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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장수'라는 말을 아시나요?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일과 스트레스로 각종 질병을 안고 살아야 하는 '웃픈' 현실을 뜻합니다.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애환을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침대에 누워있는데 전화가 왔다. 지역에서 책 모임을 함께 하는 언니다.

"지은씨,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었어? 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하면 빠진다 해야지. 머리 아픈 데 여행도 가고 기사는 쓴다던데."

외국으로 나가기 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전화를 한 언니는 나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내며 주변 이야기를 전했다. 자세한 사정을 몰라 잘못된 이야기도 있었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사실이어서 수용했다. 친밀한 관계에 있던 한 사람과 그렇게 멀어졌다.

일일이 해명하고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과 책임을 지기 위한 수고에 쏟을 에너지가 없었다. '아픈 데 조금 기다려 주겠지'라는 건 상대를 배려하지 않은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떡하지'를 고민하며 체면 치레와 인간 도리를 팽개치던 때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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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편두통이 시작되고 나서 뇌파검사, 뇌혈류 검사, MRI검사까지 했다. 이상소견은 없었다. '그래, 괜찮은 거야. 일시적인 거야'라고 생각하면서도 통증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오늘은 살갗이 찌릿하네. 소름 돋는 느낌도 나고. 아니야 둔탁하게 누르는 느낌이 주된 느낌이야. 이건 스트레스 두통이라잖아. 괜찮아, 괜찮을 거야.'

같은 말을 수없이 되뇌면서도 통증이 느껴지면 불안했다. 두통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니 잠을 못 자고 잠을 못 자니 두통이 심해졌다. 한 달 넘게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두통이 복통을 불러오고, 면역력 저하로 축농증까지 겹쳤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신경과 의사에게 호소했다.

신경과 의사는 처음에 심리상담을 받아보고 싶다는 내 말에 "운동하고 잠 푹 자면 된다"고 하더니 결국 "머리는 어떻게 아파도 정상이니까 그 쪽 가서 약을 꾸준히 먹어보라"고 했다. 그쪽 약을 먹는 게 무슨 말인지 생각도 하지 않고 심리상담을 목표로 집 앞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갔다. 마음이 힘드니 판단력도 흐려졌다. 그곳은 한 마디로 '정신과'였다. 불안도가 높아 항우울증제 처방을 받았다. 흐려진 판단이 과감한 결정을 하게 했다.

시집 보낸 딸이 우울증 약을 먹는다고 하니 친정 엄마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는 행거에 옷이 가득한 먼지 많은 방에 짐을 풀었다. 육아가 힘들 땐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쉬고 싶었는데, 혼자 있는 게 힘들어서 엄마를 불렀다. 엄마에게 미안했다.

하고 있던 일, 모임, 인간관계, 집안일과 육아까지 모든 걸 접었다. 머리가 아프니 큰 병에 걸린 것 같고 아이 얼굴을 바라보면 슬픈 생각이 들었다. 검사 결과도 정상이고 논리적으로 걱정할 게 없는 상황이었지만 통증은 이성이 아닌 감각영역이었다. 통증이 느껴지면 불안하고 잡생각이 밀려왔다. 몸을 움직이면 마음이 쉰다는 데 체력이 안 되니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생각을 안 하려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으로 TV를 보다 잠들고 깨면 밥 먹고 병원에 다녀오면 아이가 왔다. 아이랑 좀 놀아주다 재우고 다시 TV를 보는 생활을 했다. 한 달 정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엄마에게 보살핌을 받고 나니 기운을 좀 차렸다. TV를 끄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나서부터 잠을 잘 자게 됐다. 일주일에 4, 5권씩 읽었다.

"머리 아프다면서 책 좀 그만 읽어. 무슨 사법고시 공부하냐!"

친정엄마는 책을 못 보게 했다. 엄마 잔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걸 보니 헤어질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안 그래도 친정엄마가 족저근막염 때문에 힘들어 해서 더 이상 보살핌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책을 보기 시작하고 나서 수면의 질이 좋아지고 두통이 경감되는 선순환 고리가 만들어졌다. 잠자고 있던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책에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문제가 들어 있었다. 일부러 그런 책을 고른 것도 아닌데 책에 답이 있었다.

소설을 읽어도, 사회과학서적이나 인문학 서적을 읽어도 심지어 과학서적을 읽어도 모든 게 깔때기처럼 모아졌다. '사람이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사람을 선택한다'는 말이 맞았다. 책을 읽으면서 진단 내린 내 고통의 병명은 '뒤늦은 산후 우울증'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아이 때문에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갓난쟁이를 데리고 강의를 들으러 갈 수도 없고, 직장은 더욱 불가했다. 아이가 세 살쯤 됐을 때 바깥나들이를 시작했다. 아이와 함께 모임도 가고 강의도 듣고 끊어졌던 인맥이 생겼다. 잠자고 있던 욕구가 꿈틀거렸다.

아이가 42개월이 되던 때 어린이집에 보내고 낮 시간에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 편집자 1명만 있는 작은 신문사에서 인터뷰와 칼럼을 쓰는 기자로 취업했다. 정해진 시간에 얽매여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게 장점이었다.

아이가 하원하는 오후 3시까지 집안일과 인터뷰를 하고, 하원 하면 재우기 전까지 엄마역할을 했다. 기사는 아이가 잠들고 난 뒤 새벽에 썼다. 육아와 가사 사이 짬나는 시간에 일했다. 일 말고 취미도 갖고 싶고 마음 맞는 사람과 교류도 필요해서 독서모임, 글쓰기모임, 그림 그리기도 했다.

출산 후 단절된 경력에 억울해하던 마음이 뒤늦게 분출된 것이다. 모성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아이와 욕망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고 발버둥친 게 체력 고갈의 원인이다. 이젠 과감히 좋은 엄마 코스프레를 벗기로 했다.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내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자고 정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 <엄마의 탄생>, <에코페미니즘>, <타임푸어>라는 책이 도움이 됐다.

체력소진에 대한 원인은 알게 됐고, 이제 보다 근본적인 건강염려증과 불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다. '어릴 때부터 건강에 예민하고, 병을 두려워했는데 왜 그랬을까? 불안하다는 건 무언가를 잃을까봐 두려운 거고 지키고 싶은 게 있는 건데 그게 뭘까? 가족을 지키고 싶고 가족과 유대가 부족한 게 원인일까?'를 생각하다 중요한 건 원인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불안을 없애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불안한 마음도 기쁨, 슬픔, 분노, 질투, 행복처럼 여러 가지 내 감정 중 하나 인데 부정하고 없애거나 안 보려고 하니 다스릴 수 없었다. 불안을 인정하고 직시하면서 예민하고 건강을 염려하는 내 모습을 인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책을 보면서 현재 내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쌓아놓고 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폭발해 두통이 시작된 거란 생각이 들었다. 부정하고 외면하던 나를 찬찬히 들여다 봤다. 있는 그대로 나를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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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힘은 가족을 통해 얻었다. 다 큰 딸을 돌보다 족저근막염에 걸린 엄마, 누워 있는 아내를 위해 주말마다 아이와 시간을 보내 준 남편, 옆에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아이. 책과 사람이 나를 다시 세웠다. 그랬는데, 섬광현상이 나타났다.

'번쩍번쩍 하는 게 보여. 혹시 머리가 잘못 돼서 섬광이 보이는 건 아닐까?'

불안을 바라본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다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잘라졌다. 불안은 놔두고 행동을 민첩하게 했다. 안과에 가니 망막에 문제가 있는 현상이었다. 간단한 레이저 치료를 받고 나아졌다. 요즘은 몸이 움찔움찔하는 증상이 있어 한의원도 가고 신경외과와 신경과도 다녀왔다. 검사 결과는 정상이었고 수면검사만 남았다.

만성 두통에 시달리며 통증으로 인한 불안을 충분히 겪고 나니 예방주사를 맞은 기분이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보다 건강하게 살 수 없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두려워하기 보다 노화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병이나 통증을 비정상으로 보지 않고 받아들이면 된다.

몸의 속도에 마음을 맞추면 된다. 물론 쉽지 않다. 두통을 경험하며 예방주사를 맞았어도 새로운 통증이 나타나면 흔들리고 불안하다. 불안하면 불안한대로 흔들리면서 살려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말처럼 흔들리면서 피어나겠지. 골골골 해 보지 않았다면 흔들리다 꺾였을지도 모르는 데 꽃필 수 있어 다행이다.


태그:#두통, #육아, #산후우울증, #책,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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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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