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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와 만년필>은 "고양이에게 포용적인 도시는 인간에게도 포용적인 도시"라는 기획으로 창간한 고양이 문예지입니다. 본 에세이는 <젤리와 만년필> 2호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기자 말

2013년 7월, 여느 날처럼 트위터를 보다 청소년 시국 선언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2012년 대선부터 불거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국정원이 헌법을 파괴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제헌절을 발표일로 정했다고 했다. 나는 2012년 대선부터 불거진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수험 준비로 바쁜 친구들과는 좀처럼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참석을 결정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7월 17일, 비 내리는 날 나는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갔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 817명이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렸고, 현장에만 60여 명이 모였다. 배운 것과 너무 다른 현실에 분노한다는 구호가 적힌 현수막 뒤로 제각기 다른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이 뒤섞였다. 시국 선언을 계기로 '청소년 시국회의'라는 단체에 참여했다.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하기도, 거리에서 서명을 받기도 했다. 처음만 어렵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이듬해 세월호 진상 규명 시위에 나설 수 있던 것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었다.

국정역사교과서 관련 정부서울청사 앞 일인시위
 국정역사교과서 관련 정부서울청사 앞 일인시위
ⓒ 정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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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팽목항을 다녀오고 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나를 그 상황에 대입해보거나 관련된 기사를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우연히 '가만히 있으라' 침묵 행진에 참여했다. 침묵 행진은 참가자 모두 마스크를 쓴 채 흰 국화를 들고 행진하는 적극적인 추모 행위였다. 침묵 행진은 번번이 경찰에게 가로막혔고, 우리는 인도 위에서 고립되어야만 했다. 침묵 행진의 제안자가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이윤보다 인간을"과 같은 구호를 외쳤고, 모두가 따라 외쳤다. 구호를 외치면 집회로 간주하는 모양인지 나는 광화문광장에서 백여 명의 시민과 함께 연행되었는데, 그 혐의를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는 안전망이 부재하다고 느꼈는데,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꺾이는 경험을 계속해야 했다.

상가건물을 둘러싼 임대차 분쟁 현장에 관심을 가진 것도 같은 해 겨울 무렵이었다. 라떼킹 투쟁이 그 계기였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 1309-8 서울빌딩, 재건축을 이유로 모든 가게가 쫓겨나고 마지막 남은 가게가 라떼킹 강남역점이었다. 라떼킹 투쟁은 나에게 "안전한 사회를", "이윤보다 인간을" 외쳤던 세월호 투쟁의 연장선이었다. 임대인(건물주)보다 상대적 약자인 임차인(세입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은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입법 취지와 정반대인 조항투성이였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건물주가 재건축을 이유로 임차상인을 내보내고자 하면 계약 기간이 얼마나 남았던 가게를 비워야만 했다. 해외에는 건물이 낡았을지라도 재건축을 하고 나면 건물주의 재산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에 임차상인을 내보낼 경우 막대한 보상을 해야 하는 법안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건물주가 재건축을 한다고 세입자를 내쫓고 난 뒤, 재건축을 하지 않더라도 건물주를 처벌할 수 있는 법안도 없었다. 운이 나쁘면 남의 건물에서 장사하고 있는 사람 누구나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다는 거였다.

임차상인을 내쫓는 과정 역시 폭력적이었다. 건물주는 세입자를 내쫓기 위해 사설 경비업체에서 용역을 고용해 강제 집행을 시도했다. 강제 집행은 강제로 가게를 비우는 일이었지만, 그걸 막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이 있으므로 몸싸움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누군가는 새로 산 패딩 점퍼가 찢어졌고, 또 누군가는 얼굴에 상처가 났다. 사람이 사람을 밀고 뜯는 와중에 연이어 질문이 떠올랐다.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선 폭력을 사용해도 합법인가. 재산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세입자의 재산권은 보호하지 않는가. 해도 해도 안 되겠다 싶을 때가 되어서야 집행관은 집행 불능을 선언하고 돌아갔다.

라떼킹 강남역점
 라떼킹 강남역점
ⓒ 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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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용역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라떼킹은 가게 앞을 컨테이너로 막았다. 음료를 파는 동시에 '초단기 임대업'이기도 한 카페 장사가 입구를 막다니. 정상적인 영업이 불가능했다. 뚫리면 끝장이라는 뜻이었다. 매일 밤 사장님은 물론이고, 같은 처지의 다른 임차상인부터 시민단체 활동가, 정당인, 예술가 등이 번갈아 보초를 섰다. 누군가 보초를 서면 나머지는 돗자리를 펴고 눈을 붙였다. 한쪽에 놓인 박스에는 언제나 컵라면과 생수가 가득 담겨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 전쟁이 따로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임대차 분쟁은 건물주에게 기울어져 있는 싸움이라서 세입자의 곁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필요했고, 지치지 않으려면 자주 곁을 보아야 했다. 싸우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늘 곱지 않아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물어왔고, 나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선택권이 라떼킹에게 없다는 건 분명하다고 대신 답하곤 했다.

집행을 막아 낸 어느 날은 건물주가 사는 타워팰리스로 찾아가기도 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꼬박꼬박 임대료를 바치던 세입자에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용역 깡패를 선물하는 건물주가 여기에 삽니다" "퇴직금에 대출금을 더해 차린 가게를 삼 년 만에 내쫓는답니다" "건물 높여서 세를 더 받겠다고요" 한겨울 동트기 직전의 칼바람을 맞으며 확성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떤 건물주는 동네에 망신살이 뻗친다고 대화하자던 데, 어떤 건물주는 집까지 찾아올 줄 몰랐다며 합의하자던 데" 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타워팰리스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 얼굴 한번 본 적 있을까. 촘촘히 박혀 있는 창문 중 어느 하나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괴물이 있다면 저게 괴물이지. 방음도 잘 되나 보네. 마지막으로, "건물주는 임차상인과 상생하십시오"라고 외쳤다. 메아리치는 구호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건물주와 세입자는 상생이 가능한 관계일까.

해가 뜨면 김밥을 나눠 먹으며 라떼킹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서로 물었다. 하는 일도 다르고 사는 환경도 다르지만, 타인의 싸움에 연대하는 이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떼킹이 당한 일에서 불의를 목격해 분노했거나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연대하는 이들 대부분이 임차상인이거나 세입자라는 신분의 청년 또는 예술인이었다. 당장 원룸에 살며 월세 내기도 빠듯한 사람들이 절박한 싸움에 함께하고 있었다. 임대료가 안정되길 바라는 건 세상에 우리 같은 세입자뿐이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건물주부터 공인중개사, 금융권, 행정까지 모두 임대료가 오르길 바라니까. 그들은 그래야 돈을 더 버니까.

라떼킹 투쟁이 고비를 넘고, 일일이 언급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가게가 싸우는 동안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용어가 친숙해졌다. 한국에서는 건물주와 공인중개사 사이에서 '상가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투기가 성행해서 유독 상가 지역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나 상가 지역에서 벌어지는 젠트리피케이션도 결국 주거지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망원동이나 연남동이 대표적이었다. 건물주는 주거 세입자보다 더 많은 임대료를 낼 수 있는 상가 세입자를 선호했고, 그만큼 주택을 개조하거나 재건축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때는 연대하던 입장이었지만, 언제 당사자가 될지 모른다. 올해 2월에는 창천동에서 연희동으로 이사를 왔다. 물론 부자 동네 연희동이 아니라 언덕 너머 남가좌동과 맞닿은 연희동이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애인과 종종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다음엔 은평구로 가야 하나. 거긴 집값이 싸다던데. 여기서 밀려나면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게 밀려나고 밀려나다 보면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곳까지 밀려나지 않을까. 그때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과 마주할까.

※고양이 문예지 <젤리와 만년필> 2호 구입하기 : http://aladin.kr/p/tn7S9

덧붙이는 글 | <젤리와 만년필> 2호에 권두 산문으로 수록된 글입니다.



태그:#젤리와만년필, #젠트리피케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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