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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 앞에 고뇌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이럴 때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현재의 문제가 한층 또렷이 드러난다. 이 연재물은 동서고금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출구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자 기획되었다. - 기자 말

벌써부터 언론들은 내년 대선을 겨냥한 각종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초점은 대선주자들에 맞추어 있지만 다양한 세력들이 어떤 형태로 손을 잡고 힘을 합칠지도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질적이거나 심하게는 적대적인 집단이 손을 잡는 '연합정치'가 각자의 운명을 결정지을 때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관우에게 없었던 딱 한 가지

관우
 관우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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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돌려 삼국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수히 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아온 인물은 관우이다. 탁월한 무공에다 의리와 충직함을 더한 관우는 민간에서 신으로 떠받들 정도로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기를 반영하듯 중국에서 삼국지 영화가 제작되었을 때 관우 역을 맡은 배우가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관점에서 봤을 때 관우는 한 나라의 운명을 망칠 정도로 치명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삼국지를 엮어가는 세 나라 중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은 위나라였다. 위나라에 비하면 오나라와 촉나라는 변방 국가에 불과했다. 이 두 나라의 생존 전략은 위나라에 대항해 굳건한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오촉 동맹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지역이 형주였고 그 형주를 책임지고 있던 인물이 바로 관우였다. 관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오촉 동맹을 견고하게 유지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오나라의 수장 손권은 오촉 동맹이 생존에 필수적이며 이는 관우와의 원만한 관계를 통해 유지될 수 있음을 정확히 인식했다. 그 연장선에서 손권은 관우에게 자녀들 간의 혼인을 제안했다. 하지만 관우는 '개의 자식'과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는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손권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고 결국 관우를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평소 냉철하기 그지없었던 손권마저 감정에 이끌린 것이다. 오나라는 관우를 공격했고 관우는 생포되어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관우와 의형제였던 촉나라 수장 유비는 관우의 죽음에 극도로 분노했다. 급기야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했으나 참패 끝에 귀국 도중 세상을 떠나야 했다.

굳건한 동맹을 통해서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오나라와 촉나라는 서로를 공격하는데 엄청난 국력을 낭비했다. 두 나라 모두 국력이 쇠퇴하면서 위나라 뒤를 이은 진나라 손에 멸망되고 말았다. 관우, 손권, 유비 모두 감정과 자존심에 이끌리어 국가의 운명을 망친 것이다. 먼 훗날 삼국지를 열독하면서 이 장면을 거듭 곱씹은 인물이 있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이었다.

마오쩌둥을 역전의 명수로 만든 2차 국공합작

마오쩌둥
 마오쩌둥
ⓒ ZDF 다큐멘터리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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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중국 공산당은 쑨원이 영도하는 국민당과의 합작(1차 국공합작)을 바탕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세력 확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쑨원 사후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공산당의 급성장에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1927년 4월 쿠데타를 단행, 공산당원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공산당은 당원의 5분의 4 정도를 잃어야 했다. 이후에도 장제스는 최대 90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해 공산당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결국 공산당은 서남부 근거지를 탈출해 서북부 변방으로 이동하는 대장정에 돌입해야 했다. 대장정은 후대에 의해 극한 상황을 넘나드는 대서사시로 묘사되었지만 실상은 '똥줄 빠지게 도망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대장정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열 명 중 한 명꼴이었을 만큼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대장정을 마친 공산당은 산시성 연안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건설에 착수함으로써 새로운 근거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1936년 당시 소비에트 지구의 인구 수는 대략 900만 명 정도였다. 이 점만을 놓고 본다면 공산당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에 비하면 변방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다. 그러한 공산당 앞에 모든 것을 뒤바꾸어놓을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일제가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한 것이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사실 공산당 입장에서 국민당은 끔찍한 고통을 안겨다 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도저히 손을 잡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들끓고 있던 분노의 감정을 철저하게 죽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소비에트를 해체한 뒤 '적국'이었던 중화민국 내 자치정부로 전환했고, 자신들의 군대인 홍군을 적군이나 다름없었던 국민당 산하 8로군으로 편제했다. 자존심마저 깡그리 내팽개친 것이다. 아울러 토지몰수 계획을 중단하는 대신 소작료를 감축했다. 단기 이익을 포기한 것이다. 도대체 공산당은 무엇을 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국민당과의 연합을 추구한 것일까?

공산당은 국공합작을 통해 국민당의 공격에서 상당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공산당은 자신의 힘을 항일전에 최대한 집중했다. 그로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은 완전히 엇갈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얼추 백만 규모라고 한다. 하지만 중국은 백만 대군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너무나 큰 나라였다. 당시 중국을 구성하고 있는 크고 작은 촌락 수는 2백만 정도에 이르렀다. 촌락마다 일본군 병사 1명을 배치한다고 해도 절반이 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일본군은 철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주요 도시를 점령하는 데 주력했다. 그로 인해 직접적 타격을 받은 것은 도시를 주된 기반으로 삼고 있던 국민당이었다. 국민당은 본거지를 빼앗긴 상태에서 내륙으로 이동해 어렵사리 연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일본군이야말로 국민당을 약화시킨 주범이었다.

반면 공산당은 일본군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광활한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치고 빠지는 유격전에 주력했다. 공산당의 유격전 덕분에 중국 대륙은 일본군을 삼키는 거대한 수렁으로 돌변해 갔다. 효율적인 유격전으로 일본군을 몰아치자 중국 민중은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며 공산당 대열에 합류했다.

공산당은 항일전을 통해 급성장했다. 항일전이 끝났을 무렵 공산당과 국민당의 힘은 완전 역전되어 있었다. 일제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에 돌입했다. 최후 승자는 공산당이었다. 오늘날의 중국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탄생할 수 있었다.

3당 합당부터 진보정당의 몰락까지

김대중 vs 김영삼
 김대중 vs 김영삼
ⓒ 왕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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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은 비록 항일전 요구에 따른 일시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2차 국공합작을 통해 연합정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를 거울삼아 한국 현대 정치사의 중요한 대목 몇 가지를 되돌아보자.

김대중과 김영삼은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했던 양대 정치 거목이었다. 둘은 경합관계였지만 민주화투쟁 과정에서는 긴밀하게 협력하였다. 1987년 민주화투쟁이 승리하면서 둘은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 해 치러진 대선을 앞두고 둘은 완전 갈라서고 말았다. 연합을 굳건하게 유지해야 할 시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후과는 한국 정치 지형을 뒤틀리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대선 결과는 군부 출신의 당선으로 나타났다. 김영삼은 새삼 연합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나 그가 선택한 것은 3당 합당을 통해 오늘날의 새누리당을 만든 것이었다. 김대중 또한 김종필과의 DJP연합을 통해 정권 획득을 도모했다.

진보정당으로 눈을 돌려 보자. 진보정당의 새 장을 연 민주노동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일관되게 복지국가를 옹호함으로써 빠르게 지지를 확대할 수 있었다. 2006년에 이르러서는 수권정당의 요건인 당 지지율 20%를 상회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신자유주의 허구성이 폭로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한층 높아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2008년 초 분당으로 치달으면서 진보정당은 생존조차 버거운 상황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민주노동당의 양대 축이었던 자주파와 평등파 두 계열의 연합이 파괴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연합 실패로 인한 정치 굴절은 반복되고 있는 느낌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했을 당시 지지자들이 바랐던 핵심은 문재인과 안철수의 연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의 연합은 실패했고 결국 분당으로 치달았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만약 안철수가 지금의 구도에서는 대선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신YS(김영삼)프로젝트 형태로 정계개편을 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부정적 과정이 반복된다면 정말 짜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반복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세길 새사연 이사가 쓴 글입니다.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saesayon.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정치, #연합, #마오쩌둥, #3당합당,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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