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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1월은 매우 특별한 달이다. 열흘의 신년 연휴가 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예수세례축일, '구 신년일'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거리의 신년 장식조명.
 러시아의 1월은 매우 특별한 달이다. 열흘의 신년 연휴가 있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예수세례축일, '구 신년일'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거리의 신년 장식조명.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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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일 밤 12시, 러시아는 새해를 맞았다. 어디 러시아뿐일까. 새해를 반기는 관습은 여타의 나라라고 다를 바 없고, 특별한 요리를 먹으며 새해 첫날을 즐기는 것 역시 러시아만의 풍습은 아닐 터이다.

한국인들은 보신각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연다. 미국인들은 뉴욕 타임스 광장에서 크리스탈 구슬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해가 바뀌는 것을 실감한다. 사람들 가운데 직접 현장을 찾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집에 앉아 텔레비전으로 행사 장면을 지켜본다. 

온 국민이 같은 행사를 지켜보며 '신년 카운트다운'을 하는 관습은 텔레비전이 보급된 이후에야 등장할 수 있었다. 마치 유구한 전통처럼 느껴지는 신년맞이 방식이 사실은 매우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전통은 늘 변화하고 새롭게 만들어진다.

러시아의 신년맞이 관습은 이처럼 '만들어진 전통'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전 기사 '러시아 산타는 설날에 선물을 배달한다'에서 언급했듯, 신년맞이가 러시아 최대 명절이 된 것은 20세기, 러시아 혁명 이후였다.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주의 신념은 산타클로스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성탄이 아닌 새해와 결부시켰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미국에 이민 온 러시아 가족들 가운데도 러시아식 신년맞이를 고수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1월 초에 뉴욕의 거리를 걷다가, 가게의 쇼윈도에서 미국식 산타와 나란히 놓인 '뎨드 마로스'(Дед Мороз) 인형을 보기도 했다. 미국에 크리스마스트리와 산타를 소개한 이들도 북구의 이민자들이었으니, 새로운 이민자들이 신년 트리와 산타를 소개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러시아식 새해맞이 : 샐러드, 샴페인, 푸틴

러시아의 신년음식 '슈바'와 '소원 마시기'를 위해 준비된 샴페인. 사지 속 슈바 샐러드는 '털옷 입은 청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러시아의 신년음식 '슈바'와 '소원 마시기'를 위해 준비된 샴페인. 사지 속 슈바 샐러드는 '털옷 입은 청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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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에, 러시아에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러브 액추얼리>가 방영되는 것을 보았다. 미국과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자주 방송되는 영화다.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에서는 신년특집 기념으로 이 영화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러시아에서 트리, 산타, 선물이 신년의 상징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성탄이 가까와 오면, 뉴욕 등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거리에서 트리용 나무를 쌓아놓고 파는 '크리스마스 트리 시장'이 열린다. 나는 러시아에서 뉴욕에서 본 것과 똑같은 트리시장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봤다. 12월 31일 센나야 광장에 나갔다가, 부지런히 나무를 고르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나무를 사지 않을 때, 러시아에서는 트리 시장이 성업 중이었다 .

러시아에서도 신년은 특별한 음식을 먹는 날이다. 특히 인기 있는 음식은 감자, 당근, 계란, 닭고기 등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올리비에 샐러드'다. 한국에서도 샐러드에 마요네즈를 넣는 경우가 많아, 이 음식은 한국 여행자에게도 매우 친숙하게 느껴진다. 

청어 샐러드 '슈바'도 신년에 빼놓을 수 없다. 절인 청어, 감자, 붉은 사탕무우(비트) 등을 케이크처럼 층층이 쌓아서 만든 매우 독특한 샐러드다. 다 만들고 나면 채를 썰어 얹은 비트나 당근이 마치 털처럼 보이는 탓에, '털옷 입은 청어'라는 귀여운 애칭으로도 불린다. 한국인들 입맛에는 좀 비린 편이지만, 연말이나 연초에 러시아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 번 도전해볼 만하다.

러시아인들은 연말연시에 감귤(만다린)을 즐겨먹고, 샴페인을 마시며 새해를 맞는다. 물론 새해를 축하하기 위해 샴페인을 마시는 관습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인들이 마시는 방법은 확연히 다르다.

우선 펜, 종이, 성냥이 필요하다. 해가 바뀌기 직전 종이조각에 새해 소원을 적는다. 이 종이에 불을 붙여 재를 만든 후, 해가 바뀌는 순간 샴페인 잔에 섞어 마신다. 이제 소원이 이뤄지기를 기다리면 된다.

축배를 들기 전, 많은 러시아인들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푸틴 대통령의 신년 축사를 듣는다. 한국에서 재야의 종소리, 타임스 광장의 구슬 역할을 대통령이 하는 셈이다. 물론 이때는 가족들이 음식을 나누고 소원을 적기 바쁜 시간이다.

푸틴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새해 축사를 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와 새해 축사를 하고 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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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새해가 찾아오고, 크렘린 종탑의 종 소리가 전국 텔레비전을 통해 울려퍼진다.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한 채 새벽 불꽃놀이를 보러 나간다.

"러시아인들은 새해 아침에 뭐해?"

친구 알료나에게 물었다.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가는 한국의 풍습과 비슷한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그냥 밤새 놀고 늘어지게 자."

러시아 기독교인들의 '차가운' 신앙

예수세례 축일에 러시아인이 얼음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예수세례 축일에 러시아인이 얼음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
ⓒ 비탈리 아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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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크리스마스는 연초에 찾아온다. 새해를 맞고 일주일이 지나면 성탄절이다. 러시아 기독교인 대다수가 정교도이고, 러시아 정교가 율리우스력을 따르기 때문이다. 전세계가 크리스마스 전후로 흥청대는 데 비해, 러시아인들은 이 날을 차분하고 종교적인 날로 기념한다.

혹시 러시아인의 믿음이 약해서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해다. 크리스마스 이후 12일이 지나면 러시아인의 불처럼 뜨거운 (정확히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믿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1월 19일에 찾아오는 '예수 세례축일'이 그 날이다. 

모두가 알듯, 러시아의 겨울은 춥고 그중에서도 1월이 가장 춥다. 하지만 예수가 요단강에서 세례받은 그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에, 러시아인들이 집안에 머물 리 없다. 이들은 전국의 강과 호수에 십자 모양의 구멍 뚫고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몸을 담근다.   

2018년 한 해 만도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이 얼음 속으로 들어갔다. 올해에는 푸틴 대통령도 행사에 참가했다. 그가 공개적으로 세례축일 행사를 치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춥지 않습니까?" 한 기자가 묻자, 푸틴이 답한다.

"아뇨, 아주 좋아요."



미국의 추운 지방에도 '폴라베어 클럽'이 있기는 하다. 겨울에 취미 삼아 얼음물 속에 뛰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의 세례축일은 성스러운 행사다. 얼음에 구멍을 뚫고 나면 성직자가 성수를 붓고 축도를 하며, 참가자들은 성호를 그은뒤 물 속으로 들어간다. 

누가 감히 러시아 신자들의 믿음이 미지근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러시아의 '새 새해'와 '헌 새해'

창가에 장식된 별 모양의 신년장식. 친구 폴리나가 모델이 되어 주었다.
 창가에 장식된 별 모양의 신년장식. 친구 폴리나가 모델이 되어 주었다.
ⓒ 강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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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새해 첫 달이 저물어 간다. 만일 집안에 지금까지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다면, 그 이유는 게으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지금까지 트리가 남아 있다 해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1월 14일에 다시 한 번 '새해'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1월 1일은 '새 새해'고, 1월 14일은 율리우스력에 따른 '헌 새해(Старый Новый год)'다. 비록 공식적 신년은 1월 1일이지만, 적잖은 러시아인들이 '헌 새해'도 함께 즐긴다. 가족들이 다시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다시 한 번 새해 기분을 내는 것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새해 기분'을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나라다. 열흘씩 쉬며 새해를 '슈퍼 명절'로 기념하는 나라이니, 새해가 다른 나라보다 길다고 해도 이상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태그:#러시아 , #올리비에, #슈바, #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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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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