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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팬들은 언제나 영웅의 출현을 고대한다. 영웅이 팬들에게 이토록 열렬한 응원과 지지를 받는 까닭은 그들 개개인이 저마다 특별한 감동을 자아내고 지켜 보는 이들의 정신마저 고양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동시대인으로서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나의 영웅 김연아 선수는 예의 그 가볍고 예리한 점프로 신성이 재현되는 순간을 선사했다. 나는 그가 은퇴한 지금도 전설이라 불리는 안무를 종종 돌려 보면서 완벽한 아름다움의 존재를 확인하곤 한다.

스포츠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남성 영웅에 뒤지지 않는 투지와 용기를 보여준 여성 영웅들이 있다. 물론 포브스가 지난해 10월에 발표한 스포츠 스타의 연봉 순위를 보면 상위 10위까지의 목록이 전원 남성으로 채워져 있긴 하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향력을 선용할 줄 알고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하는 여성 영웅의 존재는 특별하다.

수많은 영웅 중에서도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Billie jean king)은 정의로운 여성 영웅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선수다.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배우 엠마 스톤이 연기한 전기 영화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의 원제이기도 한 '성의 전쟁(Battle of sexes)'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테니스계에 만연한 성차별을 공론화하고 차별에 맞서 싸우며 변화를 끌어낸, 최초의 여성이다.

"여성들은 절대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빌리 진 킹: 세기의 대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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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진 킹이 챔피언으로 활약하던 1970년대만 해도 테니스 대회의 상금은 성별에 따른 격차가 매우 컸는데 이는 남성부 경기의 인기가 더 높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거의 모든 프로 스포츠 리그에서 남성부 경기가 여성부 경기에 비해서 '수준이 높다', '박진감이 있다' 등의 허술하고 빈약한 근거를 내세우며 연봉이나 상금을 차별적으로 지급한다. 이러한 처사는 여성 리그의 흥행을 위한 투자를 방해하고 결국 기반 부족으로 인해서 선수 발굴이 어려워지는 등의 악순환을 양산한다.

부당한 제도에 반기를 든 빌리는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과 여자부 대회 보이콧을 선언하고 세계여자테니스협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협찬사를 모으고 새로운 대회를 개최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러던 중에 빌리의 파격적인 행보를 눈여겨 보던 전 윔블던 챔피언 바비 릭스가 빌리에게 성대결을 제안한다. 이것이 자신의 뜻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 빌리가 도전을 받아들이면서 사상 최초의 빅매치가 성사됐다.

결과는 빌리의 압승. 이후에도 빌리는 테니스 메이저 통산 39회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고 프로 선수로서는 최초로 커밍아웃을 한 선수가 되기도 한다. 빌리의 끈질긴 노력은 2007년, 드디어 남녀동일 액수의 상금을 쟁취함으로써 결실을 맺는다.

이로써 테니스는 여러 개의 프로 리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성차별적인 보상 제도를 바꾼 종목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NBA 남자 선수들이 여성 선수들의 100배 가까이 높은 연봉을 받고 남자부 PGA 대회의 상금이 여성부 LPGA 상금에 비해서 5배 높은 것을 보면 이는 대단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최근에 다시 남성 테니스 선수들 가운데서 상금 액수에 차별을 두자는 의견이 있지만 빌리가 이뤄낸 성취의 가치를 아는 후배 선수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자 세계 챔피언인 세리나 윌리엄스는 상금 차별 지급에 대해서 '여성들은 절대 무릎 꿇을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빌리 진 킹은 은퇴 이후에도 환경 운동에 앞장서고 성소수자들의 인권 향상에 힘쓰는 등, 존중받지 못하는 소수를 위해서 꾸준하게 목소리를 냈다.이러한 행보는 그와 얽힌 유명한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빌리는 십대 시절에 테니스복이 없는 아이들이 단체 사진을 찍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 힘없는 사람이 무시당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어야 하고, 그 꿈을 향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 말은 사람들이 잘 듣지 않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에, 저는 최고가 돼야 했습니다."

빌리 진 킹이 최고가 되는 데에는 의지와 노력이 작용했을 터다. 여기에 생애를 걸고 지켜야 할 투철한 신념이 있었기에, 그는 최고에서 영웅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경제개발로 국가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한국의 스포츠계에도 영웅이 필요했다. 국가 대항전에서 우승한 선수는 애국심을 전파하기에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몇몇 선수에겐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운동 영웅의 이미지가 덧씌워지기도 했다.

그렇게 가난한 소녀에서 꿈을 이룬 영웅으로 선전에 이용됐던 대표적인 인물이 임춘애다. 그는 지금도 자신이 라면만 먹고 달린, 극빈한 소녀로 회자되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있지만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구시대적 선전이 시대의 변하면서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 선수들에게는 '악조건을 극복한 비인기 종목 선수'라는 타이틀이 따라 붙는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영화화됐던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 팀이 그랬고 컬링으로 은메달리스트가 된 팀 킴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훈련 기간 내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지만 뛰어난 성적을 거둔 이후에는 극악한 환경을 노력 하나로 극복해낸 영웅으로 부각됐다(관련 기사 : 임춘애 '라면 촌극'과 '양학선 마케팅').

또 김연아 선수가 캐나다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언론과 기업은 '세계 초일류 국가'를 내세우며 홍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이룬 업적의 이면에도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토대를 극복해낸 개인의 피나는 노력과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

여성의 말 들어주지 않는 코트... 김연경이 박수 받는 이유

김연경 선수
 김연경 선수
ⓒ 인스포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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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한국의 스포츠계가 앞서 소개한 빌리 진 킹과 같은 정의로운 영웅을 배출해내는 단계까지 발전했다는 점이다. 변화의 주인공은 김연경 선수다. 그는 최고의 선수로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또 그에 걸맞은 의미 있는 발언을 함으로써 화제가 됐다.

김연경 선수는 최근 여자 선수와 남자 선수의 연봉 격차에 관한 이슈, 이른바 '샐러리캡'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남자 선수 샐러리캡, 여자 선수 샐러리캡의 차이가 너무 난다. 왜 점점 좋아지지 못하고 뒤쳐지고 있을까?' 라는 내용의 트윗을 올린 것이다.

김연경 선수가 지적한 샐러리캡은 팀 연봉 총액의 상한선을 정해두는 제도를 말한다. 문제가 된 사항은 남자 팀의 연봉 총액과 여자 팀 총액이 10억 원 이상 차이가 난다는 것과 여자 선수에 한해서 1인 연봉 최고액이 샐러리캡 총액의 25%를 초과할 수 없다는 단서 조항까지 추가된 것. 이는 빌리 진 킹이 불공평한 제도에 맞서서 투쟁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샐러리 캡을 옹호하는 쪽은 경영상의 효율성과 성별에 따라서 리그 흥행에 기여도에 격차가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최근 V리그 흥행 기여도를 살펴보면, 남자 배구와 여자 배구에 격차가 거의 없으며 오히려 여자배구가 TV 시청률과 관중수가 크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여자 배구 선수단을 소유한 모기업은 홍보 효과까지 누렸다. 어쩌면 협회와 구단은 여자부 선수들의 인기를 연봉에 반영할 의지가 없는 게 아닐까? (관련 기사 : 시청률·관중 최고... 여자배구, '위대한 시즌'이었다)

여전히 샐러리캡이 젠더 문제냐, 아니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최초로 문제 제기를 한 김연경 선수의 용기에 주목한다. 한 개인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지만 최고가 된 개인이 신념에 따라서 유의미한 발언을 하고 한쪽 입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빌리 진 킹의 명언대로 세상은 여성의 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며 심지어 여성이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만으로 말하는 여성을 미워하기도 한다. 최근 아이돌 가수 손나은이나 아이린이 황당한 고초를 겪은 것처럼, 영향력이 큰 여성일수록 젠더 이슈를 언급했을 때 거센 반발에 휘말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김연경 선수가 용기 있는 발언을 한 것은, 후배 선수들과 여성 선수들의 처우가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지금보다 더 확산돼서 국내에도 성차별 없는 프로 리그가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그 작은 변화는 세상이 달라졌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변화는 한번에 크게 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이뤄지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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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여성, #스포츠, #페미니즘, #여성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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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는 여자>를 썼습니다. 한겨레ESC '오늘하루운동', 오마이뉴스 '한 솔로', 여성신문 '운동사이' 연재 중입니다. 노는 거 다음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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