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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태어난 때부터 사랑하는 조국은 둘이었네
슬픈 역사가 이 땅을 갈라도 마음은 서로 찾았네 불렀네
볼을 비빌까 껴안을까 꿈결에 설레만 가는 우리
처음 보아도 낯익은 얼굴아 가슴에 맺힌 이 아픔 다 녹이자

2. 어린 품속에 그려본 사랑하는 조국은 하나였네
오랜 세월에 목이 다 말라도 마음은 서로 눈물로 적셨네
볼을 비빌까 껴안을까 반가와 이야기 나눈 우리
처음 보아도 낯익은 얼굴아 이 땅에 스민 이 눈물 다 말리자

* 하나로 되자 하나로 되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전할까
이 노래를 이 춤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재일조선인 윤영란씨의 노래 '하나'라는 곡의 가사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조국 통일에 대한 애절한 마음에 품고 일본에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이 85만여 명 정도 있다고 한다. 대부분 남북이 갈리기 전 조선 땅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들과 그 후손들이다. 이중 한국국적을 취득한 이들이 40만여 명, 일본으로 귀화한 이들이 40만여 명, 조선적(해방 전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계신 분들이 3만여 명 정도 남아 있다.

삼일학림에서는 지난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 님을 모시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에 대해 듣고,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 삼일학림 모셔배움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 삼일학림에서는 지난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 님을 모시고,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에 대해 듣고, 배우는 시간을 보냈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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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일본에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있기에 이렇게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2018년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님이 홍천 밝은누리움터 학생들에게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김박미님은 친구 할아버지 이야기로 말문을 여셨다. 아래는 두 분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했다.

재일조선인 1세, 일본에 끌려가 고된 삶을 살아가다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님께서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흩어진 700만 재외동포들과 새 역사를 써갈 통일 조국의 1세로 준비해 주길 바라셨다.
▲ 삼일학림 모셔배움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님께서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가 흩어진 700만 재외동포들과 새 역사를 써갈 통일 조국의 1세로 준비해 주길 바라셨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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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여러 가지 이유로 탄광이나 터널을 파는 힘든 일을 할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조선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 왔다.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도 못 드리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트럭에 탔다가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탄광에 오게 된 이들이 적지 않다. 남편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내와 자녀들이 먼 이국 땅까지 따라온 경우도 있다.

이들은 새벽 4시 반 부터 밤늦게까지 짐슴처럼 일해야 했고, 식사라고는 물 속에 콩이 몇 개 있고, 조금 좋을 때는 단무지가 있었다고 한다. 도망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잡혀 갖가지 고문과 죽임을 당했다. 그야말로 노예였다. 이렇게 인간취급도 못 받으면서, 재일조선인 1세들은 나라가 없는 서러움을 뼈져리게 느꼈다.

이들은 해방 이후에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45년 8월 24일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항구로 모여들었고, 조선으로 가는 일본 군함대에 오른 이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배가 항구를 떠나고 300미터 앞에서 폭파해 버린 것이다. 3700여명의 조선 사람이 탔던 배가 한 순간에 침몰한 것이다. 이 사건이 제대로 진상규명은 되지 않았으나, 폭파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일본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조선인들에게는 큰 두려움이 되어버렸다.

그때부터 조국에서 귀국선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쳐야 겠다 생각하고, 강습소부터 시작했다. 조선연합회를 만들었고 활동했으나, 이 마저도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조선인들은 차별과 핍박을 계속해서 받았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1948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둘로 나누어지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일조선인들은 더욱더 조국으로 갈 수 없게 된다.

해방 이후의 재일조선인들의 힘겨운 삶

일본에서의 조선인들의 삶은 해방 된 이후에도 어려웠다. 그러던 중 1959년 '북'에서 귀국선이 오게 된다. 자기 고향은 '남쪽'이지만, 핍박받고 멸시받는 일본 땅에서 이제 살기가 싫다며, 지긋지긋하다 해서 '북'으로 귀국하게 되는 이들이 배에 올랐다. 하지만 '북'으로 가서도 삶이 이렇다 할 만큼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재일조선인들은 다시 일본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재일조선인 중에는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경제, 교육, 문화, 복지, 생활 속에서 이뤄지는 '차별'은 재일조선인들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한류 붐이 불면서 한국인임을 밝히는 것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그땐 그렇게 어려웠다.

일본에 남아 살길을 모색하고, 자녀들을 위해 학교도 만들었다. 재일조선인들은 우리 말과 글, 우리의 얼을 배울 학교를 스스로 세웠다. 이 때 '북'에서는 원조금, 교과서, 예술분야, 교육분야에서 많은 지원이 온다.

사실 일본으로 끌려온 이들의 98%가 남한 지역 사람들이었다. 경상도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엔 제주도, 전라도, 충청도 등의 순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에서는 재일조선인들에게 무관심했고, 오히려 '북'에서 재일조선인들을 자기 국민으로 받아준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학교를 '조선학교' 또는 '우리학교'(이하 우리학교)라 부른다. 1세대 2세대들은 '남'쪽에서 지원이 없어서 서운한 심정을 가지게 된 것은 있지만, 우리학교를 '북한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 된 조국의 학교로 생각했다.

'우리학교'에서 배우는 것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일본에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있기에 이렇게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2018년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님이 홍천 밝은누리움터 학생들에게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 삼일학림 모셔배움 '재일조선인의 삶과 역사 그리고 학교'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일본에 살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우고 있기에 이렇게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2018년 5월 28일 재일조선인 3세 김박미, 김행대님이 홍천 밝은누리움터 학생들에게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 고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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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생인 김박미 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쓰는 '우리학교'에 다녔다. 일본에서 생활하며 '김'이라는 성을 쓰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학교를 가면 '김'이란 성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모두가 우리 이름으로 쓰고, '가.갸.거.겨.고.교.구.규....' 한글을 배웠다.

초급부(초등학교) 2학년 때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선생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동무들! 이제 우리는 통일이 됩니다!'하며 말씀하셨던 기억을 들려주셨다. 그런 정서와 정신을 배우고 우리말 우리글을 쓰고, 저고리를 입고 다니며 우리의 얼을 지켜가려 노력했다.

우리학교에서 배운 중요한 가치는 '조국'이었고, 왜 배우냐? 라고 했을 때, '통일 조국의 역군으로 준비 되야한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남'도 '북'도 우리 조국으로 배웠다.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받고 살고 있지만, '우리학교'를 통해 이들은 긍지를 가질 수 있었다.

현재' 우리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보편적 교육복지차원에서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부모들이 50만엔 가량 되는 학비를 매월 내야 할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몇 개월째 생활비를 받지 못하고 있는 열악한 상황이라고 한다.

일본은 모든 외국인 학교에 대해 고교무상화 정책을 펼치고 있지만, '우리학교'만 제외하고 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인데, 이런 차별을 받고 있다. 많은 변호사들이 무상으로 도와주며, 함께 싸워주고 있다. 일본 전역에 7개의 고급부 '우리학교'가 있는데, 도쿄에서는 '금'요일에 학생들이 수업을 끝나면 문무과학성에 가서 시위를 하고 있다. 7년 째 이어오고 있다. 바로 <고교무상화를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 북한 '미사일', '핵' 보도가 뉴스에 나오면, 일본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에게 '미사일, 미사일' '대포동 대포동' 이라며 뒤에서 놀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나라의 학교를 세금을 써가며 왜 지원을 하느냐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들에게 적개심을 풀지 말라.

일본인들 중에는 양심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교육을 하는 것에 똑같이 지원하는 것이 응당한 일인데, 왜 지원을 하지 않느냐며 보편적 교육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함께 큰 목소리를 내주고 있다.

흩어진 재외동포들과 새 역사를 만들어 가자

우리가 우리를 더 알아야 하고, 더 가깝게 해야 할 존재인데, 그동안 정보가 차단되었다. 왜 그런지 모른다. 우리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를 안다. 또 한국의 입시제도, 치열한 경쟁 잘 알고, 취업이 어려운 것도 알고 있다.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절반은 맞는다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그 많은 분단비용을 살림살이로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단으로 인해서 '남'도 '북'도, '재외동포'들도 다 힘들다.

남과 북이 갈라지면서, 700만 재외동포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꿋꿋이 자신은 '조선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분단의 비극을 여기서 끝내고, 흩어진 이들과 이 세대가 함께 만나고, 교류하며 새 역사를 써갈 준비를 해가자. 이 모두가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학교' 친구들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밝은누리움터' 친구들도 그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아 감사하다.

고려인들에 대해 공부하고, 만났다고 들었다. 분단으로 인해 흩어진 이들을 잘 알고, 한반도에 안 살아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준다면, 어떤 편견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음에 서로 끌어당기는 '장력'이 있다. 여러분이 통일 조국의 1세로서 준비해 주면 좋겠다. 그런 삶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제 '북'에 갈 날이 멀지 않았다. 남쪽도 자기 조국이고, 북쪽도 조국이다. 둘로 갈라진 조국이 하나가 되었을 때 먼저 다가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여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동포들이 집을 못 짓고 있으면 가서 집도 지어주시길 부탁한다(삼일학림 학생들이 집짓기를 배운다고 소개 받으셔서 재밌게 말씀하셨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밝은누리신문>에도 실렸습니다. www.welife.org



태그:#삼일학림, #밝은누리움터, #재일조선인, #모셔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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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살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일어나는 작고 소소한 일들, '밝은누리'가 움틀 수 있도록 생명평화를 묵묵히 이루는 이들의 값진 삶을 기사로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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