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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집유, 무전실형'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구속중이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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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2심 판결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국민이 아무리 촛불혁명으로 정치권력을 바꿔도, 경제 권력은 여전히 굳건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판결이었다.

워낙 충격적이어서였을까. 많은 이들이 판결에 대한 논평을 내놨는데 그 중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은 것은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의 촌철살인 한 마디였다. 바로 '유전집유, 무전실형'

그는 "한국 재벌의 불패신화와 '유전 집행유예, 무전 실형'이라는 기득권자의 진리를 다시 확인해 준 것"이라며, "다른 사건 판결과 비교해 봐도 이재용 부회장 1명을 위한 판결이라는 점을 감추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물론 이런 비판적인 시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 등은 이번 판결을 구국의 결단인양 치켜세웠고, 소위 태극기 세력들은 그것보라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억울하게 탄핵된 거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여론은 이번 판결에 수긍할 수 없다는 의견이 높지만,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나 불매운동 등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삼성이 두렵기도 하거니와 으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책임은 정치권의 그것과 다르다는 막연한 생각들. 사법부가 삼성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강요에 의해 뇌물을 줄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로 규정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들이 만연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과연 그럴까? 삼성을 위시한 기업들의 사회적인 책임은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부는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일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전에 읽었던 마조리 켈리의 <주식회사 이데올로기>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은 우리가 주식회사에 가지고 있는 생각 자체가 허구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삼성이 우리 사회에서 갖고 영향력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책은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가 경쟁적으로 부르짖었던 경제 민주화를 이미 15년 전에 전면적으로 다룬 저작이기도 하다. 비록 박근혜 후보가 당선된 뒤 경제 민주화는 공수표가 되고 말았지만, 이번 이재용 재판만 봐도 알 수 있듯 경제 민주화는 아직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경제 민주화 없는 정치 민주화는 결국 공염불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적경제가 대세라고 하지만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이 경제 민주화의 하나의 방법론이지 않은가.

'주식회사'라는 신화

21세기 경제 귀족주의의 탄생
▲ <주식회사 이데올로기> 21세기 경제 귀족주의의 탄생
ⓒ 북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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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글을 통해 무엇보다 주식회사라는 존재가 하나의 신화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주식회사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꽃이라고 생각하고, 주식회사의 이익은 주주의 것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과거 신분제 사회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즉, 귀족의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귀족만이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던 17세기 영국 사회의 편견이 그대로 주식회사에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주주의 이해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주주만이 통치의 권한을 가지는 주식회사의 원리.

"실제로 지식회사를 통치하는 것은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라는 정신적 유산, 바로 부를 소유한 이들만이 중요하다는 사상이 있다. 거기에는 이들만을 기업 사회의 진짜 일원으로 여기는, 띠라서 이들만이 유일하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더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담겨 있다." – 97p

"고대 문명에서는 사회의 운명을 지배 계급의 운명과 동일시했다. 오늘날 주식회사의 운명을 주주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101p


생각해보자. 왜 주식회사의 경영은 주주들만이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주식회사를 이루는 것은 주주뿐만이 아니다. 직원도 회사의 일부이다. 직원 없는 회사는 존재할 수 없다. 직원은 언제나 대체할 수 있다고? 그것은 주주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까지 직원을 단순히 비용으로만 치부했다. 돈을 가진 주주들이 기업을 통치하는 것을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원리로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기업 주주들의 사회적인 영향력도 인정해 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오늘날 주주들이 기업의 통치를 장악하는 것은 자연법칙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규범규칙에 불과하다. 규범의 표현이요, 누가 중요한지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편견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주주 중심주의를 자유 시장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본다." – 104p


경제의 민주화

그럼 이런 주주 중심의 주식회사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 즉 민주주의의 법칙을 경제에도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으므로 기업의 직원과 이들이 속한 공동체도 자본의 소유주와 똑같은 경제적 권리를 누린다." – 147p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중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종업원과 지역 사회의 경제적 권리는 자본 소유의 경제적 권리와 동등하다." – 161p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자신들도 회사의 일원으로서 회사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잉여의 정당한 몫을 이야기해야 한다. 혹자는 스톡옵션을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노동자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에 뇌화부동하면 안 된다.

"기업의 부는 자본과 노동이 결합해 만든 산물이며, 이에 따른 권리 또한 양쪽에 귀속되어야 한다. 생산성이 임금보다 훨씬 빨리 증가하고, 그 차이가 모두 주주의 몫으로 돌아갈 때 직원들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빼앗기는 셈이다." - 172p


이와 함께 주식회사의 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지금까지 주식회사의 이윤, 주주들이 차지하는 이윤은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개인의 사유 재산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이는 약탈적인 귀족주의의 유산일 뿐이다. 주식회사의 이윤은 공공의 이익과 떼려야 뗄 수 없다.

예컨대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들을 떠올려보자. 언론들은 그들이 엄청난 영업이익을 올렸다고 띄워주지만 그것에는 거품이 끼어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정부의 친재벌적인 환율정책으로 국민들의 손해만큼 돈을 벌기도 하며, 수출품과 내수품의 질을 다르게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도 한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공공선을 위해야 하며,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공공선을 해쳐서는 안 된다.

"법 앞에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원칙 아래 부유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권리를 누릴 수 없으며, 주식회사는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 상장 주식회사는 재산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반 공적 기구이며, 주식회사를 이루는 사람에는 종업원이 포함된다. 상장 주식회사는 주 정부의 허가에 따라 설립되어 공공의 이해와 사적 이해 모두에 부합해야 하며, 내부적으로 민주적 절차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 – 244p


경제 민주화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정치 민주화가 지난 10년 동안 그리 쉽게 역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 민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가 심한 사회에서 어찌 만인이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겠는가. 비슷한 범죄를 저질러도 삼성과 롯데에 대한 판결이 다른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부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가 주식회사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신화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부터가 경제 민주화의 시작이다.


주식회사 이데올로기

마조리 켈리 지음, 제현주 옮김, 북돋움(2013)


태그:#주식회사 이데올로기,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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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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