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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현장을 직접 방문해 담당 간부에게 공사 중단을 지시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현장을 직접 방문해 담당 간부에게 공사 중단을 지시하고 있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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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이 공사는 없다. 내가 손해배상 당해도 좋다."

지난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에 갑자기 나타난 박원순 서울시장은 잔뜩 화난 얼굴로 담당 국장을 질책한 뒤 자리를 떠나버렸다. 현장은 재개발 반대주민과 사회단체 회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박 시장은 인터넷과 SNS에서 약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럼, 박 시장은 이날 왜 그리 화가 났을까.

이날 오전 6시 30분경 옥바라지골목에 마지막 남은 여관인 '구본장'에 100여명의 용역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며칠 전 명도소송에서 이긴 재개발조합측이 철거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이들은 여관 주인가족은 물론, 투숙객들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여관에 머무르고 있던 사회단체 회원들을 밖으로 몰아냈다. 항의하며 다시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소화기를 분사하며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대형 크레인을 이용해 내부 집기를 들어내고 유리창을 마구 부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쫓겨난 사람들이 현장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SNS를 타고 퍼져나갔다. 측근들에 따르면, 박 시장도 SNS를 통해 상황을 파악한 뒤 일정을 바꿔 급히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 도착한 박 시장은 용역직원들에게 "여기 책임자가 누구냐, 빨리 철수해, 시장 말 안 들려요"라며 호통을 친 뒤 구본장 주인 등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듯 '공사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서울시 한 고위 관계자는 "박 시장이 건설업체나 재개발조합측이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행태를 보인데 대해 분노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날은 마침 오후에 옥바라지골목보존대책위 관계자들과 박 시장의 면담이 예정돼있었다. 막바지에 몰린 대책위 주민들이 며칠 전 한 행사장에 들어서는 박 시장을 붙잡고 애원해 얻은 면담기회였다.

서울시측은 조합측이 이날 면담 정보를 미리 알고 일부러 철거를 강행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박 시장은 이 자리에서 "내가 오늘 (대책위 관계자들을) 만나기로 돼있었는데 아침에 이렇게 (철거)하면 이건 예의도 아니다"고 개탄했다.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구본장여관 앞에서 용역 직원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다.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구본장여관 앞에서 용역 직원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대치하고 있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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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해보고 다른 길이 없는지 고민해보라고 했는데..."

이 관계자는 그러나 박 시장이 가장 분노한 것은 자신의 시정철학이 현장은 물론 시 직원들에게도 잘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취임 이후 기존 것을 부수고 새로 짓는 일률적인 전면철거 방식에서 탈피해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살리는 맞춤형 도시재생을 강조해왔다.

올 들어 옥바라지골목 철거작업이 본격화 돼 대부분의 건물들이 부서지고 반대 주민들의 민원이 빗발치자 박 시장은 지난 3월 "내 임기 안에 이런 일이 발생해 너무 안타깝다"며 시 간부들에게 "공사가 많이 진척돼 상황이 어렵지만 현장을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지시한 바 있다.

또 주민들과 사전협의를 5차례 이상 운영하고 그래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자치구 부구청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분쟁조정위원회를 가동시켜 합의하에 공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종로구청에 가이드라인을 내려 잠시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재개발조합측은 명도소송에서 이기자 이 구역에서 마지막 남은 여관이며 보존투쟁의 중심지가 돼버린 '구본장'마저 전격 철거시도를 한 것이다.

박 시장이 옥바라지골목에서 "웬만하면 그대로 둬라, 설득과 함께 고민해보고 다른 길이 없는지 해보라고 했는데..."라고 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또다른 서울시 고위관계자는 "사유재산인데다 법적으로만 보면 서울시가 행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면서도 "그러나 반대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하는 (담당 직원과 간부들의) 끈질긴 노력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화가 난 듯하다"고 말했다.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구본장에서 용역직원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내부 집기를 들어내고 있다.
 17일 오전 옥바라지골목 구본장에서 용역직원들이 크레인을 이용해 내부 집기를 들어내고 있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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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는 중단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박 시장의 깜짝선언으로 현재 옥바라지골목 재개발은 새 전기를 맞았지만 엉킨 실타래를 푸는 작업은 간단해보이지 않는다.

박 시장이 '공사는 없다, 손해배상 당해도 좋다'고 말한 데 대해 당일 저녁 서울시는 입장문을 내고 "사업 자체를 중단한다는 것이 아니고, 철거를 중단하고 합의 없이는 더 이상의 절차가 진행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해명했지만 논란은 여전하다.

재개발 인허가 절차가 끝난 상황에서 철거작업을 중단한 것은 조합원 재산권을 제한하는 역차별이며, 특히 인가 승인을 내준 서울시가 스스로 철거작업을 중단하는 게 모순이라는 지적이다. 

옥바라지골목 보존운동을 벌여온 박은선 리슨투더시티 기획자는 "그동안 박 시장이 현장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철거를 밀어붙이는 게 아닌가 오해하기도 했지만 정말 몰랐던 것 같다"며 "담당 부서에서 한 명만 제대로 했어도 이런 상황에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그동안 시에 가서 여러 가지 제안도 하고 브리핑도 해줬는데, 그 자리에선 다들 '보존해야겠다', 'TF를 만들겠다' 해놓고 돌아서면 뒤집더라"며 "우리는 아직도 이곳을 아파트가 아닌 다른 식의 개발방식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계속 주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은아 비대위 총무는 "박 시장의 선언에 환호했는데 나중에 입장을 살짝 바꿔 기분이 안 좋았다"며 "그날 이후에도 일부에서 돈으로 합의하자는 식으로 접근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지금처럼 옥바라지골목에서 그냥 살고 싶은 것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옥바라지골목엔 굴착기 소리는 멈추고 골목 보존의지를 다지는 문화제와 기도회가 매일 저녁 열리고 있다.


태그:#옥바라지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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