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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구좌읍 해녀박물관
▲ 일본의 경제수탈정책에 맞선 제주해녀항일운동 제주도 구좌읍 해녀박물관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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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항일운동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해녀라는 여성전문인력이 일본의 수탈정책에 항의하며 왜놈과 맞짱떠서 단판을 내버린 대사건'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대사건이라고? 당연하다. 1932년, 허리에 칼 찬 순사만 봐도 모두들 슬금슬금 피하던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제주의 해녀들이 일본을 상대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을 뿐 아니라 일본 경찰 주재소까지 습격했으니 이것은 제주뿐 아니라 조선 내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해녀항일운동은 1932년 1월 세화리 장터에 모인 해녀 시위가 대표적이기는 하지만 1920년 해녀조합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이미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해 1930년 부터 1932년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238회나 됐다. 이 시기 시위에 참가한 해녀의 수는 무려 1만7130여 명에 이른다. 대규모의 장기적인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이 주목할만 하다.

1920년 동아일보 기사(4월 22일)에 보면 그 당시 1만 명 정도에 이르는 해녀가 물질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일 년에 수백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좀 더 구체적인 조사에 의하면, 당시 출가 물질을 나가는 해녀만 해도  4000명에 이르렀고 일인당 평균 300원 정도의 생산을 해냄으로서 벌어들이는 돈이 연간 120만 원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의 120만 원이 2016년 현재 어느 정도 되는 금액인지 궁금하여 한국은행 누리집에 들어가 쌀을 기준으로 화폐 가치를 계산해봤다. 770억 원이라는 어마 무시한 금액이 나왔다. 나도 놀라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동아일보> 기사(1920년 4월 22일)
 <동아일보> 기사(1920년 4월 22일)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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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명품 전복은 일본인들의 입맛을 돋우며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고 홍콩과 상하이 등지의 요릿집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의 미식가들이 찾는 제주산 전복 메뉴를 위해 수입에 열을 올렸다. 또한 감태는 공업용 아교와  화장품 원료로 재생산되느라 없어서 못 팔 정도였고, 우뭇가사리로는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양갱으로 가공돼 소비자에게는 비싸고 귀한 과자로 팔려 나갔다.

당시 제주의 해안가에는 일본인들이 무작위로 지어 올린 통조림 공장이 성시를 이루며 제주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증가됨에 따라 해녀의 생산활동은 움직이는 현금 은행이 돼 제주의 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수탈로 인하여 생산자인 해녀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해녀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해녀항일운동의 시발점, 1932년 1월 7일 제주도 하도리 시위

"악덕 상인 니노미야(二宮)는 물러나라! 니노미야를 옹호하는 마쓰다 서기도 물러나라!"

1931년 1월 7일. 제주도의 하도리가 술렁인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두른 300여 명에 이르는 해녀의 손에는 호미와 빗창이 들려있고 그 눈빛은 1월 매서운 칼 바람보다 더 서늘하다. 살을 에이는 모진 추위와 강풍을 헤치고 해녀들은 하도리에 모여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열을 지어 세화리 장터까지 걸어 가는 길이다.

놀란 세화리 주재소 경관대가 총칼로 무장하고 해녀 시위대의 행열을 해산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부근의 해녀들이 격하게 호응하며 시위대에 합류했고,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속수무책이 돼버리고 만다. 1931년 1월 7일은 세화리의 5일장이 열리는 날. 하도리에서부터 20리 길을 걸어온 해녀들은 장터의 가장 번화한 곳에 집결하였다. 그리고 22살의 부춘화 해녀가 단상에 올라 목청을 높인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 해녀들은 이 추운 겨울 바닷속에 들어가 전복이며 해산물을 캐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시세와는 상관없이 터무니없는 헐값에 우리의 전복을 매수해왔습니다. 우리 해녀들은 더 이상 이와같은 일본의 수탈에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전복을 캡니까? 왜놈들 배불려주려고 전복을 캡니까? 우리가 목숨 걸고 바당에서 캐 올린 이 전복이며 해산물을 왜 일본인에게만 매수해야 합니까? 해녀조합은 당장 일본인 지정 매수를 철회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해녀들 모두 굶어죽고 맙니다. 우리 하나로 뭉칩시다. 그래서 해녀조합을 등에 업고 우리의 피를 빨아 먹는 일본인 니노미야를 몰아내고 그 밑에서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있는 매국노 고태영도 몰아내고 우리의 권리 우리의 손으로 지켜냅시다. 여러분! "

1월 7일 세화리 장터에 모인 해녀 300여 명의 시위는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민족 말살 정책이고, 또 하나는 경제 수탈 정책이다. 당시 대공황에 허덕이던 일본은 전쟁에 광분하여 조선에서 가혹한 착취를 집행했다. 인적으로는 강제징용을 서슴지 않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간 것도 이 시기이며 물적으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탈을 일삼던 바로 그 시기에 제주의 해녀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분연히 들고 일어선 것이다.

신문 기사에 실릴 정도의 이 시위는 1932년 1월 7일이었지만 일본의 수탈정책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움직임은 이미 1930년 '우뭇가사리 부정 판매 사건'이후로 불거져 있었다. 이후 수차례에 걸쳐 해녀들은 크고 작은 규모로 시위를 계속해 왔음에도 억압은 계속되었다.

일본인들의 수탈은 악랄했다. 해녀들이 채취한 전복이며 해산물을 저들이 지정한 일본 사람에게만 판매하도록 해 놓은 것이다. 악덕 상인으로 표현된 니노미야(二宮)라는 일본인은 해녀들의 해산물 가격을 시세의 반도 되지 않는 헐값에 사들여 착취했다. 이를 참지 못하고 해녀들이 제값을 쳐 달라고 요구하자 '그렇다면 안 사겠다'면서 전복의 매수를 거절해 버린 것이다.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공문서를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해녀조합장이 일본인이며 게다가 제주도지사까지 겸하고 있는 인물이니 그 요구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는 사이 창고에 있던 전복이 모두 썩어버리자 해녀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월 7일 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1월 7일 하도리 해녀의 시위는 엄청난 결과를 몰고왔다. 일제 강점기 아래 수탈만 당하며 살았던 울분이 쌓인 가슴에 불을 놓은 것이다. 이미 목숨을 내 놓은 해녀들에게 총과 칼로 무장한 경관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렇게 제주 해녀항일운동의 흐름은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였다.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 제주 해녀 박물관
▲ 제주해녀 항일운동의 대표 5인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본명 고차동), 김계석 - 제주 해녀 박물관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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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 1000명 규모로 늘어난 2차 시위

1월 7일 하도리에서 시작하여 세화리 장터까지 행군한 1차 시위는 평대리에서 마무리되었다. 평대리의 면지부장이 책임지고 해녀조합과 교섭해주겠노라 철썩같이 약속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일체의 지정판매를 반대한다'는 해녀의 협상안과는 달리 오히려 '1월 12일 해산물 중 포패류에 대한 지정판매를 한다'는 광고문을 여기 저기 붙여 놓음으로서 해녀들의 분노를 최고점을 올려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해녀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1월 12일은 세화리 5일장이 열리는 날이고 또 때마침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 1932.12.11~1935.9) 제주도지사 겸 제주해녀어업조합장이 제주로 부임된 후 신년맞이 첫 순시를 하기 위해 세화리 장터를 통과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터였다. 해녀들은 1월 12일 대대적인 연합 시위를 벌임과 동시에 다구치 도지사를 직접 만나 담판을 짓기로 계획하였다. 하도리에서 첫 시위를 한 지 닷새만의 작전이다.

1월 12일 세화리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해녀들의 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반 경, 다구치 도지사를 태운 자동차가 세화리 장터 근처를 지난다는 정보가 마치 물 흐르듯 해녀들 사이로 전달되었다.

서로의 신호를 주고 받은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일제히 성난 파도와도 같은 기세로 '만세삼창'을 부르며 몰려들며 다구치 도지사의 자동차를 에워쌌다. 놀란 경관이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으나 천명이 넘는 해녀에다 구경꾼들까지 가세하여 그들은 군중들 속에 포위되어 꼼짝 달싹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해녀의 행동은 일사분란했다. 즉석에서 선출된 20여 명의 대표가 차례로 단상에 올라 "일본의 해산물 수탈정책에 죽음으로써 항쟁하자"는 연설이 이어지며 군중들로부터 엄청난 환호와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세화리 장터의 항일 시위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던 그 즈음 한 해녀가 급하게 뛰어 왔다. 포위되어 있던 다구치 도지사가 차에서 내려 도망가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를 입수한 해녀들은 연설을 중단하고 일제히 다구치를 향해 달려갔다. 주재소 정문 앞에서 다른 차를 타고 도망가려던 도지사는 순식간에 해녀들에게 또다시 포위되었고 놀란 경관이 허공에 대고 총을 쏘자 순간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경관 하나가 해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해녀들의 손에는 낫과 빗창이 들려 있었고 경관들은 총검을 겨누고 있었다. 여차하는 순간 피바람이 불어닥칠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칼끝에 목을 맡긴 해녀의 입에서 짧은 한마디가 우렁차게 튀어 나왔다.

"우리들의 요구에 칼로서 대하면... 우리는 죽음으로서 대하겠다" 

1932년 1월 24일자 기사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자 기사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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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일본의 <조일신문> 등에 해녀가 칼맞아 죽었다는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해녀의 목에 칼을 겨눴던 일본 경관이 기싸움에서 밀려 칼날을 모로 비껴 슬그머니 내려놓는 장면이 클로즈업되며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바로 그때 마치 시간이라도 맞춘 듯, 우도에서 배를 타고 달려온 해녀 300명과 시흥리의 해녀들이 목이 터져라 만세 삼창을 부르며 몰려오자 죽음의 경계를 넘은 해녀들 역시 목이 터져라 만세삼창으로 호응해주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소름이 돋을 정도의 기세에 압도되고 말았다.

잠시 후, 세화리의 주재소 밖에서는 천명이 넘는 해녀와 구경꾼들이 진을 치고 있고, 안에서는 20명의 해녀 대표와 다구치 도지가사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다. 해녀 대표는 또박또박 그들이 원하는 8개의 조항을 읽어 내려갔다.

<요구조건>
1. 일체의 지정판매 절대 반대
2. 일체의 계약보증금은 생산자가 보관
3. 미성년과 40세 이상 해녀 조합비 면제
4. 병 기타로 인하여 입어 못한 자에게 조합비 면제
5. 출가증 무료 급여
6. 총대는 리별로 공선
7. 조합재정 공개
8. 상인 옹호한 마쓰다(升田) 서기를 즉시 면직, 기타 생략

해녀의 요구 조건 8항목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자 기사 해녀의 요구 조건 8항목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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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그리고 해녀로서 너무도 당연한 권리가 철저히 짓밟히고 수탈당해온 그 오랜 세월이 서러워 '해녀들의 요구사항 8개 항목'을 다 읽어 내려간 부춘화 해녀 대표는 긴 한숨과 더불어 눈물을 쏟았다. 이를 지켜보던 다른 해녀 대표들 역시 울분을 참지못하고 언성을 높이며 "우리의 요구 조건을 속히 해결하라"고 다구치 도지사에게 소리쳤다.

다구치 도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떻게든 해결하겠노라 어물쩡 넘어가려했지만 해녀들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닷새 안에 해결하라며 날짜를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만일 약속을 어긴다면 금일보다 더 맹렬히 항쟁할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구치 도지사의 입에서 "닷새 안에 8가지의 요구조건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라는 약속을 받아내고서야 해녀들은 주재소를 빠져나와 자진해산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해녀들은 나타날 때도 성난 파도와 같은 기세였는데 해산할 때 역시 순식간에 사라져 뒤늦게 도착한 제주경찰서 소속의 무장경관 수십여 명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고 한다.

다구치 제주 도지사는 신년을 맞아 제주 도민들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기세등등하게 순시할 때, 어린 아이 및 도민이 동원돼 일장기를 흔들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영은커녕, 그가 타고 있던 폼나는 자동차는 돌에 맞아 유리창이 깨지고 찌부러졌으며 자신은 해녀들에게 포위되어 옴짝달싹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요구조건을 닷새 안에 해결하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제주의 첫 부임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피보다 진한 해녀의 의리, 긴급 체포된 청년교사 구출작전

다구치 도지사는 12일 해녀들에게 포위돼 굴욕적인 약속을 했지만, 약속을 지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다음 날 세천 고등계 주임을 비롯 6명의 형사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해녀의 항일운동 배후를 잡아들일 것을 명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형사 7명은 제주도민의 모습으로 변장을 하고 구좌면 일대의 마을을 돌며 탐문 수사를 벌였다. 그리고 마침내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의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 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해 그들의 거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1월 23일 제주 전지역에 삼엄한 비상경계령이 발포된다. 세화리의 문도배와 김시곤, 종달리의 한양택과 한원택, 연평리(우도)의 신재홍과 강관순, 그리고 하도리의 오문규 등 수십 명을 체포한 여러 대의 자동차가 길게 줄지어 달리며 본서로 호송하던 길에 놀라운 장면이 펼쳐진다.

1500명에 이르는 해녀들이 빗창과 돌맹이로 무장하고 도로를 가로 막고 선 것이다. 문 밖으로 얼굴만 내밀어도 일본 순사가 잡아간다는 무시무시한 비상경계령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경관이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며 현실을 파악하기도 전에 커다란 함성이 몰려왔다.

해녀들의 행동은 조직적이었다. 돌과 빗창으로 자동차의 유리를 박살내고 문짝을 부수자 한 편에서는 체포돼 있던 청년 교사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빼돌린 것이다. 1500명이나 되는 인파에 묻혀 청년 교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무장한 경관이 총을 쏘며 뒤쫓았다. 그 와중에 임신한 해녀가 두 명이나 낙태를 한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체포된 청년 교사들은 이미 도피한 상태였지만 흥분한 해녀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해녀 1500명 시위
▲ 조선일보 1월 26일 기사 해녀 1500명 시위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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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송 차량이 급습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읍내에서는 세화리로 수도 없이 연락하였지만 이미 세화리는 1500명의 해녀들과 경관들의 몸싸움으로 연락이 끊긴 상황이 되고 말았다. 급보를 접한 본서에서는 서둘러 각지의 주재소원을 비상소집하여 무장경관대를 편성하여 현장에 급파시켰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이웃 마을 해녀들 역시 속속 모여들어 세화리는 그야말로 전시상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해녀와 경관들의 대치는 저녁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다구치 제주 도지사는 해녀와의 약속을 지키기는 커녕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청년 교사들을 체포한 사태에 대해 해녀들의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 또 다른 해녀 대표들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호송되지 않았는가. 성난 해녀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폭력으로 진압하던 경찰은 작전을 바꾸었다. 그리고 총과 칼을 접고 해녀를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뒤에서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어 두었다. 뒷날 옷에 도장이 찍힌 해녀들을 체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잡혀간 해녀들을 풀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며 일단 1월 23일의 사태는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세화리를 중심으로 한 하도리와 종달리 시흥리 오조리 그리고 우도.  전화도 없던 그 시절,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하루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이 지역의 해녀 1500명이 서로 비상연락을 취하여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삼엄한 비상경계령을 피해 1월의 모진 바람 속에 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 체포되어 호송중이던 차량을 급습하여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를 탈출시켰다.
 해녀항일운동이 일어났던 세화리를 중심으로 한 하도리와 종달리 시흥리 오조리 그리고 우도. 전화도 없던 그 시절,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하루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에 이 지역의 해녀 1500명이 서로 비상연락을 취하여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삼엄한 비상경계령을 피해 1월의 모진 바람 속에 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가 체포되어 호송중이던 차량을 급습하여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를 탈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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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제주 해녀, 세화리 경찰 주재소 습격 사건

다음 날 1월 24일 새벽 , 제주의 전지역에 비상경계령이 강화되어 온 마을이 고요 속에 잠겨있을 때, 세화리와 하도리의 벌판을 가득 메운 갈대가 일렁인다. 얼핏 보면 바람결같지만 실상 그 안에는 바람보다 가벼운 몸짓으로 달리는 해녀들의 모습이 숨어있다. 그 숫자는 대략 500명. 이들은 지금 세화리 주재소로 향하는 길이다.

전날 경관들로부터 '체포한 해녀들을 수일내로 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해산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거짓 약속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다. 그럼에도 자진해산해 준 것은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기 위함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화리 경찰 주재소 습격 작전'이다.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한 500명의 해녀들이 세화리 경찰 주재소를 에워싼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 보니 일본 경찰이 꾸벅꾸벅 졸고 있고 한쪽 철창 안에 어제 현장에서 체포된 해녀 100여 명이 갇혀있다.

잠시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며 타이밍을 맞추고 한 순간, 우뢰와도 같은 함성을 지르며 돌로 유리창을 박살내고 들어가 철창을 열어 갇혀있던 해녀들을 구출한다. 토끼잠을 자던 경찰이 놀라 호루라기를 불고 총을 쏘아대지만 이미 기선은 해녀들이 장악한 후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돌과 빗창이 총칼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날 잡힌 100여 명의 해녀들을 도피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대신 주재소 급습 작전을 지위한 부춘화 해녀를 비롯 34명이 또다시 현장에서 체포돼 철창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주 해녀 박물관
▲ 1932년 당시 체포된 제주해녀항일운동가들의 색인부 제주 해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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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6일 체포되는 청년 교사들을 지키려는 800여 우도 해녀

1월 26일 새벽 일본 경찰이 배를 타고 우도로 숨어든다. 그리고 1월 23일 체포되어 자동차로 호송되다가 극적으로 구출된 청년 교사들과 해녀대표들이 우도에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소리없이 포구에 배를 대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수많은 경관이 마을로 접어들자 여기 저기서 왕왕 개들이 짖어대는 바람에 온 섬이 잠에서 깨어나고 청년 교사들이 또다시 체포되자 우도가 발칵 뒤집히고 만다.

경찰에 의해 끌려가는 청년 교사들을 구하기 위해 해녀들이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해녀들은 빗창이며 호미를 챙길 겨를도 없이 맨 손, 맨 몸으로 달려 들었고 경관은 칼을 휘두르고 총을 뽑았다. 결국 40여 명의 청년 교사와 해녀 대표들이 굴비 엮기듯 줄줄이 끌려가고 맨발로 뛰어나온 800여 명의 해녀들은 이제 막 시동을 걸고 떠나려는 뱃머리에 달라 붙어 있는 힘껏 배를 흔들었다. 기우뚱 기우뚱 배가 넘어지려할 때 경관들이 일제히 총을 쏘아 대자 놀란 해녀들이 바닷 속으로 빠져들었다.

허우적거리는 해녀들, 끝까지 경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해녀들로 포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경관들은 칼을 휘두르고 허리띠를 휘두르며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결국 배는 바다로 미끌어지고 해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보고만 있을 우도의 해녀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둘러 풍선을 바다에 띄워 일본 경관의 배를 쫓아가기 시작했으나 거친 바다에서 내 달리는 일본 경관의 배를 풍선배가 따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서 잠깐 제주해녀항일운동이 우도와 어떤 특별한 연관이 있는지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해녀항일운동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하는 야학당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갔고 그 야학당이 가장 활발하였던 곳이 바로 하도리와 우도였다.

해녀항일운동에서 해녀의 대표였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모두 하도리 야학당 1회 졸업생으로서 문무현, 부대현, 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 민족 교육을 받았다. 또한 강관순, 신재홍, 김성오는 우도의 영명의숙 교사였다. 이들 모두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형을 집행받았는데 그 죄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가택침입, 보안법 위반, 예배방해, 협박, 폭력행위 등이었다.

우도의 해녀들은 1월 12일 세화리 장터의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300여 명의 해녀들이 닷새 치 양식을 어깨에 울러메고 손에는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풍선에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우도와 성산간의 뱃길은 바람이 없어도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하다. 게다가 때는 바람이 모질기로 유명한 1월이 아닌가. 추위와 바람을 무릎쓰고 작은 풍선 한 대에 30여명이 꼭꼭 끼어앉아 항일운동을 하러 가기도 전에 그들은 바다에 목숨부터 걸어야했으니, 그 당시 우도의 영명의숙에서 비롯된 항일의식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우도의 강관순 열사는 감옥에 갇혀서도 해녀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지어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해녀가>는 삽시간에 제주의 모든 해녀들에게 퍼졌으며 지금도 해녀들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제주도 구좌읍 해녀박물관
▲ 강관순 항일운동가가 감옥에서 지은 해녀가 제주도 구좌읍 해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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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보다 더 감동적인 실화, 제주해녀항일운동

2016년 8월, 나는 84년 전의 그 날을 상상하며 세화리의 들판에 서있다. 세화리 장터, 바로 이곳에서 제주의 해녀들은 일본인 다구치 도지사를 에워싸고 그들의 요구사항 8개 조항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지 않았는가.

세화리 자동차 길목, 바로 이곳에서 1500명의 해녀가 돌과 빗창으로 무장하고서 경관의 차를 습격하여 체포되어 호송 중이던 청년 교사들을 구출하지 않았는가. 세화리 경찰 주재소, 바로 이곳을 습격하여 철창 속에 구금되어 있던 해녀를 구해내지 않았던가.

그랬다. 제주의 해녀들은 그랬다. 그동안 잃어버린 그들의 주권과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가르쳐준 청년 교사들이 왜놈들에게 잡혀가는 것을 절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다. 세계의 전쟁 역사상 체포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총칼 앞에서 온몸으로 막아선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여성의 몸으로?

<승리의 탈출>(1982)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과 연합군 포로와의 축구 시합을 다룬 픽션 영화이다. 엔딩 부분에서 관중들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내려와 연합군 포로가 옷을 갈아입고 탈출할 수있도록 도와주는 장면을 보고 관객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나는 '제주 해녀의 일본경찰 주재소 습격사건'이 할리우드 영화보다 100배 이상 더 감동적이다. 게다가 실화이지 않은가?

목에 칼을 겨누는 일본 경관을 향해 "우리의 요구에 칼로서 대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서 대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 일본 도지사를 포위하고 그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내는 장면,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어서도 해녀 1500명이 모여 길목을 가로막고 청년 교사들을 구출하는 장면, 그 와중에 현장에서 체포된 해녀들을 구해내기 위해 일본 경찰 주재소를 새벽에 습격하는 장면. 피신해 있던 청년 교사들이 또 다시 체포되자 800여 명의 우도 해녀들이 맨몸으로 막아서며 뱃머리를 흔들어 대던 장면.

부춘화 해녀 대표가 일본 경관의 체포에 순순히 응하며 "내가 주모자이니 나를 잡아가고 다른 해녀들은 풀어주라"면서 자진해서 체포당하는 장면 등등 이 모든 사실이 일제 강점기 그 시절 제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좀더 관심을 기울이고 이런 역사적인 기록이야말로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겨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해피엔딩, 해녀의 역사

에는 1932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우도의 지식인 강관순 열사가 작곡한 <해녀가>가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그 당시 <해녀가>는 모든 제주 해녀들의 애창곡이었다.
▲ 우도해녀항일기념비 에는 1932년 해녀항일운동으로 잡혀간 우도의 지식인 강관순 열사가 작곡한 <해녀가>가 기록되어 있다. 1930년대 그 당시 <해녀가>는 모든 제주 해녀들의 애창곡이었다.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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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 천진항의 해녀항일운동기념비를 다시 쳐다본다. 현재 제주해녀는 국가중요어업유산 1호로 선정됐고, 제주시는 해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한 2017년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한다는 후속대책까지 마련하고 있다. 여성의 직업으로서는 매우 독특한 해녀의 존재에 대해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으니 파란만장했던 제주 해녀의 역사는 해피엔딩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제주에서 물질하는 해녀들 모두 84년 전 항일운동을 했던 그 분들의 따님이고 손녀라는 사실을 더욱 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조선일보> 기사 :  1932년 1월 14일, 1월 24일, 1월 26일, 1월 27일, 1월 28일, 1월 29일, 3월 4일, 3월 5일 
<동아일보 기사> :  1932년 1월 27일, 1월 29일
<우도지> <제주 해녀 사료집>



태그:#제주해녀항일운동, #해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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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우도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글쟁이입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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