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레어의 카메라>(2016) 포스터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2016) 포스터 ⓒ (주)영화제작전원사


그 '일'이 있은 후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는 '가십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감독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묵묵히 자기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극장에 걸었다. 그 중 하나가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다. '가십'으로 자신을 재단했던 세상에 대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아니, 그 '일'을 다루는 세상 사람들의 '말'과 '태도'에 대해.

물론 이번에도 영화의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사랑인지 바람인지 모를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로 인해 주변 관계들도 복잡해졌다. 더구나 한국도 아닌 영화를 홍보하러 간 프랑스 칸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잘린 전만희?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무브먼트MOVem


영화제로 북적이는 칸,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한적하다. 그곳 카페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전만희(김민희 분). 다가온 지인은 바쁜 영화제 기간 중 영화사 직원으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의아해한다. 전만희는 그런 지인에게 자신이 어제 그 자리에서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에게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홀로 남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해고'를 복기한다. 전날 그 카페의 그 자리에 마주 앉은 남양혜와 전만희. 남양혜는 자신이 만희를 고용한 이유에 대해 말을 꺼낸다. 남대표는 "솔직하고 진솔한 그녀의 면모 때문이었다고 운을 띄웠다. 그러나 언제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알 수 있듯, 그녀를 고용했던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희를 해고하는 이유로 돌변한다. 남대표는 "알고보니 솔직하지 않다"는 밑도 끝도 없는 '평가'로 단칼에 만희를 해고한다. 전만희는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솔직하지 않다'는 평가를 이해할 수 없다. 만희는 그간 함께했던 정으로 남 대표와 사진까지 찍고 헤어졌지만, 해고는 고스란히 그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해고의 진짜 이유는 다음 장면에야 나온다. 남 대표와 소완수(정진영 분) 감독의 만남을 통해서다. 단번에 일자리에서 잘려야 했던 만희는 알고 보니 소완수 감독과 '스캔들'이 있었다.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하지만, 결국 남양혜와의 사업 이상의 밀월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의 태도로 보건대 그와 만희의 관계는 하루밤의 실수 이상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동안 흔히 홍상수의 영화에 늘 등장했던 남녀 관계와 그 속내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소완수는 예의 홍상수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한다. 남양혜와 사업 파트너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녀의 부하 직원인 젊은 만희와 스캔들을 벌일 정도로 '지질한 남자'다. 심지어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 클레어에게도 수작인지 관심인지 모를 추파를 던지는 소완수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트레이드 마크를 답습한다.

남양혜-소완수의 '언어 폭력'

그런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홍상수 감독은 늘상 그가 해왔던 이야기를 조금 비튼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와 여자의 대화들은 '사랑하고 싶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고 싶다'의 장황하고 구차한 은유였다. 그런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그 노골적인 추파는 생략됐다. 대신 다른 은유들이 난무한다.

첫 번째는 바로 전만희와 남양혜 사이의 대화다. 이후 장면에서 보면, 남양혜는 소완수와 전만희의 관계를 눈치채고 곧바로 전만희를 해고한다. 결국 '사적'인 스캔들로 전만희의 밥줄을 자르는 횡포를 부린 것이다. 물론 남양혜 입장에서 전만희가 곱게 보일리 없다. 그러나 그간 자신의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전만희를 하루 아침에 해고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과정에서 가장 추상적인 "솔직하지 못하다"는 남양혜의 '언어 폭력'에 주목한다.

'사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하는 공정하지 못한 방식,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속보이는 이유를 포장하는 추상적이고도 도덕적인 평가의 언어들. 이는 그간 우리 사회가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대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남양혜는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 감독에게 은근 슬쩍 자신이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갑'이라는 사실을 흘린다. 사적인 관계를 정리해도 사업은 잘 해보자는 감독의 말에 "글쎄"라며 여지를 남긴다. 그런 남양혜의 태도에, 소완수는 "관계 정리하자"던 제안을 "예쁘다"는 말로 얼버무린다. 소완수에게 남양혜는 자신을 "예전처럼 예뻐해 달라"며 여전한 밀월 관계의 지속을 요구한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 속 남녀 관계는 그간 '지질한 속물 남자와 여자'라는 본능적인 관계에서, '갑을' 권력 관계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이후 우연히 건물 옥상에서 만난 소완수와 만희의 관계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관련 모임이 열리는 건물 옥상, 아직 칸을 떠나지 못한 만희는 핫팬츠를 입은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소완수는 영화 홍보를 하다 등장한다. 그는 만희의 옷차림에 대해 "왜 이렇게 헐하게 보이려고 하냐"고 지적한다.

이는 결국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쉬운 여자론'의 연장일 뿐이다. 아직도 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한 소완수의 지질한 감정의 배설로도 보인다. 그러나 그 배설은 감독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만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이는 '언어'의 외피를 지닌 '감정의 폭력'이다.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 영화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무브먼트MOVem


<클레어의 카메라>는 여전히 '남녀 관계'를 그리면서도 '권력 관계'로 뒤바뀌는 지점을 보여준다. 영화사 대표와 직원, 영화사 대표와 감독, 나이 든 감독과 젊은 홍보사 직원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맞물렸을 때 남녀 관계에는 '위계 질서'가 들어가게 된다. 홍상수 감독은 이때 그들 사이의 언어조차 권위적인 억압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이전의 홍상수 감독이 다루었던 언어가 개인적인 '파롤(parole)'에 치중해 있었다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언어들은 사회적인 '랑그(langue)'에 집중한다. 소완수가 클레어의 언어에 무조건적인 감탄과 찬사를 더하며 접근하는 그 '방식'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게 달라진 관계 사이에서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건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분)다. 그녀는 마치 카메라를 든 철학자처럼, 사진 한 장의 '마법'을 설파한다. 그녀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지 못했다'던 만희는 '아름다운 여인', 칸에 초청받는 명감독이라던 소완수는 '알콜 중독'이 의심되는 칠칠맞은 남자, 도도한 남양혜는 '이상하고 우스운 여성'이라는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겐 '깨달음'을 준다. 어쩌면 '세상의 말'에 현혹되었던 관객에게도.

<클레어의 카메라>를 여전한 홍상수의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으로 볼지, 그게 아니면 세상에 던진 감독의 일갈로 볼지, 그도 아니면 여전한 해프닝으로 볼지. 여기에 대한 답은 <클레어의 카메라> 속 스냅 사진 한 장에 담겨 있다.

적어도 필자에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만한 가치를 준 작품이다. 오랫동안 하나의 화두에 천착하던 감독이 본의 아니게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딘 작품처럼 여겨졌다. 과연 다음엔 그가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궁금하다. 여기에 덧붙여, 배우 장미희를 다시 발견하게 해 준 홍상수 감독에 감사하다. 그의 다음 뮤즈도 궁금해 진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클레어의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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