더 역할'이나 '젠더 규범'으로 인식해온 점이다. 가령 사람들은 원래 여성은 돌봄이나 가꿈에 능숙하고, 때문에 여성이 집과 가족을 돌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가사노동은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이 필요한 숙련 노동이 아니라 '원래 여성이 잘하는 일'로 치부되곤 한다. 이 같은 통념은 곧장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은 여성의 의무이며, 이 일에 능숙하지 않거나 열심이지 않은 여성은 문제로 지목된다.

이 같은 통념의 결과는 어떨까.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에 따르면 여성은 평일의 경우 평균 3시간 28분의 시간을, 주말의 경우 평균 7시간 10분의 시간을 가사노동에 할애한다. 같은 기간 남성이 각각 47분, 2시간 14분을 가사노동에 사용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이 가사노동에 4.2배나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한때 맞벌이 노동을 했던 직장 동료에게 하루 일과를 물어봤다. 그녀는 오전 7시부터 식사 준비와 아이들 밥 먹이기, 빨래와 출근 준비를 한꺼번에 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퇴근 후 오후 8시 반쯤 집에 들어가면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집을 청소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오후 11시. 그 사이에 1시간의 휴식 시간이 있지만, 아이를 돌보는 상황에서 이 시간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쓰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업 가사노동자라고 상황이 다를까?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하기로 한 친구의 일과도 들려줬다. 그 친구의 아침 시간 역시도 내 직장동료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남편을 보내고 나면, 그때부터 빨래와 청소 등 집 정리를 시작한다. 중간중간 장을 보고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준비하면 시계는 오후를 훌쩍 넘긴다. 그러고 나서 좀 쉬면 어떨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곧 저녁밥을 달라며 남편과 아이들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탈젠더화와 인식의 전환

이 처럼 가사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젠더화된 상황은 또 다른 문제를 초래한다. 가사노동과 유사한 직종의 젠더화와 저임금화 현상이다. '가사노동 =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은 가사노동과 유사한 요식업, 청소업무, 돌봄서비스가 여성 노동자를 요구하는 환경을 조성한다.

그러다 보니 이 같은 업종에 여성 노동자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거기에 가사노동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상황은 이 같은 직종의 저임금화를 초래한다. 가사노동을 집으로 가면 무상으로 얻을 수 있는 개인화된 서비스라고 인식한다면, 이 노동이 집 밖으로 나온다고 정당한 대우를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사노동이 노동, 특히나 경제의 한 축을 떠받드는 노동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같은 전환에는 전통적인 공·사 영역의 분리를 탈피하는 것도 필요하다. 가사노동은 더 이상 사적인 '집안 일'이 아니다. 집안은 누군가에게 일터이며, 이 공간에서의 노동은 우리 경제가 작동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또한 가사노동의 탈젠더화도 필요하다. 가사노동이 '여성의 일'이자 '원래 여성에게 적합한 일이기에 숙련의 노력이 필요 없는 일'일 때, 가사노동에 대한 정당한 경제적 평가는 불가능하며 가사노동의 편중 현상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125주년 세계노동절인 지난해 5월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대회 모습.
 제125주년 세계노동절인 지난해 5월 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린 노동절대회 모습.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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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5월 1일 노동자의 날, 아마 많은 노동자들이 각자의 깃발을 들고 광장에 모일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고 경제를 굴러가게 만드는 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집안에 숨겨진 가사노동자들의 깃발을 보길 바라는 것은 너무 큰 꿈일까?

한창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내 주변에는 기혼 여성 동료들이 많았다. 퇴근 시간을 앞두고 들뜬 나에게 건넨 그분들의 한 마디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넌 집으로 퇴근하니? 난 집으로 출근한다!"


태그:#가사노동, #페미니즘, #여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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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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