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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열한 계단> 책을 읽고 채사장과 지인이라는 가상 상황을 설정해 작성한 서평입니다. - 기자 말

수업시간에 늦어 헐레벌떡 뛰어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오랜만이네. 급하지 않으면 나랑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을래?" 채사장이 말했다. 수업이 급하긴 한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못 본 척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린 함께 계단으로 가기로 했다.

채사장은 검정색 츄리닝 바지에 광택이 나는 검정색 구두. 항상 그렇게 입고 다녔다. 신입생인데도 말이다. 대학 내내 다른 곳에서 그를 만난 적은 없었다. 그는 항상 도서관에 있었다. 그렇게 3년 동안 하루에 한 권씩 읽어나갔다.

채사장, 웨일북, 2016
▲ <열한 계단> 채사장, 웨일북, 2016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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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불편함을 권한다

오랜만에 채사장을 만났다. 그는 2014년에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채사장, 한빛비즈, 2014)을 펴내며 갑작스럽게 베스트셀러 작가로 데뷔했다. 그는 <지대넓얕>에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예술 등을 이해하는 방법을 썼다. 이후로 해마다 한 권씩 책을 내는데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사실 그가 지은 책들은 새롭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점이 바로 채사장이 팔리는 이유였다. 새롭지 않되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가지를 쳐내고 몸통만 볼 수 있도록 한 것. 그는 세계를 단순화하고 그 속에서 단단한 구조를 드러냈다. 그래서 재작년과 작년, 채사장은 히트쳤다.

채사장의 이번 이야기는 이전의 이야기들과 다르다. 이전 책들이 '세계'에 대해 다뤘다면 이번에는 '나'에 초점을 맞췄다. 채사장의 어린 시절로 깊숙이 파고들어 가서 점점 성장해 가며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이야기했다.

"이전까지 나는 주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왔지.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왜냐하면 세계는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담아내는 '자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해." (6쪽)

채사장은 책을 읽는 방식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익숙한 책을 선택하는 방식. 이런 방식의 사람들은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와 관련된 좀 더 심도 있는 책을 선택한다. 또 다른 방식은 불편한 책을 고르는 것이다. 어떤 책을 읽고 그 세계에 공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읽는다. 전자는 하나의 분야를 깊게 파고들고 후자는 지평을 넓혀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후자의 방식을 추천한다. 그런 불편한 책들을 읽으라고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불교나 힌두교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종교인이라면 철학이나 과학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어떤 책 속에서 불편함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네가 방금 새로운 대륙에 도착했다는 존재론적 신호야. 이제 기존의 세계는 해체될 것이고, 새로운 세계와 만나 더 높은 단계에서 나의 세계가 재구성될 거야. 하나의 계단을 더 올라가는 거지." (19쪽)

채사장의 계단
 채사장의 계단
ⓒ 김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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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열한 계단>(채사장, 웨일북, 2016)이 그런 불편한 책이었다. 티벳 사자의 서, 우파니샤드를 다룬 아홉 번째 계단과 열 번째 계단이 그랬다. 죽음 혹은 죽음 이후에 대해 다루는 것이 내게는 아직 낯설었다. 채사장이 말한 대로 유물론적 사고가 내 뿌리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자리 잡은 듯하다. 증명할 수 없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는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로 사람들은 현실과 밀접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이야기. 이런 주제로 진행되는 강연은 호응과 참여가 좋고, 그러면 나도 즐거워. 하지만 실제로 내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신비에 대한 것이야. … UFO나 피라미드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단적으로 말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야. 나는 누구인지, 세계는 무엇인지, 나와 세계는 도대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나는 언제나 궁금했어." (366-367쪽)

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해

여덟 번째 계단을 오르며 채사장은 어렵게 자신의 사고 경험을 말했다. 제주도로 회사 동료들과 간 휴가에서 차량 전복 사고가 났었다. 차는 몇 바퀴를 굴렀다. 동료 몇 명은 크게 다쳤다. 용케 채사장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했다. 일상이 무너졌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입원했다.

"그때 나에게 하나의 큰 위로가 된 노래가 메르세데스 소사의 'Gracias a la vida'였어. 그녀의 음성은 귀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에 직접 호소하는 듯했어." (298쪽)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르헨티나의 가수다. 그녀는 '새로운 노래 운동(누에바 칸시온)'에 영향을 받았다. 이 운동은 남아메리카의 민속 음악을 발굴해 민중 스스로 미국의 억압에 저항하게 하는 문화 운동이었다. 소사의 고국인 아르헨티나는 계속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었다. 군부정권은 '새로운 노래 운동'을 탄압했다. 소사는 이에 맞서 노래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소사는 아르헨티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민중들을 위해 노래했다. 1978년 10월 23일 소사는 군부 정권에 체포됐다. 다음 해에 소사는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당한다. 소사의 망명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1982년, 소사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기로 한다. 아직 군부독재 아래 있던 아르헨티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선택이었다. 그녀는 조국으로 돌아가 무대에 섰다.

"저는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 인입니다." 그녀는 대표곡 'Gracias a la vida'를 불렀다.

삶에 감사해. 내게 너무 많은 걸 주었어.
샛별 같은 눈동자를 주어
흑과 백을 온전히 구분하게 하고,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보게 하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 내 님을 찾을 수 있게 했네. (310쪽)

"추악한 현실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지켜나가는 방법은 수용이었어. 고결한 이상도, 비루한 현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었어." (286쪽)

소사는 자신의 삶과 목소리로 채사장을 토닥였다.

아차, 수업이 늦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각자 강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야겠다. 소사의 음악을 들으며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야겠다.


열한 계단 - 나를 흔들어 키운 불편한 지식들

채사장 지음, 웨일북(2016)


태그:#열한 계단, #열한계단, #채사장, #지대넓얕, #시민의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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