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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잘 걸러진 언어로 고향을 몽환적으로 묘사한 김승옥의 '무진기행'이든, 관념적 언어들로 채운 이문열의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 든 고향은 모두에게 항상 목에 걸려있는 목울대 같은 것이다.

아무 기능이 없는 것 같지만 정작 감정이 복받칠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작가 만이 아니다. 중국 작가 쟈핑와 등 수많은 작가들은 문혁 등을 치러냈던 고향의 신난한 기억이 문학 세계를 중심으로 이루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향에는 그 시기를 같이 보낸 가족과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독한 영혼은 허공을 배회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쟈핑와 '친구' 중에서)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은 귀향길에 있는 우리들에게 인지 모르겠다.

나 역시 설날 전날 고향에 도착해, 1박2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귀경했다. 지금도 가끔 보는 많은 시골 친구들 가운데 귀향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났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 고향에 내려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머니가 시골에 계시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기간에는 빠지지 않고, 귀성 행렬에 동참했다.

그런 길을 다녀오고 나서, 올해는 내 고향 친구들은 물론이고 많은 고향을 떠난 이들에게 고향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내 고향에 특정됐지만 결코 한 곳에 특정되지 않은 우리들의 고향이야기로 읽혔으면 싶다.

내가 고향을 떠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안양으로 진학하고서다. 스무살 무렵 고향집에서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방위생활을 했지만, 10년간의 중국 생활을 포함하면 내가 고향과 정을 섞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지천명을 앞둔 지금 설을 쇠기 위해 고향 마을을 찾았다. 내 고향은 전남 영광군 백수읍 천마리다. 백제에 처음 부처님의 영화로운 빛(靈光)이 들어온 곳이기에 군 지명이 생겼다. 지금은 굴비나 모싯잎떡의 고향이며, 원전이라는 이상한 이미지도 있다. 영광에는 대마, 홍농, 법성, 군서 등 열댓개의 읍면이 있는데, 그 중 내 고향은 백수읍이다. 백수라는 다소 폭소를 자아내는 우리 읍의 지명은 '백수건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 읍에는 일백백(百)에서 한일(一)을 뺀 아흔아홉 봉우리를 갖고 있는데 여기서 백(白)이라는 한자가 나왔고, 이것이 뫼부리(岫)가 합쳐져, 백수(白岫)라는 지명이 나왔다.

가운데 대절산을 기점으로 서에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 고향 금자부락은 영광에서 올 때 읍내를 거치지 않는 게 낫다
▲ 천마리 동네 분표 가운데 대절산을 기점으로 서에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 고향 금자부락은 영광에서 올 때 읍내를 거치지 않는 게 낫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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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 전날 고향집에 도착해 차를 두고, 초등학교를 다니던 길을 걸어서 읍내를 다녀왔다. 고향집에서 읍내까지는 1.5킬로미터 정도로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데, 오랜만에 그 길을 걸으며 옛 기억에 빠져봤다.

지명이 백수이기에 내 모교는 모두 백수가 붙었다. 백수중앙초등학교, 백수중학교. 읍내의 중심부에 위치한 내 초등학교는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전교 1000명이 넘는 제법 큰 학교였다. 하지만 지금은 전교생 60여명으로 우리가 학교 다닐 때 한 반 정도의 숫자만 갖고 있다. 아이들이 빼곡하게 차던 교실은 더러 체육관으로 더러 작은 도서관으로 변신했다.

영광군 백수읍에 위치한 내 모교는 한때 1000여명의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60여명의 미니학교가 됐다
▲ 백수 초등학교 정문. 양옆으로 늘어선 향나무가 눈에 띈다 영광군 백수읍에 위치한 내 모교는 한때 1000여명의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60여명의 미니학교가 됐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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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의 가장 큰 자랑은 교정에 가득 찬 향나무다. 1923년 개교에 맞추어 심었는지 모를 향나무 수십그루가 교정에 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어느 향 업체가 비싼 값에 사겠다는 의사를 보인 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베지 않은 것은 그 소문이 둘러싼 아우라였다. 지금은 그 가치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향나무를 빼고, 우리 학교를 설명할 수 없다. 향나무 외에도 운동장 옆을 자리한 벚나무는 봄이 되어 꽃이 피면 근동 사람들의 마음을 홀리는 황홀한 시간을 갖게 한다. 우리 학교 출신 남자들은 그 벚나무와 학교적 짝사랑 했던 여학생들을 오버랩시키면서 그 몽환으로 빠져들 수 있다. 아버지의 기일이 벚꽃 피는 시기와 가까워 최근에도 본적 있는데, 혹시 '백수해안도로'를 여행할 계획이 있거든 벚꽃 피는 시기를 선택해 그 벚꽃도 보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우리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친구 승주네 양조장이 있던 집을 지나야 한다. 나나 친구들 대부분은 예닐곱부터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막걸리에 입맛을 맞추었기 때문에 그 집 앞을 지나갈 때 우리들은 그 달짝지근한 술향기에 빠져야 한다.

이 집을 지나면 친구 희경이의 아버지가 하시던 '임순택 대서소'가 있다. 우리 집이 순택어른의 외갓집인 촌수인데다 조금 근엄한 스타일이어서 순택이 아제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 대신 그곳서 일하던 우리 동네 어른 용택이 아제는 너무나 친근하다. 내가 나무도장이 필요할 때마다 능숙한 솜씨로 도장을 파주면서 나중에 갚아라 했는데, 아직까지 제대로 술 한번 대접도 못했다.

백합죽으로 유명한데, 허름한 외관과 달리 맛깔라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 백수읍 한성식당 백합죽으로 유명한데, 허름한 외관과 달리 맛깔라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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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소 옆에는 백수식당과 한성식당이 있다. 이 식당은 지금도 백수의 대표적인 맛집으로 유명하다. 특히 '백수 한성식당'으로 검색하면 이 음식점에 대한 평이 자자하다. 지금은 내 형의 친구가 운영하는데, 명절마다 형 친구들의 막판 술자리는 이곳으로 점철되는 일이 많다. 이번에도 나는 형의 음주운전이 무서워 그 자리를 지키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데려왔다.

한때 2만명이 넘어 읍으로 승객했는데, 지금은 5000여명대의 인구다.
▲ 영광군 백수읍사무소 한때 2만명이 넘어 읍으로 승객했는데, 지금은 5000여명대의 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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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식당의 맞은 편은 백수읍사무소가 있다. 이 읍사무소가 있어서 천마리가 명실공히 백수의 중심일 수 있고, 우리 초등학교 앞에 '중앙'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읍사무소의 옆에는 이제 한쪽 어깨가 무너져 버린 늙은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다. 한때 인구가 2만명이 달해서 읍으로 지정됐는데, 이제는 5200명 남짓만 남았으니 당산나무의 한쪽 어깨도 쳐지는게 이해가 됐다.

부자로 알려진 이 댁의 에어컨은 지금 가동중인지 모르는데, 뒷면에는 금성이라는 한글이 선연히 적혀있다
▲ 영남씨댁의 오래된 에어컨 부자로 알려진 이 댁의 에어컨은 지금 가동중인지 모르는데, 뒷면에는 금성이라는 한글이 선연히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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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사무소에서 조금 더 걸어오면 성함이 '영남'인가 하는 분의 집이 있다. 양조장을 하는 승주네는 몇백석 지기네 하는 말이 있지만 이분의 재산은 신비한 숫자라는 말만 있었다. 그래선지 이집은 우리 마을에 있는 '신비의 성' 같은 느낌으로 교류할 일이 별로 없었다. 지나가다 보니 '금성'이라는 마크가 있는 에어컨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당시에 에어컨을 설치했다면 그 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자 주변은 온통 잘 생긴 고인돌 들로 차 있다
▲ 명마의 입구에 있는 정자 정자 주변은 온통 잘 생긴 고인돌 들로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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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댁을 지나면 천마리의 첫번째 부락인 명마부락이 있다. 이 마을에는 재원이, 영구, 인덕이, 희경이 등 꽤 많은 내 친구가 산다. 명마부락의 랜드마크는 입구에 있는 정자(우리는 시정이라 불렀다)와 그 주변에 자리한 고인돌이다. 서울 같은 곳에 있으면 큰 문화제 취급을 받을 만큼 조형미가 좋은 고인돌이 몇 개 늘어서 있지만 이 동네서는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이다. 명마의 정자는 어릴 적 우리가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보통은 어른들이나 우리 동네서 힘깨나 쓰던 사람들의 차지였다. 혹여 지나가다 사람들이 없으면 한번 앉아도 볼만하지만 어릴 적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머리가 좀 커서 방위 받는 나이가 돼서야 겨우 눈치 안보고 앉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사람이 떠나 이제는 잘 관리되지도 않는다. 시골 사람들도 이제 몇백미터면 차로 움직이니 이곳에 앉을 리도 없다.

안쪽 왼쪽 기와집이 내 친구 희경이네 집이다
▲ 명마마을의 전경 안쪽 왼쪽 기와집이 내 친구 희경이네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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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를 지나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친구 희경이 집이 있다. 나에게는 친척이라 희경이 아버님이 계실 때는 세배도 가고 했는데, 이제 대부분 이곳을 떠났다. 내 동창 희경이가 막내인데, 그 집 남매들은 대부분 인물도 휜칠한데다 공부도 잘했다. 7남매인 우리 형제들과 구성이 거의 비슷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희경이는 위로 오빠가 하나 더 있고, 나에게는 동생이 둘 더 있다는 차이다.

희경이 집 인구를 지나서 탱자나무 길을 따라가면 제법 큰 명마부락의 다른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신기하게 우리 동창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결국 우리 기억에서 그냥 지나는 마을을 뿐이다. 이제 없어진 탱자나무 숲에서 탱자가 열릴 때면, 그 탱자를 차고 다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소나무 아래 중간 부분이 코끼리 바위다. 잡목이 없을 때는 바위 형상이 코기리를 꼭 닮았다
▲ 신상마을에 있는 코끼리 바위 소나무 아래 중간 부분이 코끼리 바위다. 잡목이 없을 때는 바위 형상이 코기리를 꼭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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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을 맞으면서 명마서 다음 마을인 신상마을로 걸었다. 이렇게 가다보면 오른쪽에는 백수에서 높은 산인 대절산이 있고, 왼쪽에는 까봉, 수리봉이 보인다. 대절산은 백수의 중심이다. 백수에 재앙이 생기면 사람들은 삽을 들고, 이 산의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러면 꼭 어딘가에는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이곳은 천하의 명당으로 이곳에 묘를 쓴 집안은 발복하지만, 그 화는 백수 전체에 미친다는 말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매장된 시신을 옮겨야 재앙도 풀렸다. '전설의 고향'에도 나온 탄화미가 나온 것도 이 산에 있는 절이다. 옛날옛적 절에는 매 식사 때마다 필요한 양의 쌀이 나오는 귀한 구멍이 있었다. 그런데 쌀을 한꺼번 얻어, 고생을 면하고 싶던 시동이 어느날 불이 꺼지지 않은 부지갱이로 이 구멍을 쑤셨다. 이후 석달열흘간 연기가 나오고, 이후에는 검은 쌀만이 나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지금도 근처에 있는 헬기장 등에서는 탄화미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왼쪽에는 제법 우거진 봉우리들이 있다. 까봉, 수리봉, 옥가산 등 이름도 다양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이곳에는 박막동이라는 전설적인 빨치산이 있었다. 영광은 한국 전쟁 당시 민간인이 가장 많이 희생된 지역 중에 하나인데, 사람들이 그만큼 정치적으로 민감했다는 방증이다. 나도 어릴 적부터 박막동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데올로기 보다는 그가 영웅처럼 느껴졌던 신비한 기억이 있다. 나중에 박막동은 효수되어 영광 읍내에 목이 걸렸다는데, 어떻든 저 봉우리 아래에는 수많은 이들의 뼈가 나 뒹굴고 있고, 그래서 인지 어렸을 때 토끼나 꿩을 쫓을 때도 그 봉우리 안 음습한 골짜기는 기피한 기억이 있다.

천마리 2구인 신상마을은 과거 제법 호수가 많았는데, 이제 마을의 세는 많이 약해진 게 느껴졌다. 우리 동창 상민이랑 정관이를 비롯해 몇이 살았다. 상민은 나중에 교육공무원이 되어 사무관을 다는 등 승승장구하는 친구고, 정관이는 선장 일을 하는 친구다. 상민이네 집은 이 동네에서 형제들이 잘 풀린 집인데, 땅을 보니 대충 느낌이 왔다. 뒷산의 줄기가 상민이네 집 뒤로 흘러오는 게 명당으로 느껴지는 집터였다. 신상마을 앞에는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제법 큰 바위가 있다. 바위의 모양이 코끼리를 닮아서 코끼리 바위다. 어렸을 때, 우리 초등학교 선생님의 아이가 그 바위에서 놀다가 떨어져 죽은 후에는 약간 무서움증이 생겼다. 바위 아래도 돌로 되어 있어 제법 무서운 느낌이 드는데, 이제 보니 그 정도 규모는 아니었다. 이 바위 뿐이랴, 어릴적 그 크게 보이던 바위가 이제는 작은 크기로 느껴지니.

신상마을에서 조암마을로 넘어가는 곳.
▲ 이암골 입구 신상마을에서 조암마을로 넘어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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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마을을 지나면 작은 개울이 있다. 집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이곳이 꼭 중간이다. 어릴 적에 땡땡이를 친 적이 한번 있는데, 이곳에서 마음을 굳히고, 동네 아이 둘을 규합했다. 학교 대신 앞쪽 산으로 들어가 밤을 따고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추어 집에 갔다. 결국 들통 나 죽을 뻔 했지만 이곳을 기준으로 지각을 판단했던 이정표였다. 이 개울은 어릴 적 다슬기는 물론이고, 가재도 잡히던 맑은 물이 흘렀다. 이제 그런 맑은 기운이 사라져 아쉬웠다.

이 개울을 건너자 마자 왼쪽으로 가는 길은 이암골로 가는 길이다. 용원, 영록, 영일이가 이 마을에 살던 우리 동창이다. 가구가 많지 않았는데, 우리 동창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도 그 가구 수를 유지하는 조금 특이한 마을이다. 제법 큰 골짜기 사이에 있어, 다른 마을보다 낮은 늦고, 밤은 일렀을 테지만 외지에서 온 이들이 들어와 만든 좀 특이한 곳 중 하나였다.

왼쪽 전신주 아래가 땅벌이 살던 곳이고, 오른쪽 멀리 보이는 언덕이 도깨비가 살던 곳이다
▲ 땅벌 출몰 지역 왼쪽 전신주 아래가 땅벌이 살던 곳이고, 오른쪽 멀리 보이는 언덕이 도깨비가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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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3구 조암부락이 나온다. 그런데 어릴 적 이 갈림길 초입에 '오빠시떼'라고 불리는 무서운 땅벌 집이 있었다. 우리도 이곳을 건너기 위해 적지 않은 고심을 하고, 수차례나 이 벌을 소탕하기 위해 섯부른 전투를 했다. 선발대가 짚단 등 풀 무더기를 벌의 출입구에 쌓고, 후발대가 불을 붙이는 방법이다. 수차례 전투는 항상 실패였다. 어느 순간 이 벌집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이곳을 지나면 그 공포가 스멀스멀 나온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전설의 도깨비 고개가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이 도깨비는 고기를 사 오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고기를 빼앗는 고약한 인물이었다. 나도 어릴 적 고기를 들고 어둘녁에 몇차례 이 고개를 넘었는데, 다행히 고기를 빼앗기지 않았지만 그 공포가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초등학교 시절 이 고개 맞은 편에 북숭아밭이 들어섰다. 내 어릴적만 해도 복숭아는 말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는 귀한 과일이었다. 두 번인가 이 밭으로 복숭아 서리를 시도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는 길 옆이라 부담은 그만큼 크다. 하지만 한번은 성공해 귀한 복숭아를 먹은 기억이 난다.

이 도깨비가 살던 곳을 지나면 까점이 나온다. 내 친구 큰 영진이네가 하던 점방이다. 막걸리나 소주부터 과자도 팔던 곳이다. 나는 어릴적 막걸리를 사기 위해서 두되나 다섯되짜리 주전자를 들고 이곳까지 왔다. 막걸리를 받아서 출발한 후 사람들이 보이지 않으면 주전자의 입에 주둥이를 대고 한참을 마신다. 가는 길에 흘릴 막걸리를 미리 아끼는 고귀한 마음이다. 나는 양심이 있어서 다른 사람처럼 술의 자리에 물을 채우는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가서 냉면사발은 물론이고 세수대야로 원샷을 한 것은 이때부터 길러진 것이다.

조암동 점방은 조암부락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외진 곳이다. 그래서 읍내를 다녀가는 이들이 꼭 거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이장과 영농회장을 거의 반편생 하신 아버지는 읍내에서 일을 보고 오는 길에 이 점방을 지나치기 힘들었다. 

"어이 영희 한잔하고 가게".

아버지는 창녕조씨 부제학공파 종손이라 항렬이 낮아, 그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아제나 할아버지, 증조부벌이었다. 점방에서 술을 하거나 화투를 하던 마을 분 한명은 분명히 아버지를 불렀다. 작은 일이나 농협대출까지 아버지가 끼어야 일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방앗간을 지나는 참새처럼 뭔가 있을까를 들여다 보셨을 것이다. 술 자리를 찾는 내 행색은 본시 이런 아버지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아버지는 화투는 일체 안했지만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자셨다. 그러다 술이 도를 넘어가면 그냥 점방의 아랫목에 주무시는 게 대부분이었다. 내 어릴적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그 아버지를 집에 모시고 오는 것이었다. 초저녁에도 귀가하지 않으면 나는 길가에 있는 집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는 가를 조심히 들으면서 점방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절반 정도는 점방에서 1/4는 조암동 어느 집에, 그리고 더러는 이암골이나 신상마을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초등학생이 한참이나 큰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적당히 아들에게 몸을 맡겨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의 가난으로 고등학교 조차 포기해야 했고, 종손이라는 집안의 위치 때문에 도시로도 떠나지 못했던 아버지의 비애를 난 그 길에서 가끔 느끼곤했다. 그런 느낌을 바탕으로 대학 시절 '아버지의 날개'라는 소설도 썼는데, 이제 어디 있는지 조차 기억이 안난다.

조암 부락부터는 우리 동네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우리 창녕조가들이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이제 남은 집이 거의 없지만 조암부락은 열에 여덟은 우리 집안이다. 우리 집이 종가집이라 나는 당연히 항렬이 낮았다. 코찔찔이 조차 증조부인 일도 많았다. 이 부락에는 너무 일찍 이승을 떠나버린 친구 정곤이를 비롯해 윤숙이, 선옥이, 영미 등 우리 친구들이 있었다. 모두 우리 집안이다.

우리마을 당산나무는 장산나무라 불렸다. 500백여년간 마을의 성쇄를 지켜봤을 것이다
▲ 우리마을 당산나무 우리마을 당산나무는 장산나무라 불렸다. 500백여년간 마을의 성쇄를 지켜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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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암부락에서 우리 집까지는 300여미터쯤 떨어져 있다. 제법 고도차가 있는 내리막이다. 자전거를 타던 중학교 때, 우리마을에서 출발해 고개에서 자전거를 내리지 않으면 제법 힘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에서 앞을 내다보면 멀리 8킬로미터 떨어진 영광읍내가 보인다. 하지만 더 눈에 띄는 것은 수령 500년을 넘긴 느티나무다. 우린 어릴 적 이 나무를 장산나무라고 불렀다. 바닥은 시멘트를 깔아서 여름에는 제법 훌륭한 휴식장소였다. 사람들은 이곳에 모여 장기도 두고, 꼰도 두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이 나무의 주변에는 제법 뱀들이 많았다. 어떤 날은 느티나무 중간에 길다란 구렁이가 메달린 적도 있었다. 나 역시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이 느티나무를 지나야 했는데, 뱀에 대한 공포가 항상 있었다.

이 언덕을 내려오면 우리 마을인 금자부락이다. 우리 마을은 백수읍내를 거치는 것 보다는 영광에서 오늘 길에 학산사거리에서 내려 걸어오는 게 빠르다. 읍내서 오면 1.5킬로미터지만 영광서 백수오는 신작로에서는 800미터쯤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곳 역시 우리 창녕조가들의 집성촌이다. 나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과장을 좋아하는 내 큰 매형은 눈이 내린 후 신작로에서 우리 동네를 보니 마치 눈 속의 알프스 같이 보여, '영광의 알프스'라는 작명을 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같이 웃었다. 알프스를 가보지 않은 매형이라 신뢰는 안 되지만 눈도 별로 없는 베트남 '사파'를 '통킹만의 알프스'로 부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어 그리 부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우리 마을에도 내 어릴 적에는 십여가구가 살았지만 차례차례 대처로 떠나고, 우리 어머니만 남을 정도였다. 다행히 광주에 살던 작은 집이 돌아오고, 귀농한 내 여동생네가 살아서 이제 호구로도 3가구이니 다행이기도 하다.

우리 동네는 큰 길과도 떨어져 있어서 예전부터 조용한 마을이다. 흠이 있다면 직선 방향으로 있는 대절사라는 절이다. 한 때 이 절의 주지가 성능 좋은 스피커로 염불을 튼 적이 있다. 결국 동네 한 어르신은 "낮에는 애그새끼(아이들의 전라도 사투리)들이 떠들고, 밤에는 중놈들이 떠드네"라는 시의적절한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동네를 시끄럽게하는 녹음 염불이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아서, 사라졌지만 지금도 초파일을 전후해서 불경 소리가 왕왕 들린다. 우리 금자부락의 아래는 금곡마을이다. 친구 영님이랑이 살았다. 제법 호수가 많지만 이 마을은 마음이 우리 천마리로 향하는 것 같지 않아서 더 설명하지 않는다.

아 그리고 우리 마을의 이름이 천마리라고 불리는 이유도 궁금할 것이다. 천마(天馬)라는 마을 지명은 이곳에 천마비룡의 명당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부모를 모신 자리가 이런 명당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믿음이 있으니 그나마 암담한 세상을 살 수 있는 자기 위로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 명당의 덕으로라도 비룡을 타고 승천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속절 없는 상상을 해봤는데, 고향이라도 있어 그런 상상을 하는 게 감사하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은 글입니다



태그:#영광군, #백수읍, #천마리, #고인돌, #백수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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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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