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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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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집중한다. 소설에 드러난 최초의 폭력적 사건은 권위적인 아버지로부터 영혜가 매를 맞는 순간이다. 이후 강간, 육식 강요, 자해, 정신병원 수용, 단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목적과 수단이 달라져도 대상은 언제나 여성의 몸이다.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여성을 그린 셈이다. 소설 속 여성은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또 좌절한다.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저항의 방식은 육식 거부다. 최종적으로는 자연과의 합치다. 그러나 그저 폭력적인 사회를 비판하며 인위적 구조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여성의 모습만 다뤘다면, 이 소설은 에코페미니즘의 진부한 반복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폭력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장면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대상이 되는 자신을 목격한 여성들의 패배다. 소설 속 여성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대응하지만 결국 가부장의 억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1. 영혜 : 폭력과 자학

영혜는 시종일관 폭력의 객체가 된다. 아버지에게 맞고, 남편에게 강간당하며, 형부의 관음증적인 시선에 평가받고, 원치 않는 음식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정신병원 의사들(기존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 앞에 무기력하게 놓인다. 사회의 '규범'에 종속된 이들은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해버린다.

하지만 영혜는 저항한다. 폭력을 상징하는 육식을 거부하고 끝내는 스스로 육식하는 주체이기를 포기해버린다. 그는 나무가 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비폭력적 해결 방식이라고 믿는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라는 독백에서 그의 비폭력 지향적 태도가 드러난다.

말미에는 곡기를 끊고 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써 착취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오직 햇빛과 물만을 필요로 하는 식물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그가 '왜 죽으면 안 되냐'고 묻는 것은 진정 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폭력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로 존재하고 싶다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실은 영혜가 선택한 방법도 스스로의 몸을 향한 하나의 폭력이다. 자신의 손목을 칼로 긋고 해방을 위해 형부와 섹스하고 나무가 되겠다며 곡기를 끊는 모든 과정이 영혜의 몸을 해체한다. 그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가장 소극적인 방식마저 결국은 자신을 향한 폭력, 즉 자학인 셈이다. 이를 관찰하는 언니 인혜는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게 그거지'라고 평가한다. 해방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목에 폭력이 놓여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자학을 택하지만 그 행위가 영혜를 또다시 폭력의 굴레에 밀어 넣는다. 자학은 결국 폭력의 하위개념이기에 스스로의 속성과 부딪히는 자기모순으로 직결된다. 다시 말해 저항을 위해 자학을 행하는 순간 여성은 폭력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가 된다.

가부장적 질서에 도전하지만 스스로 그 질서의 구성원일 수밖에 없는 여성. 피로 얼룩진 살덩어리를 거부하려 몸부림친 결과가 병동에 갇혀 스스로의 피를 핥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은 질서를 부수는 과정에서 스스로마저 파괴시킬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에 놓여있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고 살릴 수 없으며 숨 쉬게 할 수 없'다.

2. 인혜 : 관찰과 연대

인혜에게 가해진 폭력은 영혜의 그것만큼 상세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건 아니다. 남편에게 강간당하고 역시 제부의 관음증적인 시선에 대상으로써 소비됐으며 남편이 저지르는 불륜을 목격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진실로부터 배제돼 있었다.

그저 동생 영혜로 인해 촉발된 상황을 관찰할 뿐이다. 그는 당사자이면서도 주체일 수 없는 여성이다. 인혜의 객체성, 나아가 여성의 객체성은 <채식주의자> 각 편의 시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편과 2편은 각각 남성 화자에 의해 그려지며 이들은 모두 두 여성의 몸을 낱낱이 파헤치고 묘사한다. 반면 두 남성이 사라진 3편에서조차 여성은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다. 3인칭 '그녀'라고 불릴 뿐이다.

관찰자, 주변인, 객체로서의 인혜는 또 다른 객체인 여성을 관찰함으로써 진실을 파악해간다. 영혜를 지켜보며 자신도 영혜와 다르지 않음을 뒤늦게야 깨닫는 것이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는 묘사에서 드디어 스스로의 처지를 각성했음이 드러난다. 이 과정 속에서 그가 택한 대응 방식은 영혜와 사뭇 다르다.

폭력에 온몸으로 저항하기보다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 영혜에게 공감한다. 영혜가 겪은 고통에 대신 아파하며 영혜를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일종의 주변인 간 연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라고 되뇌이는 모습에 영혜를 향한 공감과 위로가 담겨있다. 저항하는 여성, 파괴당하는 여성에게 관찰하는 여성은 연대의 손길을 건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연대, 소통, 화합은 불가능하다. 인혜는 영혜가 지향하는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영혜는 인혜와의 소통 가능성을 믿지 못했다. 자매는 분리되고 파편으로 남아 각자도생 혹은 각자파멸의 길을 걷는다. 그만큼 육식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폭력적 구조가 견고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파괴시켜도 무너뜨릴 수 없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도 맞잡을 수 없다. 결국 영혜도 인혜도 삶에서 폭력을 뿌리 뽑지 못한 채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3. 한강 : 소설의 한계

<채식주의자>에서 이름을 가진 여성은 두 명이지만 내 생각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셋이다. 마지막 인물은 작가 한강. 그 역시 영혜와 인혜처럼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소설을 전개하는 과정, 특히 2장 '몽고반점'에서 드러난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다뤘지만 그 스스로 일종의 폭력을 재생산했다.

한강이 저지른 첫 번째 실수, 혹은 그의 한계가 드러난 첫 포인트는 영혜의 몸을 지나치게 탐닉했다는 점이다. '몽고반점' 장에서 영혜는 형부가 품은 탐욕의 대상이 된다. 영혜 스스로 원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강은 그 과정에서 남성화자의 시선을 통해 영혜 몸을 과도하게 묘사한다.

형부의 추잡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더 강한 불쾌감을 자아내려는 게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무엇이었건 방식이 지나쳤다. 대상으로서의 여성을 드러내기 위해 여성의 몸을 또 한 번 대상화 한 셈이기 때문이다.

또 영혜는 한 명도 아닌, 겹겹이 쌓인 여러 시선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진다. 수많은 눈 앞에 철저히 전시되는 것이다. 형부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 게다가 독자의 시선까지 영혜의 몸을 관음한다. 마치 갤러리 벽면에 걸린 그림처럼 영혜는 주체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된다.

아름다운 꽃 그림과 그것의 화폭이 된 영혜의 몸을 내 시선은, 독자의 시선은 알게 모르게 더듬는다. 그게 현실이며, 실은 우리 모두가 가해자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성은 역시 수단이 되고 대상이 돼 버린다.

주체로서의 영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몸에 꽃을 그리고 그런 자신을 촬영함으로써 악몽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게다가 섹스를 식물 간 접합 개념으로 받아들인 그는 욕망을 느끼기까지 한다. 문제는 이 과정을 주도하는 자가 '관음하는 남성'이라는 점이다. 영혜가 스스로 꽃을 그리고 홀로 존재 방식을 구성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형부의 손과 몸이 개입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까. 형부와의 섹스가 마치 영혜를 '정화'시켜주는 것처럼 그려진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영혜는 육식거부를 통해 그나마 주체적으로 삶을 개척해가는 여성상에 가까운데, 결국 그조차도 홀로 모든 과정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채식주의자>를 페미니즘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다뤘고 그 억압에 나름대로 저항하는 이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탈출을 시도한 여성도, 연대를 도모한 여성도, 이를 폭로한 여성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세 종류의 저항은 모두 좌절하거나 적어도 한계를 가진다. 작품 속 여성들은 구조와의 대결에서 패배했고 작품을 생산해낸 여성도 구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이 수없이 좌절해온 현실 속 여성들의 모습을 가장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을 그린 작품라고 해서 독자에게 언제나 좌절만을 주는 건 아니다. 사실보다 사실적인 허구가 오히려 현실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꾸준히 목격해왔다. <채식주의자>가 그러한 균열의 도화선이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채식주의자 리뷰.



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창비(2007)


태그:#채식주의자, #한강, #한강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리뷰, #채식주의자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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