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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인 김신혜. 재심 개시 공판에서 1심과 2심에서 재심 개시가 선고되었으나 그녀는 지금도 교도소에 수감 중에 있다. 그리고 맞이한 2017년 3월 7일. 기자는 17년 전 이날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날을 맞이하여 '여전히 석방되지 못한 채 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신혜의 가석방을 촉구하고자 다시 한번 글을 쓴다. 지난 17년간 김신혜와 주고 받은 편지에 담긴 그녀의 진실을 알려 그녀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촉구한다. - 기자말

2015년 11월 18일 친부 살해 혐의로 15년 8개월째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38·여)씨가 재심 개시 여부 발표가 열리는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 구치감에 들어서고 있다.
 2015년 11월 18일 친부 살해 혐의로 15년 8개월째 복역 중인 무기수 김신혜(38·여)씨가 재심 개시 여부 발표가 열리는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 구치감에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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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3일 새벽 5시,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나는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을 가기 위해 새벽 길을 나섰다. 오전 11시에 시작하는 재심개시 공판에 늦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차의 가속기를 밟았다. 그렇게 해서 달려간 고속도로. 하지만 5시간이 넘는 그 길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시간을 위해 누군가는 15년의 세월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2000년 3월 7일, 그날 아버지를 잃은 23살의 어린 딸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다음날인 3월 8일 새벽이었다. 창졸간에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던 딸이 이번에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내 세상에 퍼진 소문, 아버지를 잃은 딸이 '사실은' 그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뉴스였다.

사건이 벌어진 전남 완도의 작은 시골 마을은 말 그대로 발칵 뒤집어졌다.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큰 흉악 범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모범생이었다니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녀, 이른바 '전남 완도 존속살해 무기수' 김신혜씨였다.

무기수 김신혜를 만나다

17년 만에 열린 무기수 김신혜씨의 재심개시 공판. 운명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17년 만에 열린 무기수 김신혜씨의 재심개시 공판. 운명을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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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혜씨를 실은 광주지방교정청 미니버스가 도착하자 취재진들의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
 김신혜씨를 실은 광주지방교정청 미니버스가 도착하자 취재진들의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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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차는 제 시간에 해남지원에 도착했다. 하늘은 맑았다. 5월이지만 이른 더위로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들었다. 그런 후 주위를 둘러보는데 방송용 카메라를 설치한 채 웅성거리는 많은 기자의 모습이 보였다. 공중파 방송사를 비롯하여 종편 카메라까지 빼곡했다. 무기수 김신혜씨가 법원에 도착하는 장면을 촬영하고자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5년 전 그때, 지금의 절반 아니, 그 절반의 절반이라도 이 사건에 관심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고맙게 여겨야 할까.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답답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복잡한 마음이 스쳐갔다. 그때였다. 법무부 마크가 선명한 미니버스가 법원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질서는 일순간에 무너졌다. 틀림없었다. 김신혜씨가 탄 호송버스였다. 방송용 카메라와 신문기자의 카메라 플래시가 쉴새없이 터지기 시작했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몸 다툼이 이어지는 순간, 나 역시 새까맣게 코팅된 미니버스 안을 들여다 보기 위해 다가갔다. 차 안 어딘가에 앉아 있을 그녀에게 나도 왔으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처음 신혜씨의 사연을 알게된 것은 2000년 12월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반부패국민연대'라는 시민단체의 민원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투명성기구'로 개칭된 그 단체에서 나는 부패 관련 민원을 상담하거나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28일 단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우리 누나를 도와주세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게 되었다.

"누나가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현재 구속되었는데, 누나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며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누나와 여동생을 아버지가 성추행하여 이로 인해 누나가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라고 하는데 여동생은 아버지와 같이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추행을 했다고 하면서 누나가 아버지를 수면제로 죽인 것이라고 합니다. 누나는 현재 무기징역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 중인데 저희로서는 도울 길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습니다. 제발 저희를 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랬다. 그때만 해도 이 글이 무려 만 17년간의 길고 깊은 인연으로 계속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무기징역을 받고 있다는 누나. 언제, 어디서, 또 어떻게 일어난 사건인지조차 불분명한 제보. 더구나 연락한 곳조차 남겨놓지 않았다.

장난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답신 메일을 썼다. 직접 통화를 하고 싶다며 사무실로 전화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반신반의했다. 과연 그 답이 돌아올까. 그리고 약 3일이 지나가던 날, 혹시나 하고 보냈던 답신에 반응이 왔다. 남동생의 답신이었다.

돌아보면 2000년 그때 내 나이는 서른 한 살이었다. 신혜씨는 스물 세 살.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당시 삼십대와 이십대 초반이었던 우리는 어느덧 나는 마흔 여덟살, 신혜씨 역시 마흔 고개를 넘었다. 17년 세월은 그만큼 길고 또 깊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늘 희망을 말했던 것 같다. 막연하지만 반드시 찾아올 희망을 생각하며 죽지 말고, 좌절하지 말라고 나는 격려했고 신혜씨는 나보다 그 희망을 더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거짓말처럼 그 날이 온 것이다. 재심 개시를 위한 첫 공판. 나는 그날의 가슴 두근거리는 감정을 잊을 수 없다. 나조차도 이런데 당사자인 신혜씨 마음은 어떠했을까.

기적같은 일, 박준영 변호사를 만나다

김신혜의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
 김신혜의 변호인인 박준영 변호사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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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씨의 재심을 맡은 이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파산' 박준영 변호사였다. 지금은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지만 내가 처음 그를 만났던 2014년 9월에는 생소한 이름과 얼굴이었다. 변호사라면 고개부터 가로젓던 재심을 겁 없이 나서는 그는 참 신기한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박 변호사는 불과 8개월 만에 이 사건의 재심 개시를 청구했다. 그때 박 변호사가 나에게 미리 보내온 재심개시 청구 서류를 보며 나는 그의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려 200페이지가 넘는 재심개시 청구 서류. 각종 증거 자료와 현장 사진, 그리고 새로운 증인들의 증언 속기록까지. 어느 판사가 그처럼 뜨거운 열정의 서류를 쉬 내던질 수 있을까.

박 변호사의 그런 열정이 결국 기적을 만들었다. 2015년 5월, 그렇게 시작된 김신혜씨의 재심 개시 공판 첫 재판. 긴장한 얼굴의 박준영 변호사, 그리고 함께 일하는 신윤경 변호사가 자리에 앉자 잠시후 수의를 입은 신혜씨가 입정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법정을 감돌았다. 과연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법정은 바늘 하나라도 떨어지면 그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법정은 사람들로 가득찼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 개시.

박준영 변호사가 미리 준비한 심문서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신혜씨의 지난 15년 삶을 하나씩 거슬러 올라갔다. 다시 맞이한 15년 만의 재판. 신혜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주저없이 쏟아냈다.

그랬다. 그녀의 진술은 그 어떤 비극적인 드라마보다 슬펐다. 야윈 한 손에 흰 손수건을 움켜쥔 채 법정에 들어선 신혜씨는 "지난 15년간의 수감 생활 동안 심경이 어땠냐?"는 박 변호사의 첫 질문에 울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지 못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억울해서가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죽지 못했다"는 답변은 생뚱했다. 더구나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로 살고 있는 그녀가 내 놓은 답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왜 아버지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냐?"며 박 변호사가 되묻자 그때 신혜씨가 내 놓은 답은 이랬다.

"제가 구속된 이유가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고, 또 그 아버지를 제가 살해한 이유가 저와 제 여동생을 아버지가 성추행했기 때문이라고  검찰과 법원이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여기서 자살해 버린다면 내 아버지는 영원히 딸들을 성추행한 파렴치범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 아버지가 그런 파렴치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장애인이라서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무시당했지만, 그래서 그 아버지의 딸인 저 역시 어려서부터 무시받고 멸시 받았지만 제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라도 지난 15년간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무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아버지도 살고, 저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난 15년간 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죽지 못한 이유입니다."

나는 울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내 옆 방청객도 울었다. 그날, 방청객으로 온 이들은 다 같이 울었다. 가져간 손수건이 다 젖도록 모두가 그렇게 펑펑 운 이유였다.

"15년 전에도 저에게는 국가가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저에게는 국가가 없다"며 울부짖던 그녀. "저도 대한민국 국민인지, 저에게도 인권이 있는지 꼭 알고 싶다"며 절규하던 그녀. 그런데 그런 신혜씨의 증언을 들으며 내가 잊을 수 없었던 한마디는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지난 15년간 누구에게 호소했습니까?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17년째 수감중인 무기수 김신혜. 그녀를 가석방하지 않은 채 재심개시 발목 잡기를 하는 검찰과 법원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17년째 수감중인 무기수 김신혜. 그녀를 가석방하지 않은 채 재심개시 발목 잡기를 하는 검찰과 법원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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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하는 이야기였다.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그 말들을 김신혜씨는 말했다. 15년 전 그때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 때문에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은 장애인이었던 아버지를 무시했고, 딸인 자기 앞에서도 아버지를 '병신 새끼'라며 욕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꼭 성공하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완도에서 초, 중, 고 내내 '공부 잘하고 상장 많이 받는 똑똑한 아이'로 유명했다. 그녀는 말했다. 정말 성공하고 싶었다고.

내가 성공한다면 누구도 내 아버지를 더 이상 '병신 새끼'로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그런 내 아버지를 최고로 좋은 차에, 최고로 좋은 음식에, 최고로 좋은 집에서 남들 부러워하게 모시는 것이 어릴 적 자신의 꿈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 꿈은 2000년 3월 7일, 참혹하게 무너졌다. 상상할 수 없는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그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오늘로 만 17년째 감옥에 살기 때문이다. 정말 그녀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을까. 다시 세상에 나와 그녀가 꿈꾼 성공한 딸로서 아버지 앞에 다시 설 수 있을까.

그렇게 신혜씨의 아픈 증언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박준영 변호사가 생각지도 않은 질문을 신혜씨에게 던졌다. 지금까지 이런 사연을 교도소 밖의 누구에게 전달한 적이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신혜씨는 한 사람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 역시 궁금했다. 과연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어진 다음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박 변호사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신혜씨는 방청석에 앉아 있던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들려온 그 말, "인권운동하는 고상만 씨입니다."

아. 나는 그 순간 너무도 미안했다.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랬구나. 그랬구나.

재판이 끝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멍한 기분으로 재판정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과연 나는 그녀의 절박한 호소를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달했을까.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대신하여 알려달라며 보내온 그 말을 얼마나 제대로 알렸을까.

그래서였다. 이 글의 연재를 시작하는 3월 7일 오늘은 바로 김신혜씨가 17년 전 그날, 무기수가 되는 날의 시작일이다. 나는 '여전히 감옥에 갇혀있는' 그녀를 위해 뭐라고 하지 않고서는 이 미안함을 털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2015년 11월, 1심에서의 재심 개시에 이어 지난 달인 2017년 2월 11일 항소심에서도 재심 개시가 된 김신혜씨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고 그 상당한 이유가 인정되어 재심 개시가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이어졌으나 그녀에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과연 이것이 공정한가. 과연 이것이 옳은가. 나는 검찰의 재심개시 발목 잡기와 이에 편승한 법원의 '가석방 조치 없는' 형식적 재심개시 결정에 신혜씨를 대신하여 강력히 항의한다. 이것이 17년간 억울하게 고통받고 있는 그녀에게 하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사과인가.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지난 17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그녀에게 있었던 것일까. 왜 우리는 이 사건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정말 그녀의 아버지는 누가 죽였으며, 왜 그녀는 이 죄를 17년째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왜 검찰은 여전히 그녀가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검찰의 주장을 개탄하는 것일까. 지난 17년간 그녀와 주고 받은 이야기를 토대로 나는 이러한 의문에 명쾌하게 답할 것이다.

'진실은 더디지만 결국 정의를 찾아온다'는 말을 17년간 주고 받으며 기다렸던 그녀, 김신혜. 그리고 지금 그 진실이 문 앞에서 노크하려 한다. 함께 문을 열어주실 것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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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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