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입니다. 독재와 쿠데타로 얼룩진 한국 사회의 참혹한 실상을 드러낸 비극이자, 권력의 폭압에 당당히 맞선 시민 정신이 꽃핀 현장이었지요. 오늘날 한국의 민주화와 사회 발전은 5.18에 크게 빚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극우 보수 세력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내내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을 훼손하고 그 의미를 격하 하려는 시도를 해 왔습니다. 국가 공식 기념일인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불가를 천명하고, 국가 원수가 의도적으로 기념식에 불참함으로써 광주 정신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극우 단체에서는 북한의 사주를 받았다는 식의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일베 같은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5.18 희생자 분들을 공공연히 모욕하고 조롱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대선을 앞두고는 학살의 주범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하여 자신의 책임을 정면 부인하는 일까지 일어났지요.

 영화 <화려한 휴가>의 포스터.

영화 <화려한 휴가>의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으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문 대통령은 대선 기간 중에 헌법 개정 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겠다는 공약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되면 5.18기념식에 당당히 참석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올해의 5.18은 보수 정권 10년간 겪었던 시련을 털어 내고, 그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출발점으로서 특별하게 기억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광주민주화운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다음에 소개할 네 편의 영화는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찾아 본 것입니다. 두 편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영화적 기록에 충실한 우리나라 작품이고, 나머지 두 편은 80년 5월의 광주가 겪은 일이 인류 보편의 가치와 연결된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는 외국 작품입니다.

[하나] <화려한 휴가>(2007)

부모님을 일찍 여읜 민우(김상경)는 택시 운전을 하며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 진우(이준기)를 뒷바라지하고 있습니다.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를 짝사랑하는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고 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 들어온 계엄군들이 무지막지한 진압을 개시하게 되면서 이들의 운명은 파국으로 향하게 됩니다.

<부활의 노래>(1990), <꽃잎>(1995), <박하사탕>(1999) 등 이 영화 이전에도 한국 상업 장편 영화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설적으로 항쟁 자체를 재현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통해 정서적 울림을 준 작품은 없었습니다.

물론 여러가지 실화들을 각색하여 이야기로 만들려다 보니, 작위적인 설정과 낯간지러운 대사가 자주 등장하는 등 딱히 잘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분노와 슬픔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촉발시킨 계엄군의 만행, 그에 맞선 시민들의 안타까운 희생과 아름다운 연대가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5.18의 실상을 총체적으로 그리려 노력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미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오월愛>의 포스터.

영화 <오월愛>의 포스터. ⓒ (주)시네마달


[둘] <오월愛>(2011)

항쟁 이후 30년이 지난 광주, 그 날의 젊은이들은 이제 장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시민군으로 싸우고 밥을 해다 나르며 저마다 기꺼이 자신의 힘을 보탰던 이들은, 각자의 생활 터전에서 평범한 광주 시민으로 지금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를 담백하게 따라갑니다.

이전까지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충격적인 자료 화면들이 곧바로 떠오를 정도로, 당시의 참상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데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종일관 담담하게 억눌린 분노와 슬픔을 전하는 이 영화는 다릅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의 생생한 증언과 내레이션 등을 통해 그 날의 기억을 환기하고 진솔한 감정을 전달합니다.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에 시달리면서도 끝까지 살아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겠다는 어느 생존자의 다짐은, 이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줍니다. 영화가 촬영될 당시에도 계속되던, 이명박 정부의 무시와 홀대 속에서도 5.18의 기억을 후대에 남기겠다는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마침 tbs TV에서는 5월 18일 저녁 9시 30분(본방), 5월 20일 저녁 9시(재방)에 이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예정입니다. 시간이 맞으시는 분들은 그 때 찾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셋] <의문의 실종>(Missing)(1982)

미국인 찰리(존 셰이)는 아내 베스(시시 스페이섹)와 함께 칠레로 건너와 마음 맞는 친구들과 힘을 합쳐 정치적 주장이 담긴 출판물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로 인해 시가지는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고 급기야 찰리는 베스가 집을 비운 사이에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맙니다. 이에 찰리의 아버지 에드 호먼(잭 레먼)은 칠레로 건너와 베스와 함께 실종된 찰리를 찾는 지난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완고한 보수주의자인 에드는 쿠데타의 참상과 아들의 실종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이제까지 조국으로 철썩같이 믿었던 미국을 향한 분노를 감추지 못합니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된, 1973년 칠레의 군부 쿠데타는 민주적 절차로 수립된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을 뒤엎기 위해 미국이 적극 지원한 사건이었으니까요. 이 영화에 나온, 쿠데타가 벌어진 도시의 상황은 머나먼 남미의 이국 땅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80년 5월 광주의 상황과 매우 유사합니다

베스와 에드의 갈등, 그리고 에드가 진실을 깨닫게 되는 과정에 집중한 각본이 매우 뛰어납니다. 여기에 세심한 연출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어우러져 사회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높은 예술적 성취를 이뤄 냈습니다. 사회파 감독으로 잘 알려진 코스타 가브라스의 명실상부한 최고작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남자연기상,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영화 <의문의 실종>의 포스터.

영화 <의문의 실종>의 포스터. ⓒ Universal Pictures


[넷]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2012)

빅토르 위고가 쓴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뮤지컬을 영화화한 것으로, 지난 2012년 대선 즈음에 국내에 개봉하여 크게 히트했던 작품입니다. 별다른 줄거리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이 영화를 굳이 5.18을 맞아 다시 볼 만한 영화로 꼽은 것은, 연대와 자기 희생을 바탕으로 한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발장(휴 잭맨)은 사제관의 촛대와 접시를 훔쳤다가 붙잡힌 좀도둑이었지만, 신부에게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흔쾌히 도우며 약속을 지킬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 날의 광주 사람들이 분연히 일어난 것 역시, 계엄군의 잔인한 학살에 속절없이 당한 이웃을 돕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작품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1832년 6월 봉기의 장면들도 항쟁에 나선 시민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내건 봉기였기 때문에 맥락상 차이는 있습니다만, 자유와 평등을 위해 모두가 함께했다는 점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5.18 정신은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주옥같은 뮤지컬 넘버들은 하나 같이 감정을 고양시키는 명곡들이지만, 특히 혁명 전야에 불리는 <One Day More>, 봉기 장면과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은 오랫동안 이 땅의 민주화를 염원해 온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안겨 줍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함께 나와 노래를 부르듯, 80년 5월의 민주 영령들도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 5.18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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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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