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작품 포스터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작품 포스터 ⓒ 전원사


<클레어의 카메라>가 어떤 영화냐고 묻는다면 딱 잘라서 답하기 어렵다. 홍상수 감독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 아니다. 그의 것이라고 보기에 인물의 행동이 무척 명확해 보이므로 오히려 '무언가를 더 숨겨두지는 않았을지' 되묻게 된다. 하지만 감독의 전작품들을 떠올려 볼 때, 그런 되물음이 더욱 의문을 키우는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은 먼 길을 돌아가지 않고 명확한 의미를 짚어보려 한다.

영화에서 두 가지 키워드를 뽑아보자면 클레어, 그리고 카메라다. 이 작품이 '칸 영화제 기간에 벌어진 남녀 간의 문제'를 다루는 걸 고려해보면 방점은 카메라에 찍어야 할 것 같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김민희-홍상수 떠올리게 하는 만희-소완수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 전원사


<클레어의 카메라>에는 세계적인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한다. 그녀는 칸 영화제에 놀러 온 여인 클레어 역을 맡았다. 클레어는 손에 들린 카메라로 낯선 사람들을 촬영하고 다니며 "사진에 찍힌 모습으로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 영화가 사진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설정은 매우 고지식하거나 혹은 매우 원론적인 것일 테다.

이자벨 위페르는 그 유명세만큼 어디서든 항상 카메라 세례를 받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그녀와 카메라의 관계가 정반대다. 이자벨 위페르는 사진 찍히는 사람이 아니고 '찍는 사람'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자벨 위페르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딘가 모르게 실소를 품을 법한 장면들이 몇몇 있다. 현실에서는 같이 사진 한 장 찍기도 힘든데 영화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먼저 부탁한다. 우리는 어떠한 공통점을 떠올려볼 수 있다. 바로 '현실과 영화 간의 괴리'다. 앞서 이자벨 위페르의 경우처럼 또 다른 괴리감이 이 영화에 있다.

이 영화에는 김민희와 홍상수의 관계에 대한 '셀프 디스'처럼 보이는 면이 분명 있다.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 분)와 누추한 옷차림의 유명 감독 소완수(정진영 분)의 관계가 그러하다. 술에 취해 거사를 치르고 만 두 사람. 소완수의 연인이자 영화사 대표인 양혜(장미희 분)는 칸 현지에서 "정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만희를 해고한다.

그런데 만희와 소완수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과 발음상의 유사성을 띤다는 것, 소완수 감독이 영화사에 관여한다는 점이나, 하룻밤의 실수로 해고 당해 억울함을 토로하는 만희의 모습,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 떼는 소완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된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되돌려서, 이러한 관계 역전은 이 영화의 흥미로운 포인트다. 이자벨 위페르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클레어'는 클레어로만 보인다. 반대로, 김민희를 잘 모르는 외국인에게 '만희'는 만희로만 보일 것이다. 즉,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마치 '착시 그림'처럼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이 영화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시선, 사건에 대한 순간포착이라는 점에서 카메라의 본질과 무척 닮아 있다. 카메라는 흘러가는 시간을 프레임 안에 가두어 놓는다는 점에서 '외부적 요인을 내부로 끌어오는' 장치다. 이 영화에서 클레어는 "사진은 우리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에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매 순간 조금씩 변하기에 사진처럼 정지된 순간이 아니고서야 객관적인 평가가 불가능하다. 이게 카메라의 역할이다.

엇갈리는 세 사람, 마주칠 수도 있었지만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 전원사


그렇다면 이제 다른 키워드인 '클레어'를 언급할 차례다.

이전까지 홍상수는 현재라는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비슷한 사건, 비슷한 장소, 비슷한 인물을 영화적 편집으로 이리저리 뒤섞어 보여주고는 했다. 이른바 '일상성'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홍상수 영화가 '거기서 거기'로 느껴지게 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홍상수는 구조를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햄버거를 만들 때 토마토와 상추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 오묘한 느낌의 변화를 주었다는 뜻이다.

이 영화에서 클레어는 만희, 소완수 두 사람을 모두 마주하는데, 정작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이는 법은 없다. 클레어는 소완수를 만나 사진을 찍고, 만희를 만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양쪽 사람은 클레어가 보여주는 사진 사이에서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찍혔을지 모를 사진은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머물렀던 장소다. 그 말인즉슨, 어쩌면 클레어가 만희/소완수의 사진을 찍던 그때 근처 어딘가에서 서로를 마주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잠깐의 오차로 미래 혹은 과거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지금', 이 장소의 추억이 클레어의 사진 속에 담겨있다. 홍상수가 여러 영화를 통해 줄곧 말해왔던 사실, 과거나 미래보다 지금 당장이 중요하다는 신념이 이 영화에도 역시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늘 그렇듯이 이 영화에서도 앞뒤 맥락이 맞지 않음을 느끼고, 홍상수 영화에서 느껴지는 저열함 혹은 지질함은 바로 그러한 부분에서 느껴지곤 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를 그리워하거나 혹은 부정하며 현재에 집착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구조보단 '클레어'라는 인물을 통해 느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 영화에서 클레어는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며, 그 탓에 오히려 사진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것을 보기에 오히려 더욱 헛갈리는 탓이다. 그런 맥락에서 클레어는 아주 이상한 인물이다.

영화상에서는 '영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진 몇 장이 나온다. 보통 영화라면 그 사진이 언제 어디서 찍혔는지 간접적으로라도 설명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클레어는 "언제 어디서 찍었느냐"는 소완수/만희의 질문에 "그냥, 지금" 찍었다고 답한다. 정체불명의 그 사진들은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시간대에 찍혔다. 그래서 클레어는 단지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것에만 불과하지 않고 시간조차 넘나드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클레어의 진정한 능력은 '미래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와 과거를 카메라로 기록하는 것'일 테다. 홍상수는 클레어의 입을 빌려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명확하게 짚어낸다.

이제 클레어, 카메라에서 도출한 두 가지 담화를 한 자리에 엮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정지된 순간에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둘째,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의 굳센 의지 표명?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영화 <클레어의 카메라>의 한 장면 ⓒ 전원사


이 영화에서 서로의 사진을 마주한 두 사람, 만희와 양혜는 클레어를 통해 점진적으로 오해를 풀어나간다. 시도 때도 없이, 우연에 기대어 등장하는 클레어는 사진을 통해 서로의 심정을 전해주는 듯 보인다. 클레어는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있으니 아마 의도된 만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만큼은 당연히 의도된 사항이 아니다.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그저 프레임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진의 주요 목적인 '보존성'이 지켜진다. 그리고 보존된 순간 안에서 그들은 각자의 현재를 찾아낸다.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잡는다. 

사람은 날때부터 정직해야 한다며 '성선설'을 강하게 주장하던 양혜는 만희의 사진을 보며 그나마 이성을 되찾은 듯 보인다. '정직해야' 한다면서 정작 '정직하지' 못하게 만희를 잘라버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양혜와 소완수는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연인 사이도 아니어서, 양희가 만희를 비난할 정당성은 없다. '썸'을 망친 게 죄라면 죄. 못해도 약간의 윤리적 의심을 보낼 수 있는 양혜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를 애처로움마저 느껴진다.

홍상수는 이 영화에서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카메라만이 정직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배경과 실제 촬영 기간이 칸 영화제라는 짧고 단촐한 예술인의 파티임을 감안해 볼 때, 어쩌면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멀고 험한 길에 대한 굳센 의지 표명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시작은 '정직하지 못해 자른다'고 말하는 양혜의 모습이고, 영화의 마지막은 '잘 이야기해 보자'는 양혜의 모습이다. 그 사이의 러닝타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카메라가 알고 있을 것이다. 전체 시간 69분 중에서 약 9분 정도를 뺀 60분 동안의 변화, 카메라다.

영화 홍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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