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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로 교보빌딩.
 세종로 교보빌딩.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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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한다는 얘길 듣고 당연히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약관에는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쓰여있거든요. 오랫동안 싸워왔지만 저희는 받을 수 없다는 답변만 확인했습니다."

지난 3일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제보자 박아무개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법을 공부하고 있고, 현재는 박사 과정 중인 박씨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관련 자료를 쏟아놓기 시작했다. 박씨는 교보생명(대표이사 신창재)이 끝까지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면 이 사례를 논문으로 다룰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유족이다. 박씨의 어머니는 가족 중 한 명인 A씨 이름으로 지난 2001년 교보생명과 '교보베스트라이프종신보험' 계약을 체결하고 성실히 보험료를 납부했다. 우울증을 앓던 A씨는 2014년  자살을 시도해 사망에 이르게 됐다. 계약자인 박씨 어머니는 보험금을 청구했고 주계약 보험금을 지급 받았다. 그는 보험 계약 때 재해사망 특약도 들었지만 평소 신뢰관계에 있던 보험설계사의 말을 듣고 청구하지 않았다. 자살은 재해사망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설계사의 설명이었다.

자살보험금 전액 지급 판결 나왔지만...다른 사례라며 지급 거부

지난 2016년 5월 23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기자실에서 열린 '자살보험금 지급 관련 금감원의 입장 및 향후 처리계획 발표' 브리핑에서 권순찬 부원장보가 발표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2016.5.23
▲ 자살보험금, 금감원 입장발표 지난 2016년 5월 23일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기자실에서 열린 '자살보험금 지급 관련 금감원의 입장 및 향후 처리계획 발표' 브리핑에서 권순찬 부원장보가 발표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2016.5.23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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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지난해 5월 대법원이 특약에서 정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금융감독원은 생명보험사들에게 소멸시효가 지나도 이를 전액 지급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씨는 이 같은 뉴스를 접하고 교보생명에 재해사망특약 보험금 청구를 문의했다. 그는 이웃으로 거주하고 있는 교보생명 보험설계사와 교보생명 콜센터에 수 없이 물었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여러 시도 끝에 박씨는 교보생명으로부터 '피보험자의 사안은 약간 다르므로 지급이 어렵고, 결정되면 일괄적으로 주니 기다려라'라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교보생명은 이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박씨는 결국 금융감독원을 찾았다. 민원신청을 받은 금감원은 박씨에게 공식 문서도 아닌 카메라로 컴퓨터 모니터를 찍은 형태의 사진 한 장만 달랑 보냈다. '지급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이 사진 속 내용의 골자였다.

박씨 어머니가 교보생명과 계약했던 보험상품 중 주계약상품에서는 자살을 보험금지급면책제외 사유로 명시하고 있다. 계약 후 2년이 지나면 자살하게 돼도 보험금을 준다는 얘기다. 교보생명과 금감원이 문제 삼았던 것은 주계약이 아닌 바로 특약의 내용이다.

보험 계약 때 박씨 어머니가 함께 들었던 재해사망특약에서는 '이 특약에 정하지 아니한 사항에 대해서는 주계약 약관 규정을 따른다'고 돼있다. 이 특약에는 자살로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내용도, 지급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따로 없었다. 하지만 주계약상품에서 자살로도 지급한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계약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특약 보험금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고 박씨는 주장했다.

금감원은 보험금 지급이 어려울 것이라며 그 근거로 지난 2009년 선고된 대법원 판결을 제시했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재해특약에는 재해분류표가 명시돼있으므로 이 표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주계약의 약관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재해분류표에 자살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보험사가 특약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또 별도의 추가 보험료를 내면서 특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주계약과 별개로 봐야 한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소송 과정서 유족과 합의한 사례 있어... 대법은 "주계약-특약 다른 상품"

하지만 결론적으로 과거 이 대법원 판결의 원고였던 유족은 피고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으로부터 특약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유족이 이 재판에서는 졌지만 대법원으로부터 사건을 다시 돌려받은 고등법원이 이에 불복해 화해권고를 내렸던 것이다. 대한생명이 이를 받아들여 결국 유족에게 보험금을 지급하면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이 판례 때문에 박씨 어머니는 소송을 통해서는 특약 보험금을 받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판결 사례와 별개로 보험사가 박씨와 같은 경우 유족에 보험금을 지급하기로 합의하고, 지급한 사례는 남게 된 셈이다. 박씨는 이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장진용 법무법인 다한 사무장은 "최근 판례를 보면 법원은 주계약상품과 특약상품을 각각 다른 상품으로 판단했다"며 "주계약은 종신보험이고 특약은 상해보험이기 때문에 별개 상품이므로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장 사무장은 "소비자는 계약 당시에 이 둘을 하나의 상품으로 알고 계약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법원의 해석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최근 생보사들이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적지 않은 이들이 박씨와 같은 사례로 문의해오고 있다"며 "법적으로는 지급 받기 어렵지만 이슈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밝혔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지난해 판례도 그렇고 법적으로는 종결된 경우의 사례"라며 "현재로서는 이와 같은 경우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약관 해석의 여지 큰 사건... 다른 판사들이 새로운 판결 내릴 수도

보험 상품 광고는 어딜 가든 쏟아져 나온다. 소비자들은 헷갈린다.
 보험 상품 광고는 어딜 가든 쏟아져 나온다. 소비자들은 헷갈린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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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진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고등법원이 불복했을 정도라는 것은 약관 해석의 여지가 그만큼 넓은 사건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변호사는 "우리나라에는 대법원 판결이 법원의 객관적인 다른 판단 자체를 막는 제도가 없다"며 "추후 소송이 진행된다면 새로운 견해를 가진 판사들이 새로운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보험업계 한 관계자는 "보험금 자체가 원래 합의에 의해 지급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자살보험금 내용이 포함된 여러 보험약관 가운데서도 보험금 지급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사례가 몇 가지 있었다"며 "한화생명이 합의한 그 사례는 이번 전액 지급 케이스에서는 빠졌다"고 말했다.

이는 한화생명이 과거 소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자 보험금 지급을 유족과 합의했으나 올해 전액 지급하기로 결정한 사례로는 이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보험사들 간 지급 사례를 공유하기 때문에 교보생명 역시 이를 따라 박씨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박씨는 이 사건으로 학업에 지장을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0년 간 법을 공부한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다며 어머니와 다투기도 했다고 말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어디에, 얼만큼 있는지 그것만 알아도 좋을 것 같다며 박씨는 말을 흐렸다.


태그:#교보생명, #자살보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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