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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무덤 가운데서도 개석식 고인돌이다. 개석실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과 비슷한데, 받침돌이 없이 묘실을 덮개돌 너럭바위로 얹은 모양이다. 이 개석식 고인돌 무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고인돌' 무덤이다.
▲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 무덤 고인돌 무덤 가운데서도 개석식 고인돌이다. 개석실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과 비슷한데, 받침돌이 없이 묘실을 덮개돌 너럭바위로 얹은 모양이다. 이 개석식 고인돌 무덤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고인돌" 무덤이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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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은 '고인돌' 하면 다들 선사 시대 '무덤'으로 알지만 100년 전만 하더라도 아무도 그게 무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자들은 대개 알 수 없는 옛 유물을 보면 우선 옛 기록부터 뒤져 보는데, 이 고인돌은 중국이나 우리나라 옛 기록 어디에도 '무덤'이라 써 놓은 곳이 없다. 그러니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이런 고인돌이 있는 마을 사람들도 독배기, 바우배기, 마당바우, 떡바우, 고엔돌, 괸돌, 굄돌, 괸바우, 암탉바우, 장기바우, 띠엄바우, 거북바우, 두꺼비바우, 개구리바우, 장군바우, 왕바우, 말바우, 개바우라 한 것으로 보아 '무덤'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큰 돌이 필요하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이 바위를 갖다 썼다. 또 길을 내는 데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치워 버렸다.



이는 고인돌을 옛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무덤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함부로 손대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 고인돌을 무덤으로 보는 마을도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고인돌을 곡식의 양을 헤아릴 때 쓰는 '되'를 닮았다 해서 '되무덤'이라 했고, 또 '가장 높은 것'을 뜻하는 말 '도(都)'를 붙여 '도무덤'이라 했다. 그러니까 아주 옛날 높은 사람을 묻었던 무덤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이도 예부터 그랬다기보다는 고인돌이 무덤이라고 밝혀진 뒤부터 그렇게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곳에는 고인돌 무덤이 500기 남짓 모여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나 북한에 있는 아주 큰 탁자식 고인돌이 당시 그 지역의 ‘부족장 무덤’이라면 전라남?북도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 무덤 떼는 ‘마을 공동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상갑리 매산 마을 고인돌 이곳에는 고인돌 무덤이 500기 남짓 모여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이나 북한에 있는 아주 큰 탁자식 고인돌이 당시 그 지역의 ‘부족장 무덤’이라면 전라남?북도에서 볼 수 있는 고인돌 무덤 떼는 ‘마을 공동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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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멘, 석붕, 지석묘, 괸돌, 고인돌

서양 사람들은 고인돌을 켈트어로 탁자란 뜻인 돌(Dol)과 돌이란 뜻인 멘(Men)을 합쳐 돌멘(Dolmen)이라 한다. 또 영어로는 탁자돌(Table Stone)이라 한다. 중국 사람들은 '돌로 지은 시렁'이라 하여 석붕(石棚 돌석․시렁붕)이라 하고, 일본 사람들은 지석묘(支石墓 지탱할지․돌석․무덤묘)라 한다.


'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침돌로 '괴었다' 해서 '고인돌'이다. 그런데 '괴었으면' '괸돌'이라 해야 하는데, 왜 '고인돌'이라 할까. 그 까닭을 알려면 표준국어사전을 살펴봐야 한다. '고이다'는 크게 세 가지 뜻으로 쓰인다.
 
①웅덩이에 물이 고이다.
②소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쇠막대기로 고여 놓았다.
③접시에 과일을 고이다.
여기서 '웅덩이에 물이 고이다' 할 때 쓰는 '고이다'(①) 말고 무얼 '받치다' 할 때 쓰는 '고이다'(②)에서 '고인돌' 이름이 태어났다. 덮개돌을 받침돌로 '고였다' 해서 '고인돌'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받치다'는 뜻으로 '고이다'보다는 '고이다'의 줄임말 '괴다'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신문만화에 김성환의 〈고바우〉가 있다면 잡지만화에는 〈고인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만화는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7년간 《선데이서울》에 연재한 성인만화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박수동의 〈고인돌〉을 ‘건강한 에로티시즘’이라 평했다. 박수동(1941∼ )은 성인용 〈고인돌〉이 인기를 끌자 곧바로 어린이잡지 《어깨동무》에 〈소년 고인돌〉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인돌의 독특한 먹물선은 성냥개비에 먹물을 찍어 그린 것이다.
▲ 박수동의 《고인돌》(까치, 1978) 표지 “신문만화에 김성환의 〈고바우〉가 있다면 잡지만화에는 〈고인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이 만화는 1974년부터 1991년까지 17년간 《선데이서울》에 연재한 성인만화다.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박수동의 〈고인돌〉을 ‘건강한 에로티시즘’이라 평했다. 박수동(1941∼ )은 성인용 〈고인돌〉이 인기를 끌자 곧바로 어린이잡지 《어깨동무》에 〈소년 고인돌〉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인돌의 독특한 먹물선은 성냥개비에 먹물을 찍어 그린 것이다.
ⓒ 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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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수와 선사 시대 무덤 이름 '고인돌'

'고인돌' 이름을 논문에 맨 처음 쓴 사람은 한흥수(韓興洙, 1909∼?)다. 한흥수는 일제강점기 때 유럽에 건너가 고고학을 전공한 우리나라 1세대 고고학자다. 그는 도유호(都宥浩, 1905∼1982), 손진태(孫晋泰, 1900~?)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인돌을 연구한 학자다. 손진태는 민속학자이고, 한흥수와 도유호는 유럽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전문 학자인데, 두 사람은 해방 뒤 월북해 북한 고고학을 이끈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흥수는 1935년 〈조선의 거석문화 연구〉 논문에서 우리나라 거석문화를 선돌, 고인돌, 칠성바위, 독무덤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그가 왜 돌무덤을 고인돌이라 했는지는 논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그 뒤 학자들은 고인돌이란 이름을 자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학자들은 여전히 일본 학자들이 쓰는 지석묘(支石墓) 이름을 더 많이 썼다. 그러다 1984년 한국고고학연구소가 낸 <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에서 '지석묘'를 '고인돌'로 하자고 해 지금은 이 이름을 두루 쓰고 있다. 유물 이름을 정할 때는 그 유물의 성격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사실 '고인돌'은 그 유물이 '무덤'이라는 것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이름은 한번 들으면 웬만해서는 잊히지 않는 이름이란 점에서 아주 좋은 유물 이름이 아닌가 싶다.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세계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고인돌이다. 280톤쯤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
▲ 핑매바위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세계에 있는 고인돌 가운데 가장 크고 무거운 고인돌이다. 280톤쯤 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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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

영국의 스톤헨지나 태평양 동쪽 끝 이스터 섬 모아이처럼 큰 돌로 지은 모든 것을 통틀어 '거석(巨石) 유물'이라 한다. 고인돌 또한 '큰 돌 유물'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유물 조사가 잘 되어 있는 유럽의 거석 유물이 5만 5천 기(基) 남짓 되는데, 그 가운데 고인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돌무덤이 많다고 하는 아일랜드에 1500기, 러시아 코카서스 지역에 2400기밖에 없다. 그런데 한반도에는 4만(북한에 1만 5천) 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있다.



이 가운데 전남 지방에만 2만 기가 있다. 물론 아일랜드나 러시아 말고 다른 나라에도 고인돌은 있다. 중국 요령 지방에 316기, 일본 큐슈 지방에 600기, 인도네시아에 600기쯤 있지만 한반도에 견주면 그 수가 아주 적다. 더구나 한반도처럼 작은 면적에 수많은 고인돌이 한곳에 몰려 있는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또 그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세계 고고학자들은 우리나라를 '고인돌의 나라'라 한다. 바로 이 때문에 세계 유네스코 세계유산 위원회는 2000년 12월 2일, 전남 화순․전북 고창․인천 강화 지역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 제977호로 정한 것이다.

 
옛 사람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바윗돌을 한번 옮겨 봤다. 보통 어른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를 50킬로그램이라 한다면, 10톤 정도 되는 바위를 끄려면 적어도 200명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통나무를 깔고 옮기면 그냥 땅바닥에 놓고 당길 때보다 힘이 훨씬 덜 든다. 그래서 한 100명 남짓이면 끌 수 있다. 하지만 재현 행사를 지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끌어도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고, 또 옮긴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다. 평평한 길도 이렇게 힘든데 오르막길에서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고인돌 잔치 모습 옛 사람들이 했던 방식 그대로 바윗돌을 한번 옮겨 봤다. 보통 어른 한 사람이 들 수 있는 무게를 50킬로그램이라 한다면, 10톤 정도 되는 바위를 끄려면 적어도 200명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통나무를 깔고 옮기면 그냥 땅바닥에 놓고 당길 때보다 힘이 훨씬 덜 든다. 그래서 한 100명 남짓이면 끌 수 있다. 하지만 재현 행사를 지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어 끌어도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고, 또 옮긴 거리도 얼마 되지 않는다. 평평한 길도 이렇게 힘든데 오르막길에서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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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은 선사 시대 무덤 가운데 하나

선사 시대 무덤으로는 고인돌, 돌널무덤, 돌돌림무덤, 널무덤, 독무덤, 옹관묘처럼 갖가지 무덤이 있다. 고인돌은 그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언제부터 썼을까.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보통 지금으로부터 한 3000년 전에 아주 유행했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물론 고인돌을 무덤으로 보지 않고 제단이나 묘지를 상징하는 기념물로 보기도 한다.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에서 시작되어 세계 여러 나라로 퍼졌다는 '자생설', 벼농사를 많이 짓는 동남아시아에서 바닷길을 타고 중국 동북 바닷가 지방과 우리나라로 전파되었다는 '남방 기원설', 한반도 북쪽 시베리아 카라수크 돌널무덤이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 고인돌 무덤을 쓰기 시작했다는 '북방 기원설', 이렇게 세 의견이 있다. 학자들은 이 가운데서 북방 기원설을 많이 따르고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바위에 결이 나 있다. 이곳에 구멍을 내고 대추나무를 박은 뒤 물을 부어 적시면 대추나무가 불어 바윗돌이 쩍 갈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채석장 모습이 마치 갓을 쓰고 있는 사람 같다 해서 ‘감태바위’라 한다.
▲ 고인돌 채석장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바위에 결이 나 있다. 이곳에 구멍을 내고 대추나무를 박은 뒤 물을 부어 적시면 대추나무가 불어 바윗돌이 쩍 갈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채석장 모습이 마치 갓을 쓰고 있는 사람 같다 해서 ‘감태바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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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화순고인돌문화축제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대신리 지동마을에서 도곡면 효산리 성곡마을을 가려면 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골짜기를 따라 길이 구불구불 나 있는데, 길 양옆으로 수많은 고인돌이 자리 잡고 있다. 화순군은 해마다 4월 말이면 이곳에서 고인돌 잔치를 벌인다. 올해는 4월 21일에서 22일까지다.
때 : 2018년 4월 21일∼22일
곳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더 알아보려면 : 화순군청 홈페이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고인돌, #화순고인들, #고인돌이름의유래,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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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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