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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문화가 2016년 12월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결과를 앞두고 있다.
▲ 바다에서 물질하는 제주 해녀 제주해녀문화가 2016년 12월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결과를 앞두고 있다.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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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해녀에 홀딱 빠져 지내고 있다. 그래서 올 봄 세화리의 해녀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해녀항일운동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고 나오는 길에 세화리의 해녀옷 전문 맞춤집에서 고무옷을 맞춰 놓고는 매일매일 쳐다보며 해녀가 돼 있는 혹은 해녀가 되고 싶은 상상을 하며 지낸다. 제주, 그것도 우도에서의 정착 2년 여의 생활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지난해 2월의 기억이다. 내가 제주의 우도에 들어온 지 딱 한 달 되던 날, 바다로 향하던 해녀 삼춘들을 처음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맨 뒤에서 졸졸 따라갔다. 삼춘들은 고무옷에 무거운 납덩이를 허리에 차고 오리발과 테왁 그리고 망사리를 짊어지고 검고 울통불퉁한 바닷가의 현무암 바위를 마치 징검다리 건너듯 쉽게 쉽게 걸어갔다. 나는 무게중심을 잃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뒤뚱거리며 따라갔다.

바닷가에 앉아 쑥으로 수경을 닦고 오리발을 준비하는 삼춘들 가까이에 앉아 입수 준비에 바쁜 모습을 바라봤지만 그 누구도 싫은 내색하지 않았고 신경쓰지 않았다. 두꺼운 점퍼에 털모자까지 눌러 쓴 내 모습은 이 섬에서 이방인 그 자체였다. 나는 털장갑을 벗고 잠시 맨손을 바다에 들이밀어 봤다가 마치 뜨거운 물에 데이기라도 한듯 호들갑을 떨며 시린 손의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다가 바로 앞에 앉은 해녀 삼춘과 그만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뭐했어요?"

바람을 타고 찌르듯 날아오는 질문에 나는 "이 추위에 바다에 들어가시기에 물이 얼마나 차가운가 궁금해서 손을 넣어 보았다"고 대답했다. 해녀 삼춘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신다.

바보같은 질문인줄 알면서도 나는 바다에 들어가면 춥지 않느냐고 여쭤봤다.

"바다에 손담가 보니 어때? 춥지! 많이 춥지만!"

삼춘은 여기까지 말하고 오리발을 신고 수경을 머리에 딱 맞게 고정시킨 후 바다에 몸을 담그며 말했다.

"그래도 바다는 우리의 일터야. 그리고 바닷 속은 오히려 따뜻해."

삼춘의 몸은 이미 바다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 말은 메아리처럼 내 귓가에 맴돌았다. 조금 더 멀어지기 전에 나는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

"언제 나오세요?"
"이따 3시 즈음~."


바다로 향하는 해녀 삼춘의 모습을 촬영한 시각은 오전 9시 32분이었다. 2월 그 엄동설한에 장장 6시간을 바다에서 작업한다는 사실에 나는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 해녀의 존재는 내게 마치 우상처럼 다가왔다.

너무 추우면 바다가 이렇게 검게 보이는 것일까?
▲ 엄동설한 2월에 바다에 입수하는 해녀삼춘 너무 추우면 바다가 이렇게 검게 보이는 것일까?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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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하고도 9개월이 지난 2016년 11월 초하루 날 아침. 나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을 듣고 신났다.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우도에서 살며 해녀 삼춘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해녀의 역사를 공부하며 지낸다. 그리고 틈틈이 삼춘들을 인터뷰하며 그분들의 생각을 기록해두는 작업도 하고 있다. 이런 나에게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 등재 건은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온종일 온라인 포털 사이트에서는 한 달 뒤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뉴스로 가득했지만, 나는 정작 해녀 삼춘이 이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우도는 한창 땅콩 농사의 수확으로 바쁜 시기라서 많은 해녀 삼춘을 만날수는 없었지만 잠시 짬을 내어 주신 분들의 생각을 정리하여 이 자리를 통해 전해드리고자 한다.

사실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등재 건은 지난해부터 내가 관심있게 보아왔던 터라 그동안 틈틈히 해녀 삼춘들의 의견을 물어두기는 했었다. 아주 나이 많은 해녀 삼춘들은 그닥 큰 반응이 없었고 젊은층을 비롯 70대까지는 이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아주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유네스코에 등재되면 좋다지만 그런데 정작 되고 나면 우리 해녀들에게는 어떤 점이 좋은 거지?'

사실이 그렇다. 각종 언론매체는 세계적으로 제주 해녀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고 또한 국제적인 기구를 통해 우리 제주 해녀의 문화가 계승 보존될 수 있도록 도움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인 해녀 당사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의 의미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의 수호 역시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돼야 한다."

이것은 유네스코의 헌장 내용으로서 유네스코가 평화의 상징이며 평화를 위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네스코는 국제연합교유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의 약자이며 제2차세계대전 직후 교육과 문화의 진흥, 그리고 과학기술의 평화적인 이용을 염원하며 창설됐다.

유네스코의 활동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고대문화유적 등 세계의 문화재 복구와 보존 등에 큰 힘을 쏟고 있다. 우리나라는 1950년에 이 기구의 55번째 회원국이 되었고 2016년 현재에는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2001년)을 비롯 제주칠머리당영등굿(2009년) 등 18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만일 '제주해녀문화'가 2016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현재 해녀의 고령화 현상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해녀가 국제기구의 도움 속에 계승 보존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세계인들의 관심과 더불어 여성전문인력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에 더욱 더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잠수부의 대표적인 예로 한국과 일본의 해녀와 해남, 희랍의 해면채취잠수부(sponge diver) 그리고 남태평양의 진주조개잡이(pearl diver) 등을 들 수 있다(<해녀의 잠수양상/박양생>).

그러나 제주 해녀는 선진화된 어업 방식을 거부하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잠수문화를 계승해 장비 없이 바다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데 바로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적 방식이 생태적으로 지구의 자연환경에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유네스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닐까.

해녀는 일반적으로 수심 5미터에서 10미터 정도까지 잠수하며 1분에서 2분 정도까지 숨을 참고 물질한다. 그러나 과거의 전설적인 대상군 혹은 상군의 경우 수심 20미터까지도 들어가 최대 4분까지 숨을 참고 물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때는 고무옷도 없이 물소중이만 입고 잠수하던 시절이었다.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고 바다를 나서는 해녀의 모습. 요즈음 해녀는 대단히 강인한 여성전문직업으로서 세계인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있다.
▲ 6월은 천초의 계절 우뭇가사리를 채취하고 바다를 나서는 해녀의 모습. 요즈음 해녀는 대단히 강인한 여성전문직업으로서 세계인들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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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을 가리지 않고 풍랑만 아니라면 눈이 오거나 비가 내려도 바다에서 물질한다. 1960년대, 미 공군은 바다에 불시착한 조종사들이 저체온증으로 곧바로 숨지는 것을 보며 한 겨울 영하의 날씨에도 바다에 들어가 물질하는 제주 해녀를 연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30년 동안 미 공군 연구에 참여했던 박양생 교수는 "에스키모에도 없고 어떤 집단에서도 불 수 없는 한랭적응 현상이 있어요. 한랭적응에 관해서는 한국의 해녀들이 세계 챔피언입니다"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2005년 2월 15일 <뉴욕타임스>에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잠수기술을 가진 용감한 잠수부'라는 제목의 해녀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세계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특히나 여성의 직업이라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더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우도의 해녀 삼춘들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만일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다면?

김혜숙 해녀(우도 / 1959년생 / 15살부터 해녀 시작) : "만일 이를 계기로 제주의 해녀가 여성전문직업으로서 세계가 인정해주는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어멍 세대 그리고 할머니 세대에게 그 영광을 돌리고 감사 또 감사드려야 할 거예요.

우리야 지금 고무옷과 수경 그리고 오리발도 신고 바다에 들어가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있었나요? 그저 물소중이 하나 입고 그 추운 겨울에도 살이 터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바다에 들어가 물질하셨지요.

그렇게 해서 자식을 키워주셨고 해녀라는 직업을 대대로 물려주신 덕에 우리가 지금 이 모든 편의를 다 누려가며 바다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한편으로 마음이 너무 아파요."

(김해숙 해녀/ 1959년생/ 15살부터 해녀 시작)
▲ 김해숙 해녀 (김해숙 해녀/ 1959년생/ 15살부터 해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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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해녀(우도/ 1950년생 / 12살부터 해녀 시작) : "하이고, 우리 어멍이 살아계셨으민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멍은 상군이라서 누구보다 멀리 그리고 깊게 자맥질하셨는데...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등재되었으면 하는 이야기는 10년쯤 전부터 돌았는데 그때는 실감나지 않았죠.

작년까지만 해도 나 살아 생전에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을 볼 수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한 달 후면 그 결과가 나온다하니 참으로 실감나지 않고 기쁘지만 어떻게든 꼭 등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나는 특별한 종교가 없지만 우리 바다의 용왕신에게 매일매일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순애 해녀(우도/ 1957년생/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해녀 시작) : "아... 정말 우리 제주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도 내 평생 고생했던 모든 아픈 기억이 보상받는 기분일 거예요. 나는 바다에서 물질도 하고 또 톨카니에서 이렇게 해산물 장사도 하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엄마가 해녀라는 사실에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라고 가르쳐왔죠.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해녀라는 직업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달라요. 여기서 이렇게 장사하면 외국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해녀인 저에게 엄지를 척 올려주며 함께 기념촬영하는 것을 너무도 기뻐하는 거에요. 처음에는 왜 그런지 몰랐죠. 하지만 우리 해녀가 유네스코의 등재를 앞두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 저는 해녀라는 저의 직업이 자랑스러웠어요.

정말 이번 기회에 꼭 우리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 제주의 어멍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이번 기회로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분들 덕분에 현재의 우리 해녀들이 있는 거잖아요. 정말 훌륭한 분들이세요. 저의 어린 기억에 동생을 업고 바닷가에서 어멍을 기다리던 장면이 있어요.

어머니가 바다에서 나오자마자 불턱으로 들어가 모닥불 앞에서 동생에게 젖을 물리셨죠. 모두들 추위에 입술이 보라색으로 변하셨지만 함께 웃고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어멍들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자리를 통해서 제 자식들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어요.

엄마는 나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고생한 결과 너희도 잘 키울 수 있었고, 개인적인 성공도 이루었고 또 우리 해녀들이 단체로 이렇게 세계에서 인정해주는 여성 전문인력으로 거듭났잖아. 엄마는 바다에서 가장 행복하고 그래서 파파할머니가 되어도 해녀를 계속할 거야."

- 해녀라는 여성전문직업인의 입장에서 행정적 부분에 바람이 있다면?

강영수(<바다에서 삶을 캐는 해녀> 저자) : "해녀들이 바다에 들어가 한 평생 일하다보니 수압 때문에 만성 두통은 물론이려니와 귓병도 생기고 콧병도 생깁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죠. 해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늘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뇌선이나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복용하는데 이것은 의사의 전문적인 소견에 의한 처방이 아니라 의료보험도 적용되지 않아요. 무엇보다 오랜 세월 진통제 복용에 따른 부작용 우려가 가장 심각하지요.

하지만 우선 당장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알면서도 약을 먹는데 이를 위한 전문적인 의학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일 제주의 해녀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된다면, 아니 만일 되지 않더라도 우리 해녀를 전문직업인으로 인정하는 차원에서 해녀의 산재보험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이비인후과에서 귀와 코 등의 검진도 받아가며 치료할 수 있는 의료적인 지원이 있어야 해요. 해녀라면 누구나 귀에서 소리가 들리는 이명현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불편해하며 살아가고 있거든요.

제주의 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면 세계적인 인정과 홍보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주인공인 해녀들에게는 큰 의미없는 형식적인 간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1950년생 12살부터 해녀 시작
▲ 김수자 해녀 1950년생 12살부터 해녀 시작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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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순애 해녀 : "정말 행정적인 지원을 해줄까요? 그렇다면 저는 가장 먼저 소라의 공식적인 수매를 보장해줬으면 해요. 예전에는 소라를 일본으로 수출했기 때문에 수협에서 일괄 수매해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소라는 10월부터 4월말까지 근 6개월 동안이나 작업하는데 대부분 개인적으로 알아서 판로를 개척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어요. 이와 같은 문제를 남겨놓고 세계적인 전문여성직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죠?"

김혜숙 해녀 : "사실 1970년대에 물질을 시작한 우리들은 이런 저런 혜택을 받으며 일해왔어요. 고무옷이나 오리발 등등이요. 하지만 우리 어멍세대는 정말 고생만 하셨죠. 그래서 저는 현존하는 나이든 고령화 해녀를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우리는 아직 젊고 또 금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편이지만 나이드신 어르신들은 다르거든요. 특히나 독거노인도 많아 그분들을 위한 의료지원 등의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해녀의 고령화 현상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처한 후배 해녀 양성에 대한 의견은?

김수자 해녀 : "만일 누군가 해녀가 되기를 원한다면 마음같아서는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키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작년과 올해에 두 명이나 새로운 해녀가 들어왔어요. 요샛말로 하면 해녀 새내기인 셈이죠.

처음 걱정과는 달리 두 분 모두 바다에서 잘 적응하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일부에서는 바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작업하기 때문에 자칫 해녀의 수가 늘어나면 자신의 해산물 수확량이 줄어들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해녀도 있기는 해요.

그래서 해녀의 고령화 추세에 따라 사라질 위기에 있다고 걱정은 하면서도, 솔직히 새로운 해녀가 등장하면 그닥 반가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죠. 하지만 이것은 극히 일부이고 또 사실, 해녀가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해산물의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기분상으로 그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는 것이죠.

사실 이제 막 시작한 새내기 해녀가 아무리 노력한들, 몇십 년 평생을 바다에서 물질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선배 해녀들은 새내기 해녀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야 해녀가 물질을 하기 위해 바다로 향하면 '칠성판을 짊어지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직업이었어요. 그만큼 힘도 들고요. 그때는 모두들 먹고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최선을 다했기 때문인데요. 지금은 사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세상이잖아요. 조금 덜 채취하고 욕심을 버리면 두 번 들어갈 거 한 번만 들어가게 되고 무리하지 않으니 뇌신이나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될 거예요. 나는 평생을 바다에서 물질했지만 지금도 바당으로 향할 때면 마음이 설레입니다. 빨리 가고 싶어서요."

김혜숙 해녀 : "가장 절실한 문제이죠. 바다는 영원히 존재하는데 해녀가 사라져서는 안되잖아요. 해녀 경험자로서 권하고 싶은 여성 직업입니다. 물론 능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수입도 좋은 편이고 무엇보다 월급받는 매인 몸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프리랜서라는 점이 여자에게는 편리하겠죠.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도 충분히 가능한 직업이고요.

다만 한가지, 만일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있다면 가장 먼저 욕심을 버리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하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우리야 어려운 시절 죽기살기로 바다에서 물질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잖아요. 따라서 이 직업은 충분히 자신이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바다에서 자연과 더불어 하는 일이니까요.

욕심만 버리고 물질한다면 굳이 뇌선이나 타이레놀과 같은 진통제를 먹지 않고서도 충분히 일할 수 있어요. 앞으로 해녀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갖고 도전하고자 한다면 부디 이 좋은 직업을 즐기면서 하길 바라요. 나 역시 한평생 힘들게 살아온 습관으로 지금도 바다에만 들어가면 욕심이 생기는 바람에 스스로를 잘 다스리려 노력해요.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굳이 이렇게 무리할 필요없다, 쉬어가며 하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스스로에게 다짐하곤 하죠. 물론 진통제도 먹지 않고요."

해녀 삼춘의 모습
▲ 2015년 2월 엄동설한에 바다로 향하는 해녀 삼춘의 모습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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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순애 해녀 : "나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생 혹은 딸이 해녀를 하겠다면 말릴 생각이었죠. 그만큼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요. 욕심을 조금만 버리고 일을 즐긴다면 이 해녀라는 직업은 대단히 유용하고 보람있거든요.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바다에 들어가면 해산물이 가득하고 그것을 채취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힘든 줄도 모르고 쉴틈 없이 반복적으로 작업을 계속하게 되거든요. 또한 건강만 허락된다면 나이 80이 넘어도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고요.

지금도 우리 동네에는 아흔살에 가까운 분이 물질을 하십니다. 나이들어서도 운동삼아 할 수 있는 직업이 그리 흔하지는 않잖아요, 단 한 가지 욕심을 조금 버리고 즐기며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즘 제주로 들어오는 도시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동네에서 함께 살며 공동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녀에 익숙해지는 것도 좋은 방법인것 같아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제주 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마치며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우도의 해녀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어멍을 먼저 떠올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분들이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그리고 그 덕에 우리가 호사를 누리는 것은 아닌지'를 먼저 염려했다. 해녀의 문화가 세계의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행정적인 도움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작 유네스코에는 등재가 됐는데, 해녀가 사라지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과 후배 해녀들이 대를 잇게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 해녀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해결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박한 바람들이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해녀가 현실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 이것은 굳이 유네스코의 등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제주의 역사와 해녀의 역사를 공부하고 직접 현지에서 부대끼며 살지만 우리나라의 해녀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역사적으로 어떤 고통과 수난의 시대가 있었는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일뤄낸 현재의 성공 신화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공부하며 정리해 놓았던 <제주 해녀의 역사>에 대해 연재할 생각이다.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제주의 해녀문화는 유네스코라는 국제적인 기구의 등재와는 상관없이 우리 대한민국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할 사회적인 이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시에서는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기원하며 지속적으로 제주의 해녀들을 초대하여 제주 해녀축제 잔치마당을 펼쳐왔다. 2015년 자료 사진
▲ 해녀축제 현장 제주시에서는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기원하며 지속적으로 제주의 해녀들을 초대하여 제주 해녀축제 잔치마당을 펼쳐왔다. 2015년 자료 사진
ⓒ 고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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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머리당 영등굿은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이는 물질하는 해녀의 안녕을 바람신에 비는 해녀의 정신적인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2015년 우도의 영등굿 자료사진
▲ 칠머리당 김윤수 심방 칠머리당 영등굿은 2009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이는 물질하는 해녀의 안녕을 바람신에 비는 해녀의 정신적인 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 2015년 우도의 영등굿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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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문화재청(청장 나선화) 및 제주시에서는 <제주해녀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위하여 오랜 시간 공들여 왔다.

무엇보다 제주 해녀 공동체와 연구자, 무형유산전문가, 제주도 내 모든 마을의 어촌계 의장과 100개의 해녀협회가 동의하며 등재 신청의 모든 단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2009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 조례'를 제정하여 해녀 문화 발굴과 조사, 해녀 전수생 지원 사업 등을 실시했고, 2011년에는 해녀문화 세계화 기본계획을 세워 '해녀의 날'을 지정하면서 해녀문화교육센터 및 해녀문화 체험장 조성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는 무형문화유산 국가목록에 등재하였고 2015년에는 제주해녀어업을 제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만일 <제주해녀문화>가 2017년에 열릴 예정인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의 등재까지 된다면 국가중요어업유산,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와 더불어 세계화 3관왕의 꿈이 달성되는 셈이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산하 평가기구는 2016년 올 해, 총 37건의 대표목록 등재신청서를 심사하여 18건은 등재(inscribe), 19건은 정보보완(refer)으로 권고했으며 등재불가(not to inscribe)는 한 건도 없었다. 이를 통해 신청을 한다고 해서 모두 등재되는 것이 아니라 위원회의 엄격한 심사기준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1차는 통과되었고 2차 결과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제주해녀문화>는 18건의 등재에 속한다. 그리고 올 12월 중순 경 최종 결정이 날 예정이다.

[참고 사이트]

문화재청(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유네스코한국위원회(
http://www.unesco.or.kr/)

[인터뷰에 도움을 주신 분들]
김수자 해녀(우도/ 1950년생/12살부터 해녀 시작)
김혜숙 해녀(우도/ 1959년생/ 15살부터 해녀 시작)
우순애 해녀(우도/ 1957년생/ 초등학교 2학년부터 해녀 시작)
강영수(바다에서 삶을 캐는 해녀의 저자)
정은선 주무관(문화재청 세계유산팀)
김귀배 팀장(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덧붙이는 글 | (1)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의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와 더불어 제주의 해녀가 세계인이 인정하는 전문여성직업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땅콩수확철의 바쁜 시기에도 불구하고 인터뷰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3) '삼춘'이라는 표현은 제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윗 어른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입니다.



태그:#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등재, #해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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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우도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글쟁이입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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