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이야기: 남미 상사병을 오랜 세월 앓던 기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그 대륙에 두 발로 딛고 선다. 그리고 대망의 첫번째 행선지는 남아메리카의 허리 격인 칠레의 산티아고. 현지인 친구 다니의 가족으로부터 받은 초대도 염치없이 넙죽 받았겠다, 적어도 여행 초반은 순탄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 동안의 범죄 발생률 증가로 시내 관광을 미루게된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기자 본인 포함 세 여자는 홧김에 외곽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나서는데...)

2리터 물병 2개, 체크.
주전부리, 체크.
휴대폰 & 카메라 배터리, 체크.
긴팔 겉옷, 체크.
튼튼한 운동화, 체크.
차 기름 가득... 아직.

모든 총알들이 거의 다 채워졌다(차 기름은 가면서 넣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신속하게 전투기에 오르는 일 뿐이다. 다니 대원은 운전석에, 크리스 대원(본인)은 조수석에 그리고 막내 카타 대원은 뒷자석에 착석을 완료했다.

갑자기 생뚱맞게 무슨 군대 버전이냐 묻는다면 뭐 딱히 할말은 없다. 단지 우리가 그 정도로 비장했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이기 때문이다. 이말은 곧 칠레인들의 민족의 대명절이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뜻이다. 700만 산티아고의 인구가 민족의 대이동을 하는 이 시즌 중에서도 피크인 그날이라는 말씀이다. 이 정도 숫자면 서울 인구에 버금가는 수준이니 상상해보라. 오늘 같은 날 차 막히는 수준도 당연히 우리 설 연휴 첫째날에 버금가리라.

칠레는 국토가 양옆으로 좁고 위아래로 길쭉하기만 하다. 처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 타이틀이 오늘같은 날의 교통 체증에는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생각해본다. 차안에 앉아있는 내 입에서 끙, 하는 소리가 절로 난다.

얼마뒤, 아니나다를까 도로 교통은 벌써부터 마비될 조짐이 보인다. 동네를 갓 벗어나자마자 생긴 일이다. 점점 올라오는 해에 눈이 멀고 운전자들이 사정없이 울려대는 클랙슨 소리에 귀가 멀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덮친다. 차안에 우울한 기운이 감돌자 막내 카타가 루이스 폰시의 노래를 재빨리 켜둔다. 우리 모두가 팬인 그의 <Ichame la culpa(나를 탓해)>가 차속을 가득 메웠고 우리는 어느정도 바깥의 소음으로부터 해방된 듯 싶었다.

그때였다. 신나는 댄스곡에 탄력를 받은 다니는 기회가 닿는 족족 길을 뚫었고 마침내 우리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오늘의 목적지 '카혼 데 마이포(Cajon Del Maipo)' 지역으로 들어섰다. 칠레 사람 모두 이 근방엔 방문할 가족이 별로 없는지 올라가는 길 내내 탄탄대로였다. 주옥같은 라티노들의 레게톤 명반 수십장을 듣고 나니 다니는 차를 멈추고 시동을 끈다. 일 예소댐(Embalse El Yeso)에 도착한 것이다. 차는 어서 내리라고 우리를 재촉하듯 몸체를 부르르 떨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밖으로 튕겨나왔다.

"¡Vamos chicas!"
(가자, 애들아!)

다니의 씩씩한 외침이 텅빈 산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이어 내게 무어라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웅웅댈뿐 들리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두 손은 입을 가리고 있다.

카혼 데 마이포(이하 마이포 협곡)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지인들이 '힐링' 을 위해 자주 찾는 인기 당일치기 여행지이다. 근교에 와이너리, 온천, 맛집 등이 위치해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미식 여행도 가능하다.
▲ 카혼 데 마이포(Cajon de Maipo)의 예소 댐에서(Embalse el Yeso)에 카혼 데 마이포(이하 마이포 협곡)은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에서 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현지인들이 '힐링' 을 위해 자주 찾는 인기 당일치기 여행지이다. 근교에 와이너리, 온천, 맛집 등이 위치해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 미식 여행도 가능하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눈부신 풍광, 이런 거구나


차에서 한참 전부터 봐온 풍경이다. 장관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풀 스크린'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니 차원이 다르다. 와- 라고 탄성을 내지르고 싶지만 목구멍 어딘가에서 꽉 막혀버린 듯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윈도우 기본 바탕화면이 보인다. 아니, 그 정도로 비현실적인 자연 풍광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눈이 시릴 듯 푸른 강가, 주변을 온통 에워싼 돌산맥,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그 꼭대기에 팥빙수의 연유처럼 살포시 엊어진 눈자락까지.

다니가 멍하니 있던 내 팔을 툭 치며 말을 건다.

"어때?"

"최고야. 한 번도, 단 한 번도 이런걸 본적이 없어."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이 시원스런 장관은 봐도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차에 올라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이 산에 우리뿐인줄말 알았더니 대가족인지 한무리의 관광객인지 탁자까지 펴놓고 탁 트인 풍경과 와인을 같이 즐기고 있다. 고도가 높아서 평소보다 빨리 취기가 오르는 탓에 몇몇은 벌써 얼굴이 벌겋다. 그나저나 신이 공들여 창조했을 이 경치와 신의 물방울을 같이 즐기는 기분을 도대체 어떨까. 갑자기 궁금하기도하고 저들이 부럽기도 하다.

단체 관광객들은 테이블을 펴 와인과 핑거푸드를 즐겼다.
▲ 협곡의 경치와 와인 한 잔을 같이 즐기는 사람들 단체 관광객들은 테이블을 펴 와인과 핑거푸드를 즐겼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큰 밴을 타고 온 단체 관광객들과 우리 덕에 조용했던 산이 조금은 시끌벅적해졌다.
▲ 대가족일까? 단체 관광객들일까? 큰 밴을 타고 온 단체 관광객들과 우리 덕에 조용했던 산이 조금은 시끌벅적해졌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이 산의 어디로 가든 옥색 물빛은 산맥을 모두 끼고 돌았다. 이 강은 실은 댐의 일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티아고 시민들이 쓰는 식수 대부분이 여기서 나오는 셈이다. 경치 구경을 실컷한 우리는 남는건 사진뿐이라며 바쁘게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뒤에는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지질학 전공인 다니는 특이한 돌멩이 관찰에 나섰고 나는 풍경 사진 촬영에 심혈을 기울였다. 막내 카타는 물가의 바위에 쪼그려 앉아 물장난에 여념이 없다.

나도 내 친구도 내 친구의 동생도 모두 여행에서 '인생샷 남기기'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한 '금손'이 되어 '인생샷'을 남기려 애썻다.
▲ 남는 건 사진뿐 나도 내 친구도 내 친구의 동생도 모두 여행에서 '인생샷 남기기'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한 '금손'이 되어 '인생샷'을 남기려 애썻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배경이 제 역할을 다 하는지라 어떤 포즈로 시도해도 사진이 잘 나온다.
▲ 주위를 온통 둘러싼 카혼 데 마이포의 돌산을 뒤로한 점프샷 배경이 제 역할을 다 하는지라 어떤 포즈로 시도해도 사진이 잘 나온다.
ⓒ 송승희

관련사진보기


고도가 높아서 그런지 바람이 금방 차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우린 모두 가져온 긴팔 옷을 껴입었다. 이번엔 막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카타는 영어가 거의 안되고 내 스페인어는 형편없다. 그렇지만 신호가 걸릴때마다 같이 찍은 우스운 포즈의 사진들을 보며 깔깔거렸다. 다니는 아침에 운전하느라 지쳐서 뒷자석에 쓰러져있다. 나는 곤히 자는 보며 나지막히 속삭였다.

"그라씨아스 치카(Gracias Chica), 내 생애 최고로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

창밖에서는 어느새 노을이 깔렸고 오는 길에 들었던루이스 폰시의 노래 전주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노래를 조용히 따라부르는 내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한여름의 크리스마스 이브날. 산티아고에서 유일하게 추운 곳에서.


태그:#여행, #남미, #칠레, #당일치기, #여행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