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드업 코미디는 영미권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코미디 쇼 장르입니다. 한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다수의 청중을 웃기는 단순한 형식으로, 코미디언의 성향과 재능에 따라 다채로운 공연이 가능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이름난 코미디 배우나 토크쇼 진행자들은 대부분 스탠드업 코미디 경력을 갖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주로 클럽이나 바, 극장에서 많이 공연되며 TV 프로그램으로도 방영되는데, 국내에서는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을 통해서 접할 수 있습니다. 특히 넷플릭스는 자체 투자를 통해 다양한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지금 웃기러 갑니다(The Standups)>라는 시즌제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까지 제작했을 정도입니다.

넷플릭스 최초의 '한국산 스탠드업 코미디'

 <유병재: 블랙코미디>의 티저 광고 이미지.

<유병재: 블랙코미디>의 티저 광고 이미지. ⓒ NETFLIX


<유병재: 블랙코미디>는 2017년 8월에 있었던 코미디언 유병재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실황을 담은 넷플릭스 프로그램입니다. 유병재는 < SNL 코리아>의 작가이자 출연진으로 맹활약했고, 지금도 각종 예능에 출연하며 특유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만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표 장면을 패러디한 도입부로 시작하는 쇼는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습니다. 적어도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다른 미국 코미디언의 쇼보다 더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미국 프로그램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웃을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번역된 자막으로는 뉘앙스가 충분히 전해지지 않기도 하니까요.

특히, 하나의 명제를 제시하고 그 명제가 품고 있는 여러 가지 아이러니를 드러내면서 웃기는 형식이 눈에 띕니다. 이것은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에서 자주 활용되는 기법인데, 유병재는 이를 한국 사람에게 익숙한 에피소드와 결합해서 웃음을 자아냅니다. '아이들 교육은 중요합니다', '부모님의 소비 교육', '분노 조절을 잘해요' 등과 같이 하나의 주제에서 논리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듣다 보면 금세 시간이 가 버립니다.

또한, 자기 비하와 예리한 비판을 적절하게 섞으면서 관객의 웃음을 끌어내는 능력도 좋습니다. 여기에는 적절한 시점에 들어가는 표정 연기와 맛깔스러운 대사 처리가 큰 역할을 합니다. 기발한 정치 풍자를 곳곳에 배치하여 포인트를 준 것도 효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유병재의 개그는 특정 계층이나 성향의 사람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웃음거리로 삼는 것은 자신의 핸디캡뿐입니다. 몇 년 전 어떤 남성 코미디언이 여성이나 외국인을 비하하는 농담을 웃음의 소재로 삼아서 역풍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웃자고 한 농담인데 왜 과민 반응하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웃겨야 할 필요가 있나?'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유병재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누군가를 비하하지 않고도 충분히 웃길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는 개그 소재를 선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연 중에도 듣는 이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도 최대한 신경을 씁니다. 후반부에 성적 묘사가 들어가는 개그를 할 때 배경 설명을 충분히 하고,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려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그 예입니다. 보통 설명이 많으면 개그가 재미없어지기 마련인데, 그의 경우는 설명까지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오는 4월 말에는 유병재의 새로운 스탠드업 코미디 쇼 < B의 농담 >이 공연될 예정입니다. 이 공연은 기획 단계부터 넷플릭스와 함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어떤 새로운 코미디를 보여 줄 것인지 기대됩니다.

한국 여성 대중예술인에게도 기회를

 신인 걸그룹(?) 셀럽파이브의 데뷔 싱글 <셀럽 NO.1> 앨범 재킷.

신인 걸그룹(?) 셀럽파이브의 데뷔 싱글 <셀럽 NO.1> 앨범 재킷. ⓒ 컨텐츠랩 비보


넷플릭스에서 미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면서, 또 <유병재: 블랙코미디>를 보면서 떠올랐던 건 우리나라의 몇몇 여성 코미디언들입니다. 입담 좋고 연기력 있으면서, 이런 식의 풍자와 아이러니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들이 사실 꽤 많습니다. 제 판단으로만 대충 꼽아 봐도 박지선, 안영미, 김신영, 이국주 같은 이들, 그리고 연배는 훨씬 위지만 신인 시절 잠깐이나마 괜찮은 스탠드업 코미디를 보여줬던 박미선 역시 실력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기회가 없다는 겁니다. 한국의 다른 모든 분야가 대개 그렇지만 대중문화 매체에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펼칠 기회는 더욱 제한적입니다. 송은이와 김숙의 경우, 김생민의 과거 성추행 문제로 인해 자신들이 주도한 프로그램 <영수증>이 폐지되는 상황을 겪었는데 이런 일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일, 넷플릭스에서 한국 여성 코미디언들을 내세운 스탠드업 코미디 시리즈를 만든다면 어떨까요? 특별한 재능을 가진 한국 여성 코미디언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면 그런 시도 자체만으로 충분히 주목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존 매체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분야이고, 넷플릭스를 열심히 보는 한국 이용자 중에 여성 비율이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한국의 에이미 슈머나 세라 실버맨(두 사람 다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를 넷플릭스에 선보인, 미국의 유명 여성 코미디언)을 발굴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식으로든 한국의 여성 대중예술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넷플릭스가 아니더라도, 이들이 마음 놓고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지금보다는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예능을 보고 싶어 하는 잠재 시청자층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더 두터울 수 있습니다. 매체 관계자들이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권오윤 시민기자의 블로그(cinekwon.com)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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