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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여기 누워요. 내가 밟아줄게."

별다른 약속이 없는 한, 매일 밤 9시쯤이면 알람시계처럼 엄마에게 하는 말이다. 올해 77살인 엄마는 다행히 자기 관리를 잘해서 큰 병은 없다. 다른 할머니들이 그렇듯 무릎과 허리에 아픈 것 외에는 특별히 아프다는 말로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안마봉으로 다리를 두들기며 아프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나도 바빴던 때여서 쉬고 싶은 마음에 애써 못 들은 척 안 보이는 척했다. 아주 어쩌다 내가 컨디션이 좋거나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때만 인심 쓰듯 주물러 드릴 뿐이었다.

매일 행사처럼 안마를 해드리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하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내 몸이 아파서. 나이가 들어가니 여기저기가 괜히, 정말 괜히 아프고 쑤셨다. 나도 엄마가 쓰는 안마봉으로 여기저기 두들겨 대는 날이 잦아졌고, 그래도 시원치 않을 땐 내 손으로 셀프 마사지를 했다.

내 손으로 하는 안마는 어쩐지 아무리 해도 시원치가 않았다. 내가 끙끙거리고 있는 날에는 보다 못한 엄마가 "이리 와봐. 내가 밟아 줄게" 하신다. 이제 힘이 빠져버린 엄마 손으로 주물러봐야 내가 안마봉으로 두들기는 것만큼도 시원치가 않지만, 그나마도 필요할 땐 염치불구하고 엄마 앞에 엎드린다.

내 몸이 아프고서야 엄마가 혼자 안마봉을 두들길 때 얼마나 아팠는지가 헤아려졌다. 그래서 신호를 보낼 때 모른 척했던 나의 무심함이 후회되면서 안마를 해주겠다고 나서게 되었다. 물론 나도 엄마의 안마를 덜 미안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구실이 되기도 했고. 

내 몸이 아파서 시작된 안마 타임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엄마와 수다를 떠는 시간이 되었다. 이때는 엄마가 소화할 수 있을 만한 소소한 소재를 선택한다. 공연히 마음 쓸 만한 이야기나 안 좋은 이야기는 자제하는 편이다. 엄마 속만 상할 뿐이기도 하고, 엄마의 위로는 종종 초점을 어긋나서 속만 더 뒤집어지는 경험을 했던 터라.

또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마음 상한 적이 있어서 어려운 주제도 피한다. 설명하는 과정에 엄마가 못 알아들으면 답답한 마음에 살짝 톤이 높아지는데, 금세 서운해하시는 통에 그 마음을 풀어주는 2차 서비스까지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까지 하려면 몹시 피곤해지므로 안 하는 게 낫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난 대개 엄마도 알고 있는 내 친구들의 소식을 전하고, 엄마는 요즘 막 배우기 시작한 요가 수업 이야기를 하거나 엄마 친구들의 흉을 보기도 한다.

아주 가끔 예외도 있다. 올 초에 내 등을 밟아주던 엄마가 갑자기 훌쩍이셔서 깜짝 놀라 "왜? 무슨 일 있었어?" 했더니 하시는 말.

"어휴~ 박복한 년. 자식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고."

난데없는 그 말에 빵 터져서 웃었는데, 또 난데없이 쑤셔 박아 두었던 고단함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바람에 울음도 빵 터졌다.

며칠 전에는 더 나이 들기 전에 집을 처분해서 나와 오빠에게 나눠줘야겠다고 하시길래 "엄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하고 농담처럼 던졌는데, 그 말에 엎드려 있던 엄마는 등을 들썩이며 우셨다. 아마 팔순 앞둔 엄마 마음엔 오십을 앞둔 내가 마음 안 놓이는 아픈 가시인가보다.

남들처럼 살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딸이 걱정되는 엄마와, 남들처럼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해진 나는 가끔 이렇게 마음을 풀어놓는다.

엄마는 내가 박복하다고 하지만...

 "엄마에게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신이 갚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아닐까."
 "엄마에게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신이 갚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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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알까. 점점 약해지고 있는 엄마를 돌볼 수 있는 사람이 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또 엄마 눈에는 박복할지 몰라도 엄마 같은 엄마를 둬서 난 복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난 우리 엄마가 늘 최고였다. 고등학생 때 연극을 하겠다고 하면서 공부를 등한시할 때, 다른 친구들의 엄마들은 결사반대를 했지만 엄마는 달랐다. 반대는커녕 밥차 아줌마처럼 연극반 친구들한테 라면과 밥을 해대기 바빴다.

엄마의 지원과 응원은 내 멋대로 만은 살 수 없게 하는 '당근 같은 채찍질'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반에서 거의 꼴찌 그룹까지 내려갔던 나는 고3이 되자마자 공부에 '올인'했다. 고3 때 엄마는 자율학습을 하는 나를 위해 늘 저녁때마다 금방 한 따뜻한 도시락을 학교 경비실에 맡겨 놓곤 했다.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엄마는 비 오는 날이나 귀가가 늦은 날에는 늘 전철역까지 마중을 나와 주기도 했다. 내가 독립했을 땐, 그러지 말라고 해도 우렁각시처럼 반찬을 꽉꽉 채워주고 가시곤 했다. 테이블 위에 '힘내라, 사랑한다'는 메모를 남기는 것도 잊은 적이 없다.

엄마에게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서 신이 갚을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아닐까. 가끔 나는 내 비혼의 원인을 거기서 찾기도 한다. 그래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잘근잘근 서로를 밟아주고 주물러 주는 안마 타임은 엄마와 내가 하루를 마감하는 일종의 의식이자 변제의 시간이기도 하다.

"엄마 들어간다. 너도 일찍 들어가 자."

오후 9시 반쯤이면 엄마는 앵무새 같은 말을 하며 방으로 들어가신다. 한참 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면서 습관처럼 엄마 방을 들여다본다. 가끔은 엄마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며 호흡을 확인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TV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길래 얼른 방문을 열었다. 엄마의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어서 놀라서 물었다.

"엄마,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무슨 일이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드르릉~"소리가 울려 퍼진다. 웃음과 안도의 한숨이 한꺼번에 나왔다. 잠시 엄마의 얼굴을 보다가 혼자 인사하며 나왔다.

"엄마, 내일 아침에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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