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오픈 홈페이지가 소개하는 정현 선수.

호주 오픈 홈페이지가 소개하는 정현 선수. ⓒ 김창엽


정현 선수가 24일 열린 호주 오픈 8강 경기에서 큰일을 해냈다. 한국인 최초로 테니스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4강에 진입한 것이다. 정현은 24일 벌어진 테니스 샌드그렌 선수(미국)와 경기에서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를 물리쳤다.

국내외의 관심은 26일 열리는 4강전에 모아지고 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의 예견대로 상대는 페더러다. 잘된 일이다. 세계적인 선수로 크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레전드인 페더러와 같은 선수를 상대해야 한다. 이기면 좋지만 져도 잃는 게 없다. 페더러와 그랜드 슬램에서 4강전을 치른다는 그 자체로 세계 테니스 팬들의 뇌리에 정현은 깊이 각인될 것이다.

정현이 객관적인 면에서 페더러에 앞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체력이다. 이번 대회 페더러는 주간 세션 경기를 한번 치렀다. 한낮 기온이 섭씨 40도를 훌쩍 웃도는 날이 많았던 이번 대회 동안 야간 경기를 주로 한다는 것은 큰 이득이다. 경우에 따라 주간 경기는 야간 경기에 비해 체력 소모가 2배 안팎 클 수 있다. 하지만 15살 가량 젊은 나이는 정현의 틀림없는 강점이다.

체력은 거의 모든 스포츠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정현의 게임 전략은 여러 가지로 이유로 체력전에 맞춰져야 한다. 매 게임, 매 세트 가능한 포인트를 길게 끌고 가는 것이다. 처음 두 세트 가운데 한 세트만 건질 수 있다면, 희망컨대 승리까지도 점쳐볼 수 있다.

체력전 벌이기 위한 준비

페더러와 체력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준비해야 할 요소들이 있다. 하나 하나 짚어 보자. 페더러는 10대 때부터 랠리를 길게 끌고 가지 않는 경기 스타일을 고수해 왔다. 나달보다 5살이나 더 먹었지만, 그의 몸에 새겨진 마일리지는 나달보다 그리 많다고 할 수 없다. 우리 나이 37살에도 최상급 기량을 유지하는 데는 경기당 시간이 현저하게 짧은 그만의 플레이 스타일이 큰 몫을 했다.

체력전으로 끌고 가면, 페더러는 몸만 피곤해지는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을 것이다. 테니스는 골프와 함께 대표적인 멘털 게임이다. 아주 예민한 운동경기여서 매치 중 몇 차례 찾아오는 스트레스나 기분 언짢음만으로도 흐름이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체력전으로 끌고 갈까? 수많은 요소들을 다 짚어보고 대응책을 마련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몇 가지 고갱이만 훑어보자.

우선 서브. 페더러는 세계테니스협회(ATP)집계하는 서비스 랭킹에서 3위에 당당히 올라 있다. 서비스 랭킹을 좌우하는 건 속도나 에이스 숫자만이 아니다. 상대가 받아 넘기더라도 결국 서버가 포인트를 잘 챙길 수 있는 서비스를 얼마나 잘 구사하는가가 중요하다.

페더러는 서브 속도만으로는 세계 상위 10위권에서도 한참 멀리 있다. 그러나 그는 가장 다양한 구질의 서브를 구사하고, 무엇보다 서비스 폼을 숨기는 데 귀재이다. 그의 서브는 읽어내기가 가장 어려운 것으로 선수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다. 반면 상대 서브는 가장 잘 읽는 축에 속한다.

서비스 폼 속이기(혹은 숨기기)의 원조는 또 다른 테니스 전설 피트 샘프라스이다. 한동안 페더러의 코치였으며, 앞서 피트 샘프라스를 지도한 유명한 코치 폴 애너코니는 샘프라스 서비스를 독특한 훈련법으로 강화시켜준 장본인이다.

그는 샘프라스가 서브를 넣기 위해 토스를 하면 그때서야 원, 투, 쓰리 등으로 미리 약속한 지점의 번호를 옆에서 불러줬다. 같은 폼으로 공을 토스 한 뒤 여러 다른 위치에 서비스를 꽂아 넣도록 하는 기술을 꽃피운 사람이다. 페더러가 서비스 폼 숨기기에서 전성기 샘프라스를 능가하는 만큼 이런 능력은 두 번 강조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 페더러는 거의 유일하게 점 서브(spotted serve)를 구사하는 선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달이나 조코비치 같은 최일류 선수도 대부분 라인 서브(lined serve)가 기본이다. 점이 아니라 선 즉 방향을 잡아 서브를 넣는 것이다. 헌데 페더러는 상대 서비스 박스의 어떤 지점을 콕 겨냥해 서브를 넣는다.

페더러의 점 서브는 그의 매우 다양한 서브 구질과 함께 그로 하여금 상대의 서브 리턴 예측을 쉽게 한다. 페더러의 점 서브는 그가 랠리를 길게 가져가지 않는 원천이기도 하다. 테니스 자질만으로 따지면 젊은 선수들 가운데 최고라는 호주의 닉 키리오스는 연전에 단호하게 이런 말을 했다.

"공격 때, 1,3,5구, 수비 때 2,4,6구에서 페더러만큼 샷 플레이스먼트가 좋은 선수는 없다."

페더러 서브를 장황하게 얘기하는 건, 그의 서브에 압박감을 주지 않고는 경기를 애초에 체력전으로 끌고 가기도 어렵고, 그가 현존 선수 중 가장 탁월한 서버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다. 24일 8강전을 앞두고 적지 않은 국내 언론이 정현이 상대인 샌드그렌을 기량에서 다 앞서지만, 서브만큼은 샌드그렌 선수가 우위라는 식의 보도를 내보낸 적이 있다.

그러나 ATP분석에 따르면, 올초 뉴질랜드에서 벌인 샌드그렌과 경기에서 정현은 에이스 숫자 7대 2로 샌드그렌에 밀렸지만 서비스 평가점수는 오히려  더 높았다는 사실을 국내 언론들은 간과했다. 서비스는 에이스나 속도로만 평가되는 게 아니다. 정현이 페더러가 상대한 그간의 선수들보다 페더러의 서비스를 잘 처리할 수 있다면,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수 있다.

이기든 지든, 잃을 게 없는 경기

랠리를 길게 끌고 가는 또 다른 기본은 수세에 몰렸을 때 상대의 가운데 쪽으로 공을 밀어넣는 것이다. 이런 방어적 샷은 스피드가 좋을 필요도 없다. 가운데로 깊게만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페더러라 할지라도 각을 잡아서 치는 데 애를 먹고 범실이 있을 것이다. 강하지 않은 볼을 상대 코너에 깊숙이 힘차게 집어 넣으려면 혼자 힘으로 스핀과 스피드를 다 증강시켜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어가기 쉽고 이에 따라 에러 또한 나기 쉬운 것이다.

페더러는 또 "테니스는 깊이가 아니고 각"이라는 신념을 가진 선수이다. 그는 발리마저도 교과서와 달리 깊이 넣기 보다는 각을 잡는 예가 많다. 속칭 앵글 샷의 귀재인 것이다. 페더러에게 섣부른 앵글 스트로크 공격은 되치기로 종착될 수 있다.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또 하나 페더러의 독보적인 면은 그 어떤 서브 앤 발리어 보다 넷트 플레이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페더러는 앞서 언급했듯이 볼을 길게 치지 않는 스타일이다. 51대 49 정도만 유리해도 공격으로 막바로 전환한다. 포인트를 80대 20 정로 익힌 뒤에야 결정적인 공격을 하는 나달과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페더러는 정현의 젊음과 기세를 의식할 것이다. 26일 경기에서 잦은 네트 대쉬는 불보듯 뻔하다. 페더러의 네트 대쉬는 어느 정도는 패턴이 있다. 상대의 백핸드 쪽에 깊숙이 공을 보내놓고 각을 좁혀서 네트로 길을 따라 들어오는데 상대 입장에서는 패싱 각을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정현은 패싱에서 세계 정상급 수준의 기량을 갖고 있다. 페더러의 네트 대쉬를 좌절시킬 수 있는 패싱 각을 다듬어 낸다면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서브와 앵글 샷, 네트 대쉬 이렇게 3가지 측면에서 페더러를 일정 수준 압박할 수 있다면, 랠리를 최대한 길게 가져가고 상대적으로 많은 범실을 유도할 수 있다. 당연히 경기 시간도 길어질 것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무엇보다 페더러를 괴롭히려면 초반 1,2세트가 중요하다. 두 세트 가운데 한 세트만 뺏어올 수 있다면 객관적으로 크게 밀리는 승률을 꽤나 획기적으로 높게 끌어올릴 수 있다.

여전히 정현이 언더독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차분한 정현으로서는 지든 이기든 이만한 배움의 기회는 평생 다시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생애 가장 큰 레슨이 될 수도 있는 준결승이니 만큼 후회없는 경기를 펼치도록 마음을 가다듬길 빈다.

테니스는 막 물이 올라서, 또 영어는 이제 맛을 알기 시작해서 정현은 한참 재미를 느끼는  듯하다. 젊은 외국인 동료 테니스 선수들에게서 정현이 그간 자주 듣던 말이 있을 것이다. Nothing to lose. 잃을 게 없는 경기라는 점, 응원하는 사람들보다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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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싣습니다.
정현 페더러 호주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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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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